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세월호, 그날의 기록’ 공저자 박다영

<세월호, 그날의 기록>은 누가 맞고 틀리는지 판단하기보다는 날것 그대로를 보여준다. 속 시원한 답을 주기보다는 의문을 던진다.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하기보다는 2014년 4월 16일 '그날'에 대해 당신은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 <세월호, 그날의 기록> 공저자 박다영씨가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박희영

세월호 재판 기록 15만쪽과 3TB 분량의 동영상을 토대로 697쪽의 책을 쓴 사람들, 그중 한 사람인 박다영(28)씨를 지난 1일 재단법인 '진실의 힘' 사무실 앞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출신이기도 한 그는 후배들에게 '누구보다 세월호 사건을 꼼꼼히 안다'고 자부할 만한데도 단정적인 말을 삼갔다.

15만쪽과 3TB가 697쪽의 책이 되기까지

“한겨레21 정은주 기자의 제안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이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칠팝십년대 간첩으로 조작된 피해자들이 진실규명을 함께할 변호사 등과 만든 재단법인 '진실의 힘’이 ‘세월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찾기 위해 박수현 학생의 아버지, 박종대씨와 만나면서부터였다. 막대한 기록을 조직적으로 살펴보려는 정은주 기자가 재단을 찾았고 그렇게 2015년 5월부터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이 꾸려졌다. 목표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세월호 기록을 정리하자’는 거였다.

A4용지 500장이 든 상자 300개에 이르는 재판기록과 2시간짜리 영화 1천편 분량의 동영상을 분석하고 정리하는 데만 7개월이 걸렸다. 집필에 또 서너 달이 걸렸다. 공동 집필이라 토론이 필수였다. 지나치게 감정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제대로 된 판단인지, 저자끼리 온종일 예기한 날도 많았다. 마감 전 한달 동안은 거의 잠도 자지 못했다. 드디어 3월 10일 <세월호, 그날의 기록>이 나왔다. 출판 한 달 만에 8,000부 가량이 팔려 벌써 4쇄에 들어갔다.

697쪽. 만만치 않은 분량이다. 박다영씨는 “1부는 꼭 읽어달라”고 당부했다. 1부 ‘그날, 101분의 기억’은 세월호가 가라앉던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9분부터 10시 30분까지 기록이 담겨있다. 박씨는 “예를 들어 1부에서 청해진해운이 세월호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화물량 기록부터 줄이는 것을 봐야만 2부로 넘어가서 화물 과적이 어땠길래 줄인 건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독자는 ‘2부 왜 못 구했나’, ‘3부 왜 침몰했나’, ‘4부 대한민국에서 제일 위험한 배 어떻게 태어났나’, ‘5부 구할 수 있었다’를 읽으며 머릿속에 쌓였던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갈 수 있다.

▲ 물속 깊이 가라앉은 세월호를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조금씩 세상을 향해 끌어올린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세월호, 그날의 기록> 표지를 디자인했다. © 네이버 책

“희생자들과 같이 썼어요”

“세월호가 70도 기울었습니다. 보세요. 이 급박한 상황을 KBS, SBS, MBC에 영상을 보내서 이 배를 고발하겠습니다. 진짜로 이 배한테 손해배상 청구받을 거예요.”

1부에 실린, 희생자 김동협 학생이 동영상에 남긴 말이다. 150쪽에 이르는 1부의 각주만 572개다. 한쪽당 각주 네 개가 있을 정도로 1부는 철저히 진술에 의해 작성됐다. 부모님께 급하게 쓰려다 생긴 카카오톡 오타도, 학생을 구하며 “개새끼”라고 한 해경의 욕설도 그대로 담겨 있다. 진술을 그대로 옮겨온 부분은 따옴표로 처리했다.

김동협, 김시연, 박영란, 박예슬, 신승희, 유미지, 유예은, 정예진, 최덕화 등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 이름이 실명으로 나오는 것도 특징이다. 희생자들이 동영상과 카카오톡으로 남긴 진술은 1부를 구성하는 핵심조각들이다.

