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의 유혹하는 에디터2] ③ 후회가 아닌 자부심을 위하여

▲ 고경태

할까 말까.

그 갈림길에 설 때가 있다.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해? 말아? 그럴 때마다 나는 집 거실 서가에 꽂힌 책 한 권을 꺼내 든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전 명지대 교수의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쌤앤파커스, 2009)이다. 내가 볼펜으로 표시해놓은 대목은 다음과 같다.

“살아있는 이상, 우리는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어차피 후회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가능한 한 짧게 하는 게 좋다. 그래야 심리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짧게 후회하려면 ‘행동’해야 한다. 확 저질러버리는 편이, 고민하며 주저하다가 포기하는 것보다 심리적으로 훨씬 건강하다. 후회가 오래가지 않기 때문이다. 시작도 하지 않고 포기한 일은 반드시 오래, 아주 집요하게 나를 괴롭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어른들은 결혼을 망설이는 이들에게 한결같이 이렇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하고 후회하는 편이,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고.”

LGBT 기획 둘러싼 논란

하고 나서 후회하면, 그 후회는 짧고 굵다. 안 하고 나서 후회하면, 그 후회는 가늘고 길며 정신건강에 치명적이다. 나 역시 이론적으로는 같은 생각이지만 현실에서는 쉽지 않다. 매체를 만들면서 새로운 기획을 할 때 종종 그런 경험을 한다. 스스로 쉽게 결단하지 못하거나 그 결단이 논란의 도마에 오를 때 말이다.

그까짓 글 하나가 뭐라고, 새 칼럼 연재를 맡을지 여부를 놓고 밤을 하얗게 새우며 쫄았던 적이 있다. 2001년 1월과 2004년 3월, 두 번에 걸쳐 그랬다. ‘내가 그걸 감당해낼 실력이 있을까? 독자들이 배를 잡고 비웃지는 않을까?’ 2008년 봄에는 이직 여부를 놓고, 같은 해 가을에는 매체를 옮기는 문제를 놓고 머리털이 빠질 뻔했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개입된 터여서 더욱 신경이 쓰였다. ‘과연 자격이 있을까. 내 선택이 옳을까.’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려고 마음먹으려니, 수십 가지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상자 속의 로또 추첨 공처럼 머리를 콕콕 찌르며 튀어 오르기를 반복했다. 안 하려니, 쪼르륵 소리를 내며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욕조 속의 물처럼 내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넷 중 한 번은 끝내 포기하고 말았지만(다행히 후회를 안겨다 주는 포기는 아니었다), 나머지 세 번은 뻔뻔한 결론을 내고 결행했다. ‘해보지 뭐, 죽기야 하겠어?’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내 앞에 갑자기 던져진 어떤 제안을 둘러싸고 “해보라”는 악마와 “절대 하지 말라”는 천사가 마음속에서 격렬한 씨름을 했다. 악마가 이겼다. 제안을 수락했다. 막판에 외부 변수로 인해, 할 수 없게 되었다. 무서워서 스스로 피했다면 두고두고 후회했을지 모른다.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였다. 후회 대신, 후련했다.

모험처럼 보이는 길 앞에서 뒤로 도는 사람들이 있다. 과감히 쭉 직진하는 사람들도 있다. 직진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멋진 접속사다. 무모한 일에 덤벼들 땐 겁이 난다. 슬슬 뒷걸음질 치는 게 최상책일 때도 있다. 안전을 위한다면 깨끗이 마음을 접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위험요소가 눈에 보이면서도 충분히 뛰어들 만한 가치에 더 큰 방점이 찍힐 때가 있다. 대다수에 의해 무모하다는 평가를 받지만(물론 이는 주관적이다),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확고히 서는 경우 말이다. 이럴 때 위로와 힘을 주는 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2012년 초, 토요판 첫 호를 내기 직전까지도 그랬다. 기획물 중심의 신문을 만들면 대통령선거의 해에 스트레이트 기능이 약화한다는 등 회사 내에서 반대 목소리의 볼륨이 최대치까지 올라갔다. 어느 순간 이러한 대대적 반대의 포화가 영광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평가의 역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사건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면 고집쟁이로 비치기 십상이다. 권한의 한계 등 여러 조건에 의해 자신의 의견을 후퇴시킬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이럴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멘탈(정신) 관리용이다. 비교적 최근의 일을 소개한다. 2015년 가을께였다. 토요판을 낸 지 4년 차 되는 해였다. 팀 내부에서 몇 가지 새 기획연재를 시작하기로 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LGBT 지면이었다.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성전환자(transgender)들의 삶과 이야기를 다채롭게 펼쳐보기로 한 것이다. 연재 주기는 격주. 코너 이름도 ‘LGBT’로 정했다. 아직 일간신문 매체에 이런 식의 고정 지면은 없다. 새로운 기획안을 국장에게 보고했다. 보통 형식적인 보고만 하고 넘어가곤 했는데, 이번엔 강력한 제동이 걸렸다. 재고하라는 거였다. 혹시 반대의견이 나올지 모른다는 예상을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이 키우는 부모들이 교육상 안 좋다며 신문을 끊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핵심이었다. 나름의 근거를 지닌 주장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15’에 따르면 한국인의 56.9%가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갖고 있으니까. 어느 나라에나 동성애를 변태 또는 변종 취급하며 이에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반면 미국의 경우엔 2015년 7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 커플 결혼 합법화를 결정했다.

