[김문환의 지중해 모자이크 문명기행] ④ 이수스 전투

무대를 나폴리로 옮겨요. 나폴리(Napoli)는 네아(Nea) 폴리스(Polis)의 그리스어가 줄어든 말이죠. B.C 7세기 그리스인들이 본토에서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해 개척한 도시예요. 영국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개척한 뉴욕(New York). 영국에 있는 요크(York)를 본뜬 ‘새로운 요크’이듯이 그리스인들이 개척한 ‘새로운 도시(네아 폴리스)’라는 의미지요. 세계 3대 미항으로 손꼽히는 나폴리에는 국립박물관이 자리합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예술에 목마른 이들의 갈증을 해소해주기 안성맞춤이에요. 근처 폼페이에서 발굴한 유물을 전시하는데요. 조각, 프레스코, 특히 모자이크가 눈길을 사로잡아요. 박물관 2층을 수놓는 모자이크 전시실 마지막 공간, 즉 4번 전시실로 들어가면요. 폼페이 파우노의 집 엑세드라(야외 식당) 바닥을 장식했던 거대한 모자이크가 벽면 가득 장엄하게 펼쳐져요. 모자이크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널리 알려진 작품이어서 그런가요. 전시실 가장 안쪽 깊숙하게 보존돼 있답니다. 다른 모자이크의 경우 코 앞에서 바로 볼 수 있도록 걸어 놓은 것과 달라요. 투명 유리로 멀찌감치 10m 앞에 벽을 쳐 탐방객의 근접을 막을 만큼 귀하고 융숭한 대접을 해줍니다. 멀리서 훑어 봐야 하는 이 작품은 무슨 모자이크일까요.

▲ 알렉산더와 다리우스의 이수스 전투 전경. B.C 3C 말 - B.C 2C 초. 나폴리 박물관. ⓒ 김문환

마케도니아의 정복왕 알렉산더와 당시 세계 최대제국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벌였던 B.C 333년의 '이수스 전투(Battle of Issus)'를 다룬 모자이크랍니다. 일각에서는 이수스 전투가 아니라 2년 뒤 B.C 331년 다리우스 3세와 페르시아 제국을 결정적으로 궤멸시킨 '과가멜라 전투(Battle of Gaugamela)'라고도 하는데요. 그 근거는 모자이크에 등장하는 고사목(枯死木)이에요. 이수스는 터키 남부 비옥한 땅에 자리해요. 연중 푸르른 들판이죠. 대신 과가멜라는 오늘날 이라크 북부 쿠르드 자치주인 아르빌과 모술 근처 사막지대예요. 사막의 고사목. 그래서 과가멜라라는 겁니다. 우리 자이툰 부대가 가 있던 곳이죠. 하지만 헬레니즘 시대 모자이크 기법은 솦 속 정경을 그릴 때도 나무를 고사목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 이수스가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 다리우스 3세. B.C 3C 말 - B.C 2C 초. 나폴리 박물관. ⓒ 김문환

역사적인 무게에 걸맞게 규모도 커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세로 3.13m에 가로 길이는 5.82m. 무려 백 50만개의 미세한 테세라를 사용한 ‘마그눔 오푸스(magnum opus, 대작)’이죠. 헬레니즘 시기 예술가들이 선호했던 흑(黑), 백(白), 적(赤), 황(黃)의 4가지 색을 사용해 전체적으로 중량감 있고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내요. 전쟁이란 주제 표현, 나아가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묵직한 사건에 적합한 색상이지요. 치열한 전투장면과 등장인물의 섬세하고 생생한 표정 묘사가 무척 뛰어나요. 말들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표정도 사실성을 더해주고요. 원래 이 모자이크는 알렉산더와 동시대에 살았던 화가 아펠레스의 그림, 혹은 B.C 4세기말 화가 필록케노스의 그림을 모자이크로 모방 제작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전쟁을 담은 역사기록화예요.

▲ 알렉산더. B.C 3C 말 - B.C 2C 초. 나폴리 박물관. ⓒ 김문환

알렉산더의 모습을 볼까요. 가슴에 메두사 얼굴을 그려 넣었는데요. B.C 4세기 그리스 문명권에서 애용하던 무늬입니다. 그가 타고 있는 말은 그 유명한 부케팔로스. 그리스 신화의 명마 페가소스에 해당하겠지요. 전차를 타고 있는 다리우스는 겁먹은 표정이고, 전차병은 도망치려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승패가 갈린 전투의 인물 표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죠. 물론 승리한 측의 일방적인 왜곡일수도 있고요. 수많은 창, 병사들, 쓰러진 말이 한데 혼재돼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전쟁터를 적나라하게 그려냅니다. 당대의 최고 걸작이었을 이 모자이크가 폼페이 '파우노의 집'에서 발굴된 것은 1831년. 아직 나폴리가 이탈리아 영토가 아닐 때죠. 고고학자들은 1843년 작품을 현장에서 걷어 나폴리 박물관으로 옮겨왔어요. 이 작품은 헬레니즘 문화권의 지중해 동부 어딘가에 그리스인이 설치했던 작품인데, 이 지역을 정복한 로마인이 강탈해 폼페이 유력자의 집에 다시 설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페르시아 병사. B.C 3C 말 - B.C 2C 초. 나폴리 박물관. ⓒ 김문환

'이수스 전투' 모자이크와 관련해 2003년 새로운 프로젝트가 추진됐습니다. 복제품 제작.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수도이면서 5세기 기독교 모자이크의 중심지이던 라벤나의 국제 모자이크 연구교육 센터(CISIM)가 21만 달러를 들여 만들었어요. 원작에 44개의 점토판을 얹어 모양을 떠낸 복제품 제작에 22개월이 걸렸다네요. 복제품은 2005년 폼페이 '파우노의 집' 엑세드라 바닥에 앉혔습니다. 1843년 모자이크를 걷어 나폴리 박물관으로 옮긴 뒤 비어있던 곳이지요.


편집: 이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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