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권영우 세명대 설립자 10주기 추도식

“학교는 네가 판단해서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사회에 환원해라.”

아버지 권영우 박사가 남긴 유언을 읽는 대목에서 목이 멘 권동현 세명대 기획실장이 발간사 낭독을 멈췄다. 몇 초간 침묵이 흐르자 추모식장인데도 격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듣지 않는 곳에서 삼가며 보지 않는 곳에서 진실하자’(愼其獨)는 경구를 일생 동안 증명해 보인 민송 권영우 박사의 삶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 민송 권영우 박사 10주기 추도식에 각계 인사 500여 명이 참석했다. ⓒ 김명진

세명대학교 설립자인 민송 권영우 박사 10주기 추도식이 21일 오전 세명대학교 체육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고인의 유가족과 친지, 자매기관 임직원 등 각계 인사 500여 명이 참석했다. 추도식에는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심우영 전 총무처장관,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장관, 서남수 전 교육부장관, 김광림 의원, 권석창 제천-단양 국회의원 당선자, 이근규 제천시장, 허명회 KD운송그룹 회장 등도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세명대학교 설립자 추모 준비위원회’가 주관한 추도식은 오전 9시 30분 고인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을 시작으로 추도사, 전날 열린 민송 백일장 장원 시상식, 민송 자서전 봉헌, 추모 다큐멘터리 상영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용걸 세명대 총장은 추도사에서 “민송은 생전 몸이 불편한 중에도 끝까지 학교에 나와 풀 한 포기, 벽돌 한 장까지 챙기는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며 “격변하는 교육현장에서 세명대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민송의 민족애와 교육열정, 굳은 의지를 제대로 본받아 계승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민송백일장 중학생부 운문 부문 장원 이윤주(의림여중)양이 상장과 상금을 받고 있다. ⓒ 세명대학교 공식 블로그
▲ 고인의 부인 김형순 여사와 아들 권동현 세명대 기획실장이 유고 자서전을 봉헌하고 있다. ⓒ 세명대 대외협력처

교육은 투자(投自)다

권 박사의 장남인 권동현 세명대 기획실장은 발간사에서 “10주기를 맞아 이제서야 당신의 유고를 ‘교육은 자신을 온전히 던지는 것’, 곧 <교육은 투자(投自)다>라는 제목의 작은 책자로 엮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자신을 던지고 계시는 교직원․종업원 여러분, 그리고 외부에서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권 실장은 “운명 직전 혼수상태에서 눈도 못 뜨시는 아버지 귀에 대고 경황이 없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란 말만 반복했는데 들으셨는지 모르겠다”면서 목이 메인 채 “아버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쳐 추모식장을 숙연하게 했고 일부 참석자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 권영우 박사에 대해 증언하는 민영진 목사. ⓒ 다큐멘터리 <교육은 투자다> 화면 캡쳐

이어 탤런트 최불암씨가 내레이션을 맡은 권영우 박사 추모 다큐멘터리가 60분간 상영됐다. ‘교육은 투자(投自)다’라는 주제로 권 박사가 일생 동안 실천했던 ‘세상을 이롭게 하라’ ‘사람이 기본이다’ ‘안 보는 데서 진실하라’는 경구가 이어지며 생전의 일화들이 소개됐다. 다큐에는 당시 동료 국회의원, 가족, 대원여객 직원, 세명대 1회 졸업생, 비서와 운전기사까지 각자가 바라본 민송의 단면들이 담겼다.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면서도 민송의 유덕을 힘써 증언한 고인의 친구 민영진 목사가 증언 다음 날 운명했다는 내레이션이 이어지자 체육관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이봉수 원장과 장해랑 교수가 제작을 총괄했고, 제3 비전이 제작 실무를 맡아 진행했다.

고생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

1941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소년 권영우는 일찍 철이 들었다. 아버지 권태건씨가 일제의 징집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뒤 유복자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배고픈 삶을 견뎌내야 했던 까닭이다. 중학생이 될 무렵 소년은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국수 한 그릇 섣불리 사먹을 돈이 없었다. 신문팔이가 되려다 깡패들에게 얻어터지기도 했고 하수도 공사장에 있는 시멘트관 속에서 가마니를 덮고 노숙을 하기도 했다.

우연히 고향 사람이 운영하는 약국에 자리를 구해 잔심부름을 하며 생계를 해결하는 듯했지만 변변한 이부자리도 없는 골방에서 겨울을 나기란 쉽지 않았다. 새벽 4시 반이면 약국 문을 열고, 밤 늦게까지 심부름하는 일이 반복됐다. 손과 발은 동상에 걸려 시들어갔다. 결국 생의 의미도 희망도 가질 수 없었던 까까머리 꼬마는 수면제 한 움큼을 집어삼켰다.

다행히 약국 주인의 빠른 조처로 목숨을 건졌고 대우가 더 나은 다른 약국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그 약국에서 소년은 눈치 빠르게 일하면서 약을 조제하고 주사도 놓으며 약국을 잘 관리했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주인이 월급을 주겠다고 제안하자 “월급 대신 중학교에 보내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향학열이 높았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약국 주인의 아들을 잘 가르쳐 경복중학교에 입학시켰다. 입소문이 퍼지고 학부모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6명으로 시작한 과외는 이후 8년간 지속됐다. 한 사람당 3만원씩 한 달에 18만원,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하고 일 년에 200만원을 저축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차곡차곡 사대문 밖의 논을 사들이며 형편이 나아진 청년 권영우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고향에 계신 어머님을 모셔오는 것이었다.