▲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성전환자(transgender)들의 삶과 이야기를 다채롭게 펼쳐보기로 했다. ⓒ Flickr

LGBT 기획안은 결국 좌절됐다. 내가 반대논리를 수긍하지 않자 편집국장은 편집회의에서 각 부장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묻기도 했다. 너무 앞서나갔다는 반대가 나왔고, 조심스럽고 고급스럽게 쓰면 이 분야에서 새 지평을 열수도 있다는 지지도 나왔다. 거의 반반이었다. 국장이 단안을 내렸다. 기획 유보!

전례가 없다면 얼마나 고마운가

동성애는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단면이며, 존재하는 현실이다. 여기까지는 LGBT 기획을 반대하는 이들과 나의 생각이 일치했다. 나는 아이의 교육을 걱정하는 부모라면, 역설적으로 남녀로만 구분되지 않는 성의 다양한 풍경을 보여주는 LGBT 관련 기사 읽기를 아이들에게 권장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대편에서는 독자들의 평균 눈높이와 거부감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보았다. 나는 독자들 눈높이에 안주하는 게 독자들을 존중하는 건 아니라고 보았다. 일부 독자들이 떼거리로 악플을 달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인간의 몸을 이해하는 고정 지면으로 보여줄 만하다고 생각했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동성애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시선을 고려해야 한다고 조심스런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기획이 유보된 뒤 가장 열성적으로 반대 의견을 내며 편집국장에 동조했던(?) 또 다른 선배와 대화를 나눴다. 평소 합리적이어서 내가 좋아하고 따르는 선배 중 한 명이었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타협이 없었다. 그 선배는 “시기상조”라고 했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그때그때 동성애자 인권 이슈 등이 발생하면 거기에 대응해 기사를 쓰면 되는 거 아니겠어?” 나는 “고정 지면을 만들면 우리가 LGBT 이슈를 선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슈란 따라가는 게 아니라 따라오게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내가 우리 사회와 독자들의 평균 수준을 너무 앞질러 나갔는지도 모른다. 선배는 더 큰 책임을 지닌 편집국 간부로서 독자 이탈을 염려하며 신중한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선배가 말한 ‘시기상조’라는 단어를 읊조려보았다. 시·기·상·조. 상조회사 이름 같은 그 사자성어를 곱씹으며, 지금은 고인이 된 한겨레 선배의 책 한 권을 떠올렸다. 고 성유보 선생의 유고집 <미완의 꿈>(한겨레출판, 2015) 이다. 1975년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으로 자유언론운동에 매진하다 1988년 창간한 <한겨레>에 와 편집국장을 두 번 지냈던 분이다. 1991년 퇴사해 평생 언론개혁과 평화통일운동에 헌신했고, 2014년 10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선배께 죄송하지만, 내가 주목한 글은 본문 내용이 아니었다. 책 뒷부분에 그보다 선배인 언론인 임재경 선생(전 한겨레 부사장)이 쓴 보론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신문제작을 포함한 세상사에 서로의 생각이 엇갈렸던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기록해두지 않아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공공성이 짙은 한 가지 일은 꼭 소개하고 싶다. 성유보가 논설위원, 내가 편집인·논설주간일 때의 일이다. 노태우 정부가 조각을 앞둔 어느 날 제1 사설의 주제를 ‘국방부 장관 군인 출신이 아닌 문민(文民)’으로 하자고 내가 발의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성유보가 시기상조를 내세워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놓고 설왕설래하는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지만 내 주장을 관철하지 않은 것이 지금껏 후회스럽다. 이 글을 쓰면서 <한겨레>의 논설위원과 편집인을 지낸 곽병찬에게 확인한 결과 성유보가 신문사를 떠난 뒤에도 ‘국방부 장관 문민 기용’을 표제로 내건 사설이나 기명 칼럼은 나간 적이 없다고 했다.”

