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황금빛 기자

▲ 황금빛 기자

이세고리아(Isegoria)’는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의 동의어처럼 쓰였다. 이세고리아의 뜻은 ‘평등하게 말하기’인데 이는 곧 기회의 평등이다. 기회의 평등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다. 즉 이세고리아는 모든 시민에게 주어진 자유롭게 말할 권리다. 하지만 이세고리아는 현대적 의미로 언론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와 다르다. 이준웅은 <말과 권력>에서 이세고리아가 국가나 다른 권력기관의 검열이나 감시에 두려워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의사소통하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는 권리는 아니라고 말한다. 민회나 시민법정 등 ‘공적 장소’에서 시민이라면 누구나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발언의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에 이세고리아는 없다. 일단 ‘공적 장소’가 없다. 이세고리아는 토론을 통한 논쟁을 보장해 사회적 약자도 강자에 대항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공적 장소는 찾기 힘들다. 이는 사회적 약자가 자기 주장을 펼쳐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음을 반증한다. 대표적 사례가 ‘가습기 살균제 사고’다. 피해자들은 영국까지 날아갔다. 여기서 피해자인 사회적 약자들이 피해를 호소하기 위해 멀리까지 가야 했던 사실과 한국을 넘어 외국의 관심을 끌어야 했던 한국의 현실이 중요하다. 처음 가습기 살균제 부작용이 신고된 것은 2001년이다. 2013년 제출된 가습기 살균제 관련 특별법은 국회에 3년째 잠자다 19대 국회 폐원과 함께 폐기됐다. 공적 장소는 공청회다. 특별법이 바로 통과됐다면 공청회가 열렸을 것이다. 피해자인 약자들의 발언 권리도 보장됐을 것이다.

한국에 이세고리아가 없는 또 하나 이유는 ‘발언의 자유’를 더 높은 수준에서 보장할 ‘약자의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려면 적절한 언어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언어는 대개 한 사회의 강자에 의해 의미가 한정지어져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남녀간 사랑에 한정돼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고려하지 않는다든지, ‘노동자’라는 단어에 불온함이 덧씌워져 노동절이나 노동조합에 부정적 시각을 갖게 하는 것이 그 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언어도 병역기피자와 구분되지 않고 쓰여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 공적 장소가 있었다면 언어의 의미를 둘러싸고 자유로운 의견교환도 이뤄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강자가 추구하는 사고방식에 맞춰 틀 지워진 언어가 사회를 독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구글 이미지

공적 장소가 있었다면 우리는 가습기 살균제 사고와 같은 참사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고, 어쩌면 2001년에 막았을지도 모른다. 공적 장소가 있었다면 언어의 의미를 둘러싸고 자유로운 의견교환도 이뤄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강자가 추구하는 사고방식에 맞춰 틀 지워진 언어가 사회를 독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결말은 사회적 약자들이 어떠한 언어에 덧씌워진 사회의 부정적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하고 싶은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평화주의자들의 대담집인 <저항하는 평화>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다양한 목소리를 수용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구성원들은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틀에 맞추게 된다.’ 공적인 장소도 약자의 언어도 없다면, 진실은 은폐되고 사회에 대한 허무주의가 만연하고 결국 침묵하는 사회가 된다.


편집 : 박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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