“희생 학생들을 실명으로 써도 되냐고 부모님들께 여쭈어 동의를 구했어요. 희생자들이 남긴 기록이 없었으면 책으로 엮을 수 없었을 거예요. 학생들도 세상에 뭔가를 알리고 싶어 영상을 남겼다고 생각해요. 저희는 그걸 토대로 책을 썼고요. 결국 희생자들과 같이 책을 쓴 셈이죠.”

상반되는 진술, 누구의 거짓말인가

희생자들의 진술만 책에 담겨 있는 건 아니다. 생존자, 선원, 해경, 청해진해운, 진도해상교통관제센터(VTS), 청와대 등 세월호 관련 모든 관계자들의 진술을 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당연히 진술이 서로 달랐다. 박다영씨는 항공구조사와 학생들의 진술이 상반되는 지점을 예로 들었다.

50도 이상 기울어진 세월호에 항공구조사들이 도착한다. ‘특공대’라 쓰여진 슈트를 입은 항공구조사를 발견한 학생들은 창문을 보며 “살려주세요, 여기 애들 깔렸어요”라 소리친다. 그러나 ‘특공대원’은 양팔로 ‘X자’를 그린다. 학생들은 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아직 진입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학생들은 빨리 여기서 탈출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해경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항공구조사의 진술은 다르다. 항공구조사는 그 학생들을 전혀 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객실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지만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완전히 대비되는 진술이다(148쪽).

서로 다른 기록을 엮었을 때 다른 의미가 발견된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박다영씨는 “검찰에서 조사한 선원 사건과 해경 사건은 별개의 사건기록으로 봤을 때 특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으나 교차검증 했을 때 새로운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자신의 재판에서는 자기에게 유리하게 진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123정 해경들은 ‘제복을 입지 않아서’,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서’, ‘경황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구조된 사람이 선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선원 중 절반 이상이 일체형 작업복이나 청해진 해운 마크가 선명한 근무복을 입고 있었다. 또 선원들은 해경이 123정에 옮겨 탄 뒤 신분을 확인했고 선원이라고 밝혔다고 말했다(294쪽).

팽목항 상황판에도 ‘선원 구조’의 증거가 있다. 4월 16일 고발뉴스가 보도한 팽목항 임시 상황실 상황판 장면에 “10시 10분, 47명 조도면 급수선 이용 팽목항에서 각 병원 후송, 일반 37명, 선원 10명”이라고 적혀있는 것이 보인다. 123정 대원들은 탈출, 도주자 중 일부가 선원이라는 사실을 11시 10분경에 알았다고 입을 맞췄다(298쪽). 123정 정장과 해경들, 그리고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저자들은 어떤 것이 진실인지 스스로 판단하기보다 독자들에게 판단을 맡기며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택했다. 상반되는 진술 모두를 실은 것이다. 설사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도 저자들은 모두 기록했다. “그런 식으로 다 쳐내고 나면 주장하는 글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기록팀은 무언가를 주장하기보다 무언가를 남기려는 쪽에 주력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을 땐 침묵하는 게 윤리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도 결론 내릴 수 없는 걸 결론 내리지 않는다는 면에서 윤리적이다. 세월호에는 블랙박스도 없고, 인양도 되지 않았으며, 인양을 하더라도 이미 2년이 넘게 지나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명확히 알기 힘들다. 사람의 진술이 절대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진술이 갈리면 정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럴 때, 저자들은 알 수 없는 건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국정원이 세월호를 소유했다’거나 ‘해경 지휘부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쉽사리 결론 내리지 않는다. 대신에 묻는다. 왜 국정원과 연락했던 청해진해운 기획관리팀장 김재범의 통화내역은 검찰이 구체적으로 조사하지 않았는지(535쪽), 왜 김경일 123정 정장만 현장지휘자란 지위 때문에 처벌받고 법적으로 현장지휘자인 김수현 서해해경청장과 김문홍 목포해경서장은 처벌받지 않았는지(284쪽) 말이다. 이렇게 크고 작은 질문들이 697쪽이 비좁을 만큼 가득 차있다.

“답을 정해놓고 가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의혹이 있는 상태에서 기록을 보며 답을 찾아가기보다 의혹은 일단 배제하고 기록을 보면서 질문하고 그에 맞는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기록은 말한다 “구할 수 있었다”

“제가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 이것을 다 챙깁니까?” 지난 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 때 있던 당시 현장지휘자 김문홍 목포해경서장의 항변이다.