성유보 임재경 선생 두 분 모두 존경하는 한겨레 대선배다. 임재경 선생은 후배인 고 성유보 선생의 유고집에 발문 성격의 글을 쓰면서도 찬양과 치하로만 일관하지 않았다. 글쓴이와 관련해 후회되는 대목까지 적었다. 1990년대 초반, 당시 금기시하던 사회적 사안에 관해 사설로 밝힐지 여부를 놓고 의견이 갈렸으나 괜한 오해를 부를까 하여 끝내 자신의 고집을 관철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임재경 선생이 언급한 부분은, 내가 가끔 고민하는 지점과 맞닿았기에 인상적이었다. 바로 “시기상조”라는 우려였다. 이는 “전례가 없다”는 두려움과 일맥상통한다.

국방부 장관의 민간인 기용은 유럽 선진국에선 일반적이다. 이른바 군에 대한 문민통제다. 군 출신이 국방부 장관에 기용되는 것을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여길 정도다. 한때 육사 출신 장군들이 돌아가며 대통령을 지낸 분단국가 한국에선 턱도 없는 일이었다. 1960년대 이후 한 번도 없었다.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한국 언론에서 국방부 장관을 민간인으로 기용하라는 주장을 편 적은 없다. 내가 볼 땐 사설뿐 아니라 기획연재로 펼칠 만한 아이템이다. LGBT 기획도 영국 일간신문 <가디언> 등 유럽 매체들의 인터넷판에 등장하지만, 보수적인 문화가 지배적인 한국의 일간신문에서 아직 시도한 적이 없다. 둘 다 한국에선 전례가 없다. 정말 시기상조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이런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온다. 전례가 없다는 두려움 속에 기회의 서광이 비친다. 다 두려워할 때, 내가 가장 먼저 하면 된다. 전례가 없어서 얼마나 고마운가. 전례가 많다면 굳이 기를 쓰고 할 이유가 없다.

물론 전례가 없다고 능사는 아니다. 앞에서 사례로 든 LGBT 기획안이 통과됐다면 반드시 성공했을까? 모르는 일이다. 문제는 내실이다. 내실이 지속가능성을 보장한다. 파격적인 발상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기획의도가 번지르르하다고 열렬한 환호성이 메아리로 보장된다는 법은 없다. 알맹이가 받쳐주지 않으면 두 배로 망한다.

▲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모두 지닌 인터섹슈얼을 다룬 <한겨레> 2013년 12월 17일 치 '몸'지면. 남녀로만 이분되지 않는 성의 다양한 풍경을 미디어에 노출하는 걸 과연 금기시할 필요가 있을까. ⓒ 한겨레

따라갈 것이냐, 따라오게 할 것이냐

기자든, 편집자든 글을 쓰거나 기획을 하면서 ‘관행’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할 때가 온다. 그동안의 습성과 낯선 시도가 충돌할 때다. 매체 일이 아니라 구멍가게 하나를 운영해도 마찬가지다. 해오던 방식대로 할 것이냐, 대담하게 다른 방식을 꾀해 볼 것이냐.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현실은 다이내믹하고 다층적이고 복잡하다. 어떤 의도가 어떤 결론으로 이어질지 모르므로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나는 가급적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기대 중심을 잡아왔다. 기존의 낡은 관행을 깨고 또 다른 관행을 창조해 다른 이들이 따라오도록 하는 일에 보람과 재미와 자부심을 느껴왔다. 후회는 짧고 굵을수록 좋다고 했다. 자부심은 그 자체로 길고 굵다.

나는 다시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라는 책을 펴본다. 글쓴이는 후회론을 설파하면서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마지막 연을 인용해 놓았다. 좀 오글거리지만, 삶에 뼈있는 지침을 주는 시다.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한 번쯤이라도 가지 않은 길을 가보자. 떨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


고경태. 한겨레 편집국 신문부문장. <유혹하는 에디터>에서 <1968년 2월 12일>까지 4권의 책을 썼다. 2009년에 낸 <유혹하는 에디터>가 편집자를 다뤘다면, 2016년의 이 연재물은 편집장 이야기다. <한겨레21> 편집장, <씨네21> 편집장, esc 팀장, 오피니언넷 부문 기자, 문화스포츠 에디터, 토요판 에디터 시절의 에피소드로 버무릴 예정이다. 격주 연재.  

편집 :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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