▲ 판잣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돈을 모았던 권영우 박사. ⓒ 다큐멘터리 <교육은 투자다> 화면 캡쳐

청년 실업가의 꿈

청년 권영우는 목욕탕 사업을 시작했다. 약국에서 일하면서 익힌 사업 감각으로 목 좋은 땅을 사고 건물을 지었다. 전농동에서 시작한 ‘반도목욕탕’은 답십리, 전농동 로터리로 확장됐다. 이때 건축을 배운 경험은 훗날 세명대학교와 대원과학대학을 지을 때 건물 배치와 구조 등을 직접 결정할 정도로 큰 도움이 됐다.

▲ ’정도경영’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는 등 회사를 버스업계의 대표주자로 이끈 권영우 박사. ⓒ 다큐멘터리 <교육은 투자다> 화면 캡쳐

처남과 돈을 합쳐 시작한 신용금고는 동대문구 숭인동 시외버스터미널에 있었다. 청년실업가 권영우는 그곳에서 운수업의 장래를 내다봤다. 적은 액수지만 수익이 현금으로 들어오는 운수업의 매력을 따라갈 만한 사업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버스회사를 직접 운영해야겠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할 사업이다’

그는 당시 한진이 운영하다가 부도 낸 삼용운수를 인수하기 위해 조중훈 회장을 찾아갔다. 그러나 조 회장은 서른한 살의 새파란 청년을 만나주지 않았다. 몇 차례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자 그는 현금이 가득 든 가방을 들고 찾아가 조 회장과 담판을 지었다. 계약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조 회장이 말했다.

“권 사장. 당신 꼭 성공할 거요. 그 배포가 마음에 들고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소.”

3선 국회의원을 거절하고 하고 싶었던 일 

▲ 11대 총선 당시 전국 최다득표를 기록하고 국회에 입성한 권영우 박사. ⓒ 다큐멘터리 <교육은 투자다> 화면 캡쳐

1980년대 들어 집권한 세력이 청년실업가에 정치에 참여할 것을 강권하다시피 했다. 그는 입신양명이 아닌 서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정치 일선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는 선거운동에 들어가기 앞서 동대문 지역에 출마했던 선배 국회의원들을 모두 찾아가 인사했다. 지역의 각종 협회, 미용업계, 식당업계 모임에 나가 정견을 발표하고 시장바닥을 걸어 다니며 일일이 서민들을 만났다. 그는 그 당시 돈으로 매달 천만원 이상씩 쓰며 지역구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실시된 1981년 3월 25일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3만8천여표를 얻어 압도적인 1위로 국회의원이 됐다.

그는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틈나는 대로 지역구를 다니며 많은 사람들과 현안을 논의했다. 비서관과는 하루 중 아침에 한 번, 퇴근할 때 한 번 만나는 게 고작이었다. 권 의원이 못 가는 곳은 비서관이 가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비서관은 운전을 할 줄 몰랐기에 권 박사는 기사가 딸린 차를 하나 구해주었다. 국회의원 중 비서관이 차가 있는 경우는 권 박사와 국회의장 둘뿐이었다.

권 박사는 두 번째 국회의원직을 마칠 즈음 3선이 따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인데도 정계를 떠나 교육에 온몸을 던졌다. 이미 1970년대부터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고향 안동을 생각했지만 이미 대학이 자리잡고 있었다. 다음으로 서울을 오가며 눈여겨봤던 제천이 후보지로 떠올랐다. 물 맑고 산 좋으며 내륙의 중심인데도 교육시설은 미비했다. 그러나 대학 설립인가를 받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후 제천지방에 대학을 유치해 주겠다고 공약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서 일사천리로 업무가 진행됐고 1988년 가인가가 났다.

조그만 도시 제천에 대학교를 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권 박사는 개교준비위원회를 꾸려 주변 여러 대학의 개교 과정을 벤치마킹하고 신문광고를 통해 교수를 채용하고 학생도 모집했다. 초기에 학생을 뽑을 때는 교수들이 수십 개 고등학교에 직접 찾아 다니며 부탁했다. 학생만 보내주면 잘 지도해서 취업시켜 내보내겠노라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전통이 없는 신흥학교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서울역, 강남, 인천, 수원, 분당에 사무실과 원서 접수창구를 만들어 홍보하는 등 부단히 노력한 결과 2001년도 입시에 정시모집 9.3대 1이라는 성공적인 경쟁률을 보였다. 현재는 실무, 인성 위주의 교육으로 학생들 스스로 학교에 만족하고 있다.

▲ 세상을 위해 빛과 밝음을 준다는 ‘위세광명’은 권영우 박사의 교육 철학이었다. ⓒ 다큐멘터리 <교육은 투자다> 화면 캡쳐

권 박사는 교육사업을 시작하면서, 사업은 망해도 교육은 망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혹시나 대학이 문을 닫게 되면, 세명대학교 교문 앞에서 그 기둥을 붙잡고 쓰러져 울 것이라고도 말했다. 세상을 위해 빛과 밝음을 준다는 뜻의 ‘위세광명’ 에서 온 ‘세명대학교’. 세명대 뒷동산에 잠들어 있는 권 박사는 학교가 그런 역할에 충실한지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다.


편집 : 박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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