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세명대 민송백일장과 장석주∙황선미 북콘서트

조선 시대부터 대낮에 글솜씨를 겨룬다 하여 그 이름이 붙었다는 백일장(白日場). 글쓰기 문화의 퇴조와 함께 대회가 사라져 가고 있는 요즘 충북 제천 세명대학교에서 백일장이 재연됐다. 원래 어린 학동이나 젊은 유생들의 시적 재능을 겨루는 대회였으나, 이번 백일장에서는 운문과 산문으로 나눠 중학생부와 고등학생부뿐 아니라 대학∙일반부까지 개설돼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전국에서 세명대로 몰려들었다.

▲ 백일장 참가자들이 줄을 서서 신청을 하고 있다. © 민수아

군산에서 온 노인부터 중학생까지 참가 열기

세명대 설립자인 민송 권영우 박사의 10주기를 기념해 열린 이 대회는 370여 명이 참가신청을 하는 성황을 이뤘다. 전북 군산에서 왔다는 최종길(64)씨는 “집이 멀어 전날 찜질방에서 잤다”며 “인터넷에서 보고 지원했다”고 말했다. 중학생부에 접수한 이수진(15)양은 “선생님께 백일장 기회가 있으면 알려 달라고 부탁한 덕분에 추천을 받아 오게 됐다”며 “오후에 진행되는 황선미 작가를 만나는 게 기대된다”고 말했다.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학교, 세명대학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김기태 교수가 주제가 적힌 족자를 펼쳐보이고 있다. © 민수아

긴장을 풀려는 듯 백일장 진행을 맡은 김기태 미디어창작학과 교수가 가볍게 말문을 열었다. 오전 10시, 글 제목을 적은 족자가 펼쳐지자 누군가의 입에서 ‘아’하는 가벼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날의 주제는 ‘나무’. 참가자들은 햇볕 따사로운 캠퍼스 곳곳으로 삼삼오오 흩어져 생각을 가다듬었다.

▲ 중학생 참가자들이 글쓰기에 앞서 간식을 먹으며 소풍을 온 것처럼 즐거워하고 있다. © 민수아
▲ 대학∙일반부 참가자들이 잔디밭에 누워 글을 써내려 가고 있다. © 민수아

마감 시간인 오후 1시가 되자 백일장 진행본부인 학술관으로 참가자들이 다시 모여 정성껏 쓴 글들을 제출했다. 응모작은 모두 320여 편. 신청자 가운데 50여 명은 글이 잘 써지지 않은 듯 제출을 포기했다.

중학생부 김한빈(15)군은 “나무를 주제로 글을 쓰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더니 “실은 배가 고파서 일찍 제출했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식권을 받아 세명대 구내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장석주 시인이 일요일에 집착하는 이유

오후 2시가 되자 식사를 마친 참가자들이 학술관 강당을 가득 메웠다. 장석주 시인과 황선미 작가를 초대한 북 콘서트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김기태 교수의 능숙한 진행으로 작가의 자기소개에 이어 질의응답 시간이 주어졌다.

▲ 김기태 교수(맨 왼쪽)가 초청 작가들에게 자기 소개 시간을 주고 있다. © 민수아

<마당을 나온 암탉>을 쓴 황선미 작가에게 진행자인 김 교수가 첫 질문을 던졌다. 김 교수는 ‘좋은 책은 세상을 담고 있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쓰는 것이 소망이다’라고 말한 황선미 작가의 과거 인터뷰 발언에 대해 설명을 부탁했다.

황 작가는 “책을 쓰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경험한 세상이 책에 담긴다고 표현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작가 자신은 특정한 대상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동화라는 장르가 자신에 적합했을 뿐 자기 책은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글이라 생각하면서 글을 쓴다고도 했다.

두 번째 질문은 장석주 시인을 향했다. 장 시인은 최근 <일요일과 나쁜 날씨>라는 시집으로 편운문학상을 받았다. 김기태 교수는 장석주 시인이 이전에 <일요일의 인문학>이란 산문집을 낸 것을 언급하며 일요일에 집착하는 이유를 물었다.

▲ 장석주 시인

“보통 사람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직장에 매인 시간을 보냅니다. 자신의 수고로운 시간을 보수와 맞바꾸는 거죠. 니체는 하루의 3분의 2 이상을 자기 시간으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라고 했습니다. 원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원하지 않는 장소에 가서, 원하지 않는 업무를 하면서 생활하는 것이죠. 하지만 일요일에는 24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습니다. 일요일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을 일요일을 통해 다시 돌아보고자 하는 거죠. 일요일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펼치는 게 <일요일의 인문학>이란 책이고 총 52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1년에 일요일은 52번 있습니다. 일요일마다 한 장씩 읽을 수 있도록 만든 책이죠.”

황선미 “어려운 가정환경이 작가가 된 계기였다”

작가가 된 계기는 두 사람이 비슷했다. 황선미 작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환경과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영향을 꼽았다. 막연한 불안함에 스스로 책을 많이 읽게 되었고 담임이 학교 도서실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도와줬다고 한다. 자신이 글을 쓰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한번도 부자였던 적이 없던 아버지’였다. 장석주 시인 역시 어려웠던 가정환경을 이야기했다. 그는 고등학교 중퇴 후 국립도서관과 시립도서관을 전전하며 고전을 읽었다고 한다.

