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의 유혹하는 에디터2] ⑦ 토요판의 반전

▲ 고경태

두려웠다. 살금살금 그날이 다가왔다.

2012년 1월 28일은 토요판 첫 호를 내기로 한 날이었다. 새해가 밝은 뒤 1면 디자인 포맷과 커버스토리 아이템 등 중요한 매듭을 지을 수 있었다. 필자를 정하지 못한 몇 가지 칼럼과 지면 조정 등 엉켜있던 실마리들도 하나둘씩 풀었다. 일 주일여를 남겨놓고는 아주 작은 빈칸들의 알맹이도 채웠다. 토요판팀 기자들은 취재를 끝내고 기사를 작성해 나갔다. 편집국 내 다른 부서 기자들과 외부 필자들의 원고도 들어왔다. 편집자는 제목을 뽑고, 사진기자는 촬영한 사진들을 추렸으며, 디자이너는 그 재료들을 가져와 지면의 모양을 잡아나갔다. 나는 원고 데스킹을 하며 각각의 면 작업공정이 한눈에 들어오는 회사 컴퓨터 모니터링 화면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초기 진통이 워낙 컸기 때문일까. 발행을 눈앞에 두고선 모든 일정이 지나치게 순조로웠다. 작은 펑크 하나 없었다. 문제는 독자들이었다. 어떻게 반응할지 두려웠다. 최종마감을 하루 앞둔 2012년 1월 26일까지 근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은 폭삭 늙었다"

어쩌면 익숙한 두려움이었다. 2005년 4월 <한겨레21> 편집장을 맡아 대대적 지면개편을 예고하고 추진할 때도 두려웠다. 얼떨결에 매체의 책임자가 되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하는 자기의심에 살이 떨릴 때였다. 2007년 봄 편집국 매거진팀장으로서 esc라는 생활문화섹션을 한겨레에서 선보일 때도 두려웠다. 당시 회사 내 분위기는 토요판 발행 직전과 유사했다. esc는 ‘잘 놀고 잘 먹고 잘 마시자’를 모토로 신선한 삶과 재미를 추구했다. "이런 성격의 섹션이 한겨레의 가치에 과연 부합하는가"라는 비판이 내부에서 팽배했다. 눈에 보이는 퀄리티로 입증해야만 비판을 잠재울 수 있었다. 2008년 10월, 난데없이 <씨네21> 편집장 직에 부임해 콘텐츠를 물갈이할 때도 두려웠다. 영화잡지를 한 번도 거쳐본 경험이 없었기에 주변의 눈초리가 부담스럽게 꽂혔다.

한 지인으로부터 "집을 하나 지으면서 10년은 폭삭 늙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파트를 팔고 그 돈으로 땅을 조금 사 단독주택을 지은 이였다. 최고의 건축책임자를 구해 설계부터 몽땅 맡겼지만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아 스트레스로 몸살을 앓았다고 했다. 공사 기간은 자꾸만 늘어져 비용은 늘어났고, 작업 과정에서 인부들은 말이 잘 먹히지 않았다고 했다. 문짝, 창문 등 소소한 무엇 하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툭하면 시비가 벌어졌노라고 했다. 매체를 ‘건축’하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한겨레 같은 매체는 개인 소유가 아니라는 점에서 의견조율이 더욱 까다롭다. 매체의 큰 구조물을 정하고 적재적소에 어떤 콘텐츠를 끌어다 쓸지 결정하는 과정은 피곤하다. 기존의 생각과 새로운 생각이 마찰을 일으키며 불꽃을 일으킨다. 꼭 새로운 생각이 옳다는 법도 없다. 최후의 마무리인 ‘디자인 마감재’까지 완성하고 나면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된다. 순식간에 늙어버린 느낌이 든다. "다시는 하지 않으리라"며 이를 갈게 된다. 그럼에도 당사자는 뭔가 배운다. 성장한다. 더구나 멋진 집이 지어질 땐 훌륭한 보상이 된다.

마침내 2012년 1월 28일. 한겨레 토요판 첫 호가 독자들의 집집마다 배달되었다. 아침에 신문을 펼쳐 든 독자들은 무엇을 느꼈을지 궁금했다. '눈이 휘둥그래졌을까? 천만에! 눈 버렸다며 인상을 찌푸렸겠지.' 그런 잡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몇몇 지인들로부터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왔다. 대부분 훈훈한 격려 문자였다. "지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생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신문을 오래 읽었다"는 요지였다. 그 수가 많지는 않았으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꾸준히 왔다. 믿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이라 냉엄한 평가는 아니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하나인 트위터로 들어가 보았다. 새로운 한겨레를 본 소감들이 속속 올라오는 중이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확~ 달라진 '한겨레토요판'과 함께 아침을 맞았습니다. '통영의 딸' 논란 관련 윤이상 부인과의 단독인터뷰, 풍성해진 읽을거리, 호흡이 긴 기사체, 정형화된 일간지를 벗어난 실험…어떻게 느끼실지 궁금^^"

"만화와 연재물이 많아졌고 문화, 역사비평, 칼럼, 르포 등 마치 문학책을 읽는 느낌이다. 한겨레 좀 오래 봐서 슬슬 바꿔 볼라 그랬는데, 토요일 지면이 바뀌는 바람에 마음 고쳐먹었다. 앞으로 토요일이 기대되네요."

