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전주국제영화제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

고풍스러운 역사를 빠져나오자 광장에는 청년들이 가득했다. 봄바람 부는 역 앞 쉼터는 여대생들의 첫 인증장소다. 사진의 배경은 거대한 한옥 세 채가 나란히 있는 전주역. 전국의 역들이 투명 유리에 둘러싸여 현대화하고 있지만, 정작 관광객들이 눈길을 주는 건 예스러운 역이다. 광장 주위를 둘러싼 ‘Jeonju, Film Festival'이라 쓰인 깃발들이 청춘들을 환영하는 춤을 춘다. 17돌을 맞은 전주국제영화제(JIFF)가 열리는 곳. 영화의 도시 전주다.
 
“지도 한 장 챙겨요.” 영화제가 진행되는 고사동에 가냐고 묻자 한 버스기사가 답했다. 버스정류장 옆 관광안내소에는 중국어를 비롯한 4개의 언어로 쓰인 영화제 안내 지도가 비치되어 있다. 지도를 챙겨들고 545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전주역에서 영화제가 진행되는 고사동까지 가는 버스는 10여대나 된다. 차내에서 지도를 뒤척거리자 옆 자리의 시민이 “영화제 가려면 객사 근처에 내리라”며 조언해 준다. 전주 관광객 1000만 시대, 시민들은 자발적 가이드다. 기자가 영화제 현장을 찾은 건 개막 다음날인 지난 29일이었다.

▲ 영화의 거리가 시작되는 고사동 입구. 310m 길이의 이 거리에서 대부분의 영화제 행사가 진행된다. ⓒ 임국정

절치부심한 국내 최초의 독립 영화제
 
‘대안영화, 디지털, 독립영화’를 내세우며 시작한 전주국제영화제가 어느새 17회를 맞았다. 미국 재즈음악가의 삶을 다룬 영화 <본 투 비 블루>를 시작으로 이달 7일까지 19개관에서 211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조직위원회가 고심 끝에 선정한 폐막작은 <베테랑>을 연출한 류승완 감독의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다. 조직위는 17돌의 영화제를 돌아보는 의미로 1회에서 상영했던 이 영화를 택했다.

작년 영화제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국고지원을 받은 6개 영화제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전주영화제는 ‘현장만족도 최하위’를 기록했다. 절치부심한 조직위의 선택은 ‘집중’이었다. 영화의 거리와 시내 곳곳에 나눠있던 행사장을 도심 한복판 고사동 거리로 모았다. 시민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10여개 관이 몰려있는 CGV 옆 옥토주차장 부지에 야외상영장과 무대도 마련했다. 홍보미디어팀 한은민 팀장은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작년에 비해 야외상영장 규모를 축소하는 대신 객석과 음향 등의 질을 높였다”고 했다.

▲ 야외상영과 공연이 벌어질 옥토주차장. 개막작을 비롯해 총 7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 임국정

해가 기울자 영화의 거리에 시민들로 붐볐다. 거리 양 옆에 위치한 3m 높이의 기둥에는 100편의 영화 포스터가 펄럭인다. 상영작 100편을 그래픽 디자이너가 재해석한 ‘100 Films 100 Poster'다. 주점 앞 빈 공터에는 거리의 악사가 야외공연을 하고 있다. 신명나지만 그리 소란스럽지는 않은 락 음악에 길을 가던 시민들이 몰렸다. 음악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들던 신아영(23)씨는 “한옥마을 때문에 전주에 왔는데 영화제까지 해서 즐겁다”고 했다.

새 단장한 영화제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일단 긍정적이다. 개막식이 열린 첫 날에는 2000여 석의 야외상영장이 가득 찼다. 기자가 찾은 이튿날은 쌀쌀한 날씨에도 객석 절반을 채웠다. 3번째 야외상영작인 <동주>는 이미 전량 매진됐다. 매년 영화제를 찾는다는 박일규(55·전북 전주시)씨는 “개막장소 등 행사장이 한 곳에 모여 있어 영화제를 즐기기에 최적이다”고 했다. 현장에는 ‘지프지기’가 불리는 자원봉사자들이 미리 준비된 3000여 장의 담요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저녁 9시 고사동서 도보로 10분 거리인 풍남문에 수백 명의 시민들이 몰렸다.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선 보이는 미디어파사드를 관람하기 위해서다. 미디어파사드는 건물 외벽에 LED로 이미지를 투사해 정적인 건물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예술 기법이다. 이 날의 주제는 ‘한국고전영화를 통해 보는 근대 생활사’. 15분 간 진행된 빛의 향연 중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 영화제 기간 내내, 매일 밤 9시와 9시 30분에 풍남문에는 빛의 축제인 미디어파사드가 펼쳐진다. ⓒ 임국정

하나부터 열까지, 시민으로 진행되는 영화제

일반적으로 영화제는 ‘영화인들의 축제’로 불린다. 그 전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적극적인 협조다. 기자는 영화제 모든 현장에서 행사를 끌고 가는 ‘시민’들을 만났다. ‘volunteer' 점퍼를 입은 자원봉사자와 영화제 소식을 라디오로 제작하는 시민제작팀, 그리고 상인에 이르기까지 전주시민들이 나서 성공적인 축제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전주영화제의 자원봉사자인 ‘지프지기’는 300여 명. 이들은 기획팀에서부터 홍보실까지 33개 분야에서 활동한다. 영화제가 진행되는 모든 곳에 지프지기가 있다. 작년 12월 첫 모집에서 지프지기 평균 경쟁률은 4:1. 초기 뽑힌 390여 명에서 3차에 걸친 면접과 사전교육 끝에 정예인원만 남았다.