하지만 기록들은 말한다, “구할 수 있었다”고. 책의 5부 제목이다. 5부는 선원도, 해경도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80여 쪽에 걸쳐 다룬다. 선원이 단 한 번만이라도 퇴선 명령을 했다면, 해경이 단 한 번만이라도 객실 문을 직접 열고 들어갔다면, 항공구조사가 깨진 유리창 사이로 로프만 설치했다면, 대다수 승객이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박형주 가천대 교수의 보고서에 따르면, 세월호가 기울기 시작한 8시 50분에 이준석 선장이 퇴선을 명령하면 5분 만에 전원 해상탈출이 가능했다. 4층까지 침수가 진행된 9시 50분에도 퇴선 명령만 있었다면 전원 탈출에 6분 17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당시 바다의 수온은 12.6도였다. 구명조끼를 입고 떠 있으면 최대 6시간까지 버틸 수 있는 온도다(626~627쪽). 그러나 세월호가 가라앉던 101분 동안 선원, 해경, 항공구조사 그 누구도 “퇴선”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저자들은 “구할 수 있었다”만 말하지 않는다. 왜 구하지 못했는지, 왜 침몰했는지, 세월호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등을 철저히 기록에 기반해 낱낱이 밝힌다. 그 결과, 저자들은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핵심 조각’ 10가지를 발굴한다. 해경이 최소 5개 이상의 부실한 주파수공용통신(TRS) 녹취록을 만들었다는 것이 대표적 핵심조각이다. 해경은 검찰, 감사원, 국회에 모두 다른 내용의 녹취록을 보낸다, 녹음파일은 하나인데도.

2014년 4월 16일 11시 9분, 해경은 123정에 있던 승객들을 전남 행정선 707호와 유람선 명인스타호로 이동시키지만 선원 5명은 123정에 남아 있었다. 그때 123정은 278함에 선내 잔류 인원을 보고한다. “현재 본국에 현재 27명 진도섬으로 옮기고 여객선에 선원, 선원 현재 6명하고 응급환자 1명, 7명이 대기 중, 이상.” 그러나 해경이 검찰과 국회에 제출한 녹취록에는 ‘선원’이란 단어가 누락돼있다. 감사원에 보내는 녹취록에는 아예 위 내용을 빼버렸다. 그러나 검찰, 감사원, 국회 모두 녹취록이 잘못됐다는 것을 몰랐다. 심지어 세월호 특조위도 1차 청문회 때 해경 본청 이충재 경비안전국장이 녹취록이 3개라 거짓말하는 것을 지적하지 못했다. 원본 음성을 듣고 녹취록과 비교만 해보면 누구든지 녹취록의 왜곡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저자들의 지적 전에는 아무도 왜곡을 알아채지 못했다.

 
▲ <세월호, 그날의 기록>이 발견한 핵심조각 10가지. © 박희영

생존자는 대부분 해경 도움 없이 탈출

박다영씨는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책임 부재’에 있다고 본다. 그 어떤 주체 하나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박다영씨는 진도해상교통관제센터 정영민 관제사의 말을 예로 들었다. “진도VTS에서 세월호 선장에게 승객들을 퇴선시키라고 지시했는데 세월호가 침몰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여 결국 진도VTS의 지시에 따라 퇴선한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고 가정할 때 그때 책임은 누가 지겠습니까?” ‘왜 퇴선하란 명령을 내리지 않았냐’는 감사원의 질문에 대한 정영민 관제사의 답변이다. 덧붙여 관제사는 세월호 참사가 난 건 안타깝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242쪽).

“자기가 현장에 있었으면 판단을 하고 내가 책임자라는 생각을 하고 뭔가 했어야 했는데 상부 보고만 하잖아요. 해경 파트에 보고란 단어가 굉장히 많이 나오거든요. 현장에 있는 사람도 보고하고, 목포상황실에도 보고하고, 보고만 하고 있고. 정작 거기서 뭘 해야 되는지는 생각 못 하고. 보고할 시간에 이렇게 구조하라고 말해야 하는데 아무도 그 말을 하지 않은 거죠.”