“그때 읽은 고전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고전을 통해 얻어진 지식과 사유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문단에 나오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실패를 겪었습니다. 문학에서는 실패가 큰 도움이 됩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사무엘 베케트는 ‘실패하고, 실패하고, 실패하라’고 말했습니다. 실패를 한 사람이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실패에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문은 시사적인 내용으로 이어졌다. 김기태 교수는 얼마 전 황석영 작가가 대학교 문예창작과 무용론을 이야기한 것을 언급했다. 또한 안도현 시인이 본인의 시를 다룬 시험문제 중 ‘시인의 의도’를 묻는 문제를 틀린 일화를 들었다. 한국의 문학 교육에 대한 두 작가의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

장석주 시인은 “문학은 인류의 정신적 자산이며 이를 통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얻기 때문에 문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학교 교육이 지나치게 수능시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주장도 폈다. 그는 최승호, 신경림 시인이 각자 자기 시를 지문으로 한 학교 시험문제를 틀린 사례를 들어 문학 교육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학은 한 가지 대답만 주지 않습니다. 백 사람이 읽으면 백 가지 의미가 나올 수 있는 거죠. 근데 학교 교육에서는 한 가지 대답만 요구합니다. 문학은 인지의 범주를 확장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상상력을 통제하고 인지를 억제합니다. 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프랑스는 어릴 때부터 시를 외우게 한답니다. 외우는 건 굉장히 좋은 교육입니다. 하지만 대답을 외우게끔 하는 교육은 문학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문학이 가지고 있는 정신을 위반하는 것이죠.”

황선미 작가는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서 1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을 이야기했다.

▲ 황선미 작가

“저는 대학 강단에 서면서 ‘문학을 가르친다는 게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최인훈 소설가는 ‘문학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미 형태가 없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의 문학이 어떤 것으로 나타나는 데는 만남이 큰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전했죠. 교육된 방법론이 아니라, 대화와 만남을 통해 문학이 발현되는 것입니다. 주입식, 단답형, 오지선다형 교육은 문제가 있습니다. 정형화한 무언가는 있겠지만, 그것이 정답으로 인지된다면 사람들은 모두 같은 글을 쓰게 될 것입니다. 다양해져야 합니다. 우리나라 문학교육은 끊임없는 반성이 필요합니다.” 

‘글쓰기를 위한 고독’을 겪어보라

마지막으로 김기태 교수는 시인이나 작가가 될 수 있는 급행 코스가 있는지 물었다. 장석주 시인은 한국 문단에 등단하는 3가지 방법을 말했다. 첫째 공신력 있는 매체에 투고하는 것, 둘째 문학잡지 공모전에 당선되는 것, 셋째 출판사에 투고해 직접 책으로 출판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그는 무엇이 좋은지는 개인이 판단해야 하며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으로도 급행은 없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황선미 작가는 무엇보다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일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결국 작가가 될 수 있다며 청중에게 용기를 심어줬다. 시류에 편승하기보다는 오래 생각하고 오래 준비해서 본인의 것을 만들어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황 작가는 답변했다.

진행자의 질문이 끝난 뒤, 청중의 질문이 이어졌다. 글쓰기 아이디어를 얻는 방법을 묻는 여중생부터 도서관리 비법을 묻는 도서관 직원까지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고 두 작가는 성실히 대답했다. 특히 ‘글쓰기를 위한 고독’이 무슨 의미인지 물은 우신고 2학년 김동현 학생에게 황선미 작가는 ‘스스로 겪어보라’고 권유했다.

▲ 한 고교생이 초청 작가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 민수아

“겪어보면 알 거예요. 내가 원하는 생각이 있고 그것으로 문장을 만들어서 글을 얻어야 하는데 그 작업을 하다 보면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줄도 모릅니다. 본인은 치열한 과정을 겪고 있지만, 남들 눈에는 고독해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 그 글을 쓰는 사람은 치열한 글쓰기를 실행하고 있는 거죠.”

촌극을 넘어선 수상의 영광

예정에 없던 두 작가의 사인회도 진행돼 참석자들은 사인을 받으면서 백일장 결과를 기다렸다. 오후 5시쯤 시상식에 차질이 빚어졌다. 고등부 운문 부문에서 장원으로 선정된 작품이 표절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웅성거림과 함께 시상식이 잠시 미뤄졌지만, 심사위원 소개와 함께 선정기준이 발표됐다. 운문 부문에서는 알맞은 분량, 힘 있는 첫 줄, 주제와 맞는 전개를 기준으로 들었다. 수필 형식이 다수였던 산문 부문에서는 사색의 깊이가 느껴지고 창의적인 작품에 점수를 줬다고 말했다.

수상자가 호명되자 부러움 섞인 환호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단체상은 고등학생부 장원을 비롯해 다수의 수상자를 배출한 고양예고에 돌아갔다. 1백만 원의 상금이 걸린 대학∙일반부 장원은 산문에 노은희씨, 운문에 강한(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씨가 차지했다. 고등학생부 장원에는 산문에 석정여고 김그린양, 운문에 고양예고 유민군이 뽑혔다. 중학생부는 운문 장원에 의림여중 이윤주양이 선정됐으며 산문 부문은 장원이 없었다.

▲ 대학∙일반부 운문 부문에서 장원으로 뽑힌 학생이 상을 받고 있다. © 민수아

                                                       편집 : 황두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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