“큰 보상을 받는 건 아니지만 정말 재미있게 참여하고 있어요. 올해가 첫 참가인데, 행사 진행이 너무 즐거워서 계속해서 활동하려고 해요. 이미 수 년 째 활동 중인 지프지기들도 많고요.”

홍보미디어팀에서 만난 지프지기 이가영(23)씨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전주대학교에 재학 중인 전주토박이다. 학교 선후배들 대부분이 지프지기 활동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차량 통제를 맡은 김동혁(26·대학생)씨도 “간혹 통제에 따르지 않는 차량이 있어 힘들지만, 시민들의 안전을 책임지기에 보람 있다”고 했다.

영화의 거리에는 흘러나오는 전주영화제만을 위한 방송 ‘지프엠(JIFF+FM)'도 시민들의 참여로 제작된다. 사전 교육을 통해 선발된 ’시민제작팀‘이 기획 및 제작, 방송 진행과 송출까지 담당한다. 전주 시내에서만 들을 수 있는 지프엠은 영화제 관련 교통 및 날씨 정보나 영화 OST 등을 제공한다. 공동체미디어팀 장주원씨는 “영화제가 없을 때도 영화제를 알리는 팟캐스트나 보이는 라디오를 운영한다”고 설명했다. 라디오 부스 안에서 바삐 움직이던 제작팀에게선 전문가 못지않은 열정이 느껴졌다.

▲ 전주영화제 소식을 전하는 방송인 ‘지프엠’ 제작 부스 앞에서 시민들이 제작 현장을 보고 있다. 이들은 즉석에서 사연을 보낼 수도 있다. ⓒ 임국정

영화를 거리를 걷고 싶은 거리로 만들자는 공감대가 퍼지면서 주변 상인들 역시 행사에 적극 협조했다. 차량 통제와 홍보 등에 힘을 보탰다. 고사동에서 10년 째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한명순(50)씨는 “행사에 적극 참여했더니 상권이 되살아나는 효과가 났다”며 바삐 움직였다.

잘 준비된 축제, 여전히 남는 아쉬움

조직위는 작년의 혹평을 만회하기 위해 확실히 공을 기울였다. 하나, 국제영화제라는 명성에 맞지 않는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먼저 관람의 편의성이다. 6개 관에서 행사가 진행되지만, 발권은 옥토주차장 입구에 있는 매표소에서 한 곳에서만 해야 했다. 토크 클래스가 진행된 ‘카페 하루일기’를 찾은 한 관객은 입장권을 발급받기 위해 도보로 20분 거리를 다녀왔다. 온라인 예매는 편의성을 높였음에도 여전히 장년층에게 생소했다. 가까운 곳에서 하는 축제라 매년 현장을 찾는다는 송은희(55)씨는 “영화는 종종 보는 편이지만, 전주영화제에선 한 편도 본적이 없다”며 “영화 종류에 대한 안내나 현장 발권이 가능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310m에 이르는 영화의 거리 중 절반 이상이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되고, 자전거 무상 대여를 통해 자전거로 다양한 장소에 접근하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기자가 지켜 본 결과, 20초에 한 대 꼴로 차가 지나갔다. 오토바이나 택배차량, 견인차도 있었지만 승용차도 적지 않았다. 차량을 통제하는 봉사자는 “관계자라고 해서 들여보내준다”고 했다. 서울에서 온 임보람(23)씨는 “자전거를 빌려주는 건 좋지만 차량 통제는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다”며 불만을 나타냈다. 한 행인은 “자전거는 제대로 다니게 해줘야지”라며 소리를 높였다.

이벤트 프로그램의 컨셉이 모호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매일 저녁 5시, 야외상영장 옆 전주스테이지에서 열리는 행사 명칭은 '뮤지션, 영화와 만나다'다. ‘영화에 대한 담론과 공연이 어우러지는 토크콘서트’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이날 5인조 밴드 데이브레이크가 나와 30여 분 간 공연을 펼쳤지만 토크와 담론은 없었다.

‘시민들 없인 불가능한 영화제’ 하루 종일 현장을 취재한 기자가 받은 인상이다. 수백 명의 봉사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거리에는 전국에서 온 영화팬들로 북적였다. 화장실을 찾는 외국인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시민도 있었다. 올 전주영화제의 슬로건은 ‘봄의 영화도시’. 화창한 봄의 한가운데 시민들이 있었다.


편집: 신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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