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불패] 필리핀 며느리의 인간승리, 국적취득

수업 끝나길 고대하는 강의실 밖 두세 살배기들

세명대학교 문화관에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오후, 세 살배기 박지승과 두 살배기 박윤지가 ‘등교’한다. 물론 학생은 아니지만, 엄마 조이린 바요가(27)가 이곳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기 때문이다. 필리핀에서 시집온 엄마가 2시간 수업을 받는 동안 로비와 빈 강의실, 그리고 계단이 그들의 놀이터다. 할머니 신순남(74)씨는 굽은 허리로 손주들을 쫓아다니느라 분주하다.

엄마한테서 오래 떨어질 수 없는 나이여서 아이들에 할머니까지 함께 ‘등교’할 수밖에 없다. 눈이 유난히 큰 지승과 윤지는 이 건물을 함께 쓰는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생들한테도 재롱둥이들이다. 과자를 사주거나 화이트보드에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문화관 앞 광장에 주차해 있는 수십 대 통학버스 기사들 역시 그들을 지켜보는 게 즐겁다. 그러나 엄마가 강의실에 들어간 지 한참 되면 둘은 대개 문 앞에 와서 기다린다.

조이린이 참여하고 있는 것은 사회통합이수과정으로 지난해 7월에 시작돼 오는 11일 모든 과정이 끝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결석은 물론이고 지각을 한 적도 없다. 한국어를 잘해야겠다는 욕망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숨 막힐 듯 답답한 불통의 벽을 넘어

"한국에 처음 와서 마을사람들과 만났을 때 ‘안녕하세요’밖에 할 수 없었어요. 숨 막힐 정도로 답답했어요. 한국어는 필리핀어보다 (같은 단어의) 의미가 다른 게 많아 어려워요. 하지만 한국어 배우는 기회가 생겨서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 사회통합이수과정 수업을 듣고 있는 조이린. ⓒ 전은선

조이린이 사는 곳은 강원도 영월군 쌍용리. 충북 제천 세명대까지 꽤 거리가 멀어 택시를 타고 다니면 왕복 6만원 정도 나오지만 딱한 사정을 안 개인택시 기사 한 분이 2만원에 이들 가족을 등•하교시키고 있다. 조이린은 3년 전 코리안 드림을 안고 쌍용시멘트공장에서 일하는 박영희(41)씨와 결혼했다.

"시어머니나 남편과 진한 이야기해보는 게 꿈이었어요. 수업 받는 것은 시어머니가 애 봐주는 것에 비하면 힘들지 않아요. 집에 가서 배운 것을 복습하는데 그때도 시어머니와 남편이 도와줘요. 나를 진짜 딸처럼 대해줘 고마워요."

시어머니 신순남씨는 교회 아는 사람을 통해 조이린을 며느리로 맞아들였다고 전했다.

“이렇게 공부해야 한국 사람이 될 수 있다는데 어떡해요? 내가 힘든 건 참을 수 있어요. 한국에는 부모도 없으니 내가 자식으로 생각해야지요. 늦장가 들인 아들과 한국말로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사는 꼴을 보고 싶어요.”

사회통합과정 성과 크지만 거리ㆍ육아ㆍ생계가 문제

사회통합이수과정은 법무부가 한국의 언어ㆍ문화ㆍ제도 등에 이해가 부족한 이민자가 한국 사회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이 과정을 이수하면 2년쯤 걸리는 국적취득 기간이 6개월 정도로 단축된다. 한국어는 400시간, 한국사회 이해 과정은 50시간이며, 교육비는 정부에서 전액 지원한다. 

이 과정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생활고 등으로 사회통합 프로그램을 이수할 처지가 못 되는 이주민이 많아 일부 외국인들만을 위한 정책이란 비판도 없지 않다. 결혼이주여성은 농촌지역에 널리 흩어져 사는데 프로그램 주관 교육기관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충북에는 세명대 한국학센터, 충주다문화가족지원센터, 보은농협 등 6개가 있을 뿐이다.

지난해 조이린 일가는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세명대까지 오는데 3시간이나 걸렸다. 오전 10시에 집을 나서서 수업을 듣고 귀가하면 해가 저물었다. 신순남 할머니는 “애들을 돌봐야 하는 가족들에게도 큰 짐이 된다”고 말했다.

▲ 조이린이 수업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 가족이 총출동했다. ⓒ 전은선

"작년에 같이 수업을 듣던 사람이 올해는 안 보여요. 시장에서 우연히 만나 물어봤더니 일하고 애기 보느라 나갈 수가 없대요. 나도 텃밭 농사라도 지어야 하고 남의 일 해주고 돈을 벌어야 하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다."

다문화교육 강사인 이은영씨는 "이 프로그램은 생계 걱정까지 해야 하는 이민자들이 특별히 시간을 할애해서 수업을 받아야 하고, 교육기관이 적어 문제가 있다”며 “다들 힘들어하면서도 열심히 하는데 정부에서 좀 더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이린은 오는 11일 멀고 힘든 과정을 모두 마치고, 곧 국적취득을 위한 필기시험과 면접을 보게 된다. 법무부는 올해부터 국적필기시험을 폐지하고 사회통합이수제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한국에서 아이 낳고 잘 살면서도 필리핀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조이린. 한 가정의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동시에 한국인이 되는 조이린과 그의 가족에게 이번 5월은 진정 축복받은 ‘가정의 달’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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