승객의 퇴선을 유도하는 또 다른 방법은 해경이 세월호 선내에 진입해 승객들에게 ‘퇴선하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123정 대원 중 직접 구조 활동을 한 인원은 구명보트에 탄 김용기, 박은성 등 2명에 불과했다. 이형래와 박상욱은 세월호에 올라갔지만 구조 업무와는 무관했다. 나머지 대원들은 123정 갑판에 서서 구명보트가 실어온 사람들을 끌어올리기만 했다. 9시 39분경 기울어진 세월호 3층 좌현 갑판에서 수면까지 높이는 약 2m에 불과했다. 123정 대원의 승선이 어렵지 않았다. 실제로 9시 43분경 이형래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세월호 3층으로 올라갔다(608쪽).

김경일 123정 정장은 해경 사건 2심 3회 공판에서 123정이 퇴선 방송과 선내 진입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보이는 사람을 먼저 구조하는 원칙에 따라 구하다 보니 거기까지 생각을 못 하게 됐다”고 답했다(609쪽). 화재현장으로 비유하면, 화재현장에서 탈출한 사람들을 돌보느라 정작 화재 현장에 갇힌 사람은 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박다영씨는 기록 확인 결과 “생존자 대부분 해경 도움 없이 탈출해서 해경 배에 탔다”고 말했다.

▲ <세월호, 그날의 기록> 공저자 박다영씨가 질문에 답하고 있다. © 박희영

‘기억’에서 ‘기록’으로 한 발짝 나아갔을 뿐

참사 후 2년 동안, ‘잊지 않겠습니다’는 말로 대한민국이 가득 찼다. “1년 전쯤 쓴 메모를 봤어요. ‘기억하자’, ‘잊지 말자’는 말이 공허하다고 썼더라고요. 이 상황에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나. 지금은 기억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글을 마무리 지었어요.”

세월호 참사 이후, 대부분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 것은 박씨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2014년 4월 16일의 기억을 각자 가슴에 묻은 채 가끔 눈물을 훔쳤을 뿐이다. 기억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감정이 첨가되면 왜곡될 수도 있다. 기억을 양지로 끄집어내서 감정이란 습기를 제거해 건조하게 만든 게 기록이다. 이때 비로소 개별적 기억이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공공재가 된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은 우리 모두의 기억을 기록으로 만든 책이다.

3월 10일, 책이 나왔다. 1년에 걸친 프로젝트가 끝났지만 박다영씨는 후련함도 시원함도 느끼지 못했다. “이제 시작”이라고 떠올렸을 뿐이다. 이제서야 세월호 관련 1차 결과물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지난 2년 동안에도 결과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수많은 해결책이 나왔고 실제 개선된 부분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 누구도 ‘101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던 상태에서 도출된 해결책이 근본적인 답이 될 수 있었을까?

“문제를 알아야지 해결책을 내놓잖아요. 2년 간 그냥 해결책만 내놓은 느낌? 책으로 문제를 제대로 지적했다고 생각해요. 답까지 있는 건 아니겠지만. 질문을 제대로 했다는 게 핵심 같아요.”

박다영씨는 책을 천천히, 깊게 읽어달라고 당부했다. 참사의 무거움을 오롯이 담아낸 기록인 만큼 읽기 쉽지 않겠지만, 그 무거움을 ‘약간의 책임감’을 가지고 읽어달라는 것이다. 박씨 스스로도 한 번에 보기 힘든 책임을 인정했다. 다만 한 번에 보기 힘들다면 서가에 꽃아 놓고 해경 기사가 나오면 책에 나온 해경 내용과 비교하고, 세월호 특조위가 열렸을 때 증인들이 하는 진술을 책과 비교해보길 원했다. 세월호와 관련된 어떤 일을 하든 글을 읽든, 책이란 정리된 기록을 통해 ‘참고서’처럼 활용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책이 나온 지금은 달라요. 기억을 넘어서 기록을 통해 한발 더 나아갔다고 생각해요, 기억에서 기록으로. ‘그날’을 기록한 책이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이제 다른 의미로, 다른 방법으로 확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편집 : 박경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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