▲ 2012년 1월 28일 치 <한겨레> 토요판 첫 호(좌)와 2월 4일 치 둘째 호(우). ⓒ 한겨레

이상한 놈, 환대를 받다

그날 쉼 없이 올라오는 독자들의 트윗을 휴대폰으로 훑어보며 조심스럽게 확신할 수 있었다. 두려움의 강을 건너 새로운 영토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도착했음을. 모습을 드러내기 전엔 우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지만, 이제 거대한 반전이 펼쳐질 수 있음을. 토요판 두 번째 호가 나온 직후 <기자협회보>에 실린 기사는 그 반전의 뚜렷한 징후였다.

“일간지 토요일판 대변신 바람 부나
-한겨레 ‘토요판’호평…지속성 여부가 관건

한겨레신문이 지난달 28일 내놓은 ‘한겨레 토요판’이 언론계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겨레 토요판’은 기존 신문의 섹션 지면이 아니라 본지 1면부터 편집과 내용에서 잡지형태의 신문을 지향해 새롭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동안 신문 섹션에서 주로 다뤄온 말랑말랑한 주제에서 벗어나 시사주간지 형태의 묵직한 내용으로 커버스토리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지난달 25일 첫 ‘토요판’ 커버스토리로는 경남 통영 출신의 음악가 고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씨 인터뷰를 실어 윤이상을 둘러싼 논란을 다뤘다. 4일자에는 정수장학회 최필립 이사장을 만나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둘러싼 논란과 파장을 실었다. 모두 1면과 3~4면에 걸친 기획기사였다.

편집도 바뀌었다. 제호 밑 가로선은 빨간색으로 바꿨고, 평일 6단 편집에서 5단으로 줄였다. 여백이 넓어져 글자가 시원하게 읽히는 게 장점이다.

내용에서는 코너의 짜임새가 돋보인다. 선임기자와 평기자들이 지난 한 주와 다음 주를 조망하는 ‘리뷰&프리뷰’(2면) 스포츠계의 맞수를 조명하는 ‘승부’(10~11면), 뉴스분석 왜?(12면), 책과 생각(13~17면), 최재봉의 공간(20면), 만화 ‘히틀러의 성공시대’(21면),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22면) 등으로 꾸며졌다. 스트레이트 기사는 1면 하단과 5~8면 ‘오늘’면에 배치됐다. (중략) 또한 김두식, 서천석, 김형태, 한홍구, 신영복 등 내로라 하는 필진이 참여해 기자들의 지면부담을 덜었다. (중략)

이충재 한국일보 편집국장은 “기획기사와 인터뷰, 읽을거리 등이 적절하게 접목돼야 훌륭한 기사가 나올 수 있다”며 “콘텐츠 기획력 없이는 시도만으로 그칠 수 있지만 한겨레는 구성이 잘 됐다. 향후 지속성 여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은 지면개편 태스크포스를 꾸려 내달 1일자로 토요일자를 비롯한 지면개편을 단행할 계획이다. (중략)

조선, 중앙, 동아 등 주말판 섹션을 발행해 온 신문들의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는 가운데 한겨레의 ‘토요판’실험이 타 신문들의 변화를 가져올 지 주목된다."

(원성윤 기자, <기자협회보> 2012년 2월 8일 치)

 

▲ <기자협회보> 2012년 2월 8일 치 7면 머릿기사. ⓒ 기자협회보

딱 두 번 보여주었을 뿐인데, 독자들은 물론 업계의 ‘선수’들까지 좋게 말해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기자협회보>는 ‘섣부른 예단’까지 했다. “한겨레의 토요판 실험이 타 신문들의 변화를 가져올 지 주목된다”고. 신문 편집기자들의 단체에서 만드는 <편집기자협회보>는 두 번에 걸쳐 관련기사를 내보냈다. 먼저 2월29일치 새 기획코너 ‘이게 편집이다’의 첫 회로 ‘한겨레 토요판의 비밀’을 다뤘다. 3월30일치에서는 연재칼럼 ‘내 마음속의 멘토’에 한겨레 토요판을 등장시켰다. <중앙일보> 편집부 기자의 글이었다.

