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이재덕

▲ 이재덕 기자  
현대사회를 흔히 ‘지식기반사회’라고 부른다. 이전 산업사회에서 사회의 부를 생산했던 것이 노동과 자본이었다면 이제 그 자리를 지식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다니엘 벨이 70년대에 이미 후기산업사회를 정의 내리며 만들어낸 이 용어는 엘빈 토플러와 피터 드러커 등을 거치며 현대사회를 일컫는 말로 자리잡았다.

지식기반사회의 대학은 부가 되는 지식을 습득하고 생산하는 곳이다. 많이 습득하면 할수록 학생들이 생산해 내는 지식의 양과 질은 높아지며 이는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지식기반사회의 대학관이다. 경쟁은 학생들이 지식을 최대한 많이, 빨리 습득하는 데 쓰인다. ‘가능한 한 열심히 공부해라, 다 너희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기성세대의 조언은 지식기반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대학에서 한국의 학생들은 지식습득기계가 되어버렸다. 학점은 높아야 하고, 전공은 두 개 이상, 영어강의는 필수다. 일정수준 이상 토익점수와 자격증까지 취득해야 졸업이 가능하다. 대학 내 경쟁시스템은 학생들에게 성찰할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는다. 풍요롭게 쌓여가는 듯한 지식에 비해 ‘무엇을 위한 지식인지’, ‘누구를 위한 지식인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하다. 이것이 지식기반사회의 허점이다. 도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한 지식인가?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학생은 기업의 ‘자원’으로 다뤄진다. ‘카이스트 학생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학교에 다니니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는 국가주의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이 속에서 지식습득기계가 된 학생들은 자아에 대한 고민은 물론, 타인과 사회에 대한 성찰 기회마저 잃는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반일리치가 “젊은이들은 학교에 의해 처음부터 소외되고 있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MIT 대학의 노엄 촘스키는 ‘이해기반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해란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세계 속에서 우리가 처한 본래의 자리에 대한 통찰”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학습은 맹목적인 지식습득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 사회에 대한 이해 속에서 자신이 배운 지식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일이라는 말이다.

개인마다 성격, 특성, 관심 등이 다르므로 이해와 성찰을 위해서는 각기 다른 시간과 다른 경험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한정된 시간 안에 누가 주어진 커리큘럼을 완벽하게 습득하는가를 측정하는 현재 대학 시스템은 바뀌어야 한다.

학생들의 자치, 토론, 세미나 등의 활동은 학생 스스로 자신과 사회를 성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동아리에서 1주일간 축제준비를 하다가 한 한기 내내 학교수업을 못 따라가 결국 징벌적 등록금을 내야 했다는 카이스트 학생의 고백과는 정반대 모습이다.

학생들에게 스스로 성찰할 시간과 기회를 주자는 촘스키의 주장에 MIT 교수들은 조금 걱정이 됐던 듯하다. MIT위원회에서 한 교수가 촘스키에게 물었다.

“우리는 학생들이 커리큘럼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자유시간을 주면 게을러질까 봐 걱정됩니다.”

촘스키가 답했다.

“지적 내용의 상실 같은 문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위험은 감수해야 합니다.”

이런 지적 전통 덕분일까? 6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반전평화운동과 히피문화를 주도했던 것은 인근 하버드대가 아니라 MIT였다. 그들은 누구보다 권력을 비판했고 자신과 타인을 사랑했다. 그것이 MIT와 카이스트의 차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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