“새 DNA 창조한 토요판의 파격

(앞 생략)사람들은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한다. 특히 눈으로 바로 확인되는 시각적 형태가 변화된다면 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변화가 되면 두려움만큼이나 놀라움도 크다.

1월28일 토요일, 한겨레 토요판을 봤을 때 내 기분이 그랬다. 어제까지 한겨레신문의 포맷에 익숙하던 눈이 오늘 번쩍 뜨인 것이다. (중략)

화려하게 치장하거나 복잡하거나 아무리 단순하게 만든다 해도 고유의 DNA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냥 잘 짜여진 한 개의 지면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한겨레 토요판은 한겨레만의 고유한 DNA 지도를 가진 신문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한겨레 토요판은 매일 레이아웃에 몰두하던 나에게 또 다른 생각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런 과감하고도 치밀하게 디자인하고 결정한 에디터와 디자이너에게 내가 받은 감동과 놀라움을 담아 멋진 윙크를 날려보낸다. ”

(<중앙일보> 김호준 기자)
 

한겨레 토요판은 기존의 한국 언론시장에 없던 ‘이상한 놈’이었다. “이상해서 못 봐주겠다”는 천대를 받지는 않을까 두려웠는데, 오히려 분에 넘치게 환대를 받았다. “고유의 DNA를 창조했다”는 말은 그중 최고의 상찬이었다.

DNA. 그렇다. 이 유전자에 매력이 없다면 얼마 못 가 생명을 다했을 텐데 오히려 ‘복제’되는 운명이었다. <한국일보>는 3월 3일 치부터 1면에 자사의 영문 이니셜을 딴 ‘H’를 달고 커버스토리 기사를 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기사 중심으로 꾸몄으되 ‘토요판’이라는 말은 붙이지 않았다. <중앙일보>는 3월 17일 치부터 한겨레처럼 1면 제호 옆에 ‘토요판’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한국 신문사상 공식적으로 두 번째 ‘토요판’이 세상에 나온 셈이었다. <중앙일보> 토요판은 노무현-김정일의 2007년 정상회담 뒷이야기를 담은 커버스토리 기사를 1면 머리로 실었다. 지면도 완전히 새로 단장해 인물과 르포 등 심층기획을 대거 늘렸다. 홍석현 회장의 지시에 따른 조처라는 소문이 돌았다. 한겨레 토요판이 발행되자마자 자사 편집국 간부들에게 비슷한 형식으로의 토요일 치 지면쇄신을 주문했다는 거였다. (나중의 일이지만 이후 <경향신문>(2012년 6월 16일), <국민일보>(2012년 7월 7일), <동아일보>(2013년 2월 16일), <부산일보>(2013년 3월 9일), <세계일보>(2013년 11월 2일)가 토요판 대열에 합류했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한가

토요판 DNA의 핵심은 ‘스토리페이퍼’였다. 단발성 뉴스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스토리. 섹션의 차원을 넘어 하루치 신문 전체를 관통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찾아내고 퍼뜨리는 고정 플랫폼. 이는 신문의 호흡을 바꾼다는 뜻이었다. 긴 호흡! 한겨레 토요판은 길게 숨 쉬는 뉴스생산자의 어떤 원조가 되었다.

‘스토리페이퍼’가 전부는 아니었다. 토요판 출발과 함께 잇따라 터뜨린 특종을 빼놓을 수 없다. 앞의 <기자협회보>가 기사에서 언급했던 첫 호와 둘째 호의 이수자, 최필립 인터뷰는 모두 단독보도였다. 다른 언론들이 이를 인용해 보도했다. 토요판의 미덕이 형식파괴에나 상대적으로 한가한 취재 뒷이야기에만 있지 않음을, 현실세계에 자극과 파동을 주는 매체파워가 작동함을 과시한 기사였다.

회사 내부의 부정적 여론은 쏙 들어갔다. 성공적인 작품을 출시했다는 평판이 지배적이었다. 앞에서 밝힌 대로, 반전이었다. 달콤한 평가에 취해선 안 되었다. 더 긴장해야 했다. 토요판을 둘러싼 모든 논란이 종식되지도 않았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논쟁은 이제부터였다. 살금살금 그날이 다가왔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한겨레 편집국 신문부문장. <유혹하는 에디터>에서 <1968년 2월 12일>까지 4권의 책을 썼다. 2009년에 낸 <유혹하는 에디터>가 편집자를 다뤘다면, 2016년의 이 연재물은 편집장 이야기다. <한겨레21> 편집장, <씨네21> 편집장, esc 팀장, 오피니언넷 부문 기자, 문화스포츠 에디터, 토요판 에디터 시절의 에피소드로 버무릴 예정이다. 격주 연재.  

편집 : 이명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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