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선 음량 규제, 국내 업체들은 “수치화 불가능”

호프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 오준석(20·가명)씨는 얼마 전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러 주인에게 크게 혼이 났다. 주문을 잘못 알아들어 손님에게 엉뚱한 음식을 가져다 준 것이다. 오씨는 평소에도 주문을 한 번에 잘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는 경우가 많다. 호프집 주인은 이런 그를 못마땅해 하고, 오씨는 해고될까봐 조마조마 하다.

육군 모 부대에서 행정병으로 군무 중인 박성훈(22·가명)일병은 근무 중 전화가 울릴 때마다 긴장한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잘 안 들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주변이 시끄럽기라도 하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상대가 대부분 고참들인 탓에 매번 되묻기도 어렵고, 지시를 잘못 알아듣고 일처리를 했다가는 엄청난 질책이 돌아오기 때문에 진땀이 날 지경이다.

 

▲ 귓속형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다. ⓒ 서동일

 

두 사람의 공통점은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엠피쓰리(MP3) 등 휴대용 음향기기로 음악을 크게 들었다는 것이다. 혼자 공부하면서 습관적으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은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바깥에서는 음량을 더욱 높였다. 두 사람은 언제부턴지 친구의 말소리가 잘 안 들려 대화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삼성∙코원∙아이리버는 '나 몰라라'

스마트폰이나 MP3, 디엠비(DMB·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 등 휴대용 음향기기가 보편화하면서 이어폰으로 음악과 오락을 즐기는 청소년 중 소음성 난청환자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의 2009년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10대 난청환자 비율은 2.6%로 100명 중 2~3명이 듣는 기능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대의 경우 이 비율이 1.6%, 30대는 2.4%인데 보통 40대 이후에 청각기능이 본격적으로 나빠지는 것을 감안할 때 10대 난청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은 휴대용 음향기기의 급속한 확산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러나 휴대용 음향기기를 제조∙판매하는 국내 기업들은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관련 기업들이 난청 예방을 위한 음량기준을 만들고 소비자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지만, 삼성전자 코원시스템 아이리버 등 국내의 대표적인 음향기기 제조판매사들은 소극적인 안내에 그치고 있다.  

 

▲ 아이리버 MP3에 안내된 경고문. ⓒ 서동일

 

2일 단비뉴스가 확인한 삼성, 코원, 아이리버의 MP3 제품 설명서에는 '장시간 사용을 피하세요' '최대음량의 2/3 이하로 들으세요' 라는 모호한 안내 외에 소음성 난청의 위험에 대한 경고나 구체적인 음량 수치가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해당 기업들은 ‘소비자가 알아서 할 문제’라는 입장이다. 코원시스템 관계자는 “MP3 음량은 사용자가 판단해야 할 문제”라며 ”신체는 개인마다 다르기에 적정 기준은 없으며 체감으로 판단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만약 귀가 예민해 청각 기능의 손상이 걱정된다면 본인이 알아서 낮게 들으면 된다"고 덧붙였다.

각 제품별 음량 수치를 데시벨(dB)로 표시해 준다면 소비자들이 청력 손상 위험 기준으로 알려진 85~90dB보다 낮게 사용하는 습관을 들일 수 있겠지만 관련 기업들은 ‘음량을 데시벨로 나타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삼성전자 옙(Yepp)부문의 한 관계자는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음악 파일이 동일한 기준으로 만들어졌다면 모르지만 확장자, 제작자별로 다 다르기 때문에 데시벨로 표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코원관계자도 “이어폰과 음원의 볼륨 값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에 데시벨로 수치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음향 전문가 “모든 음량은 수치화 가능”

하지만 전문가의 얘기는 다르다. 최승균 소니코리아 음향감독은 "측정 장비에 일정 신호를 입력하면 해당 음향기기의 dB 수치 산출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또, MP3 파일이나 이어폰에 따라 dB 수치가 차이가 날 수는 있지만 음향기기 dB 수치와는 분리된 문제이며 이 때문에 측정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 국내 판매되고 있는 MP3.  ⓒ 서동일

해외에선 이미 음량 규제가 도입되고 있다. 대다수 유럽 국가들은 휴대용 음향기기의 최대 음량을 제조 단계부터 100dB로 제한하는 '최대 볼륨 크기 규제'를 2002년부터 시행 중이다. 프랑스는 현재 최대 음량 기준을 100dB로 제한하고 있으나 곧 85dB로 낮출 계획이다. 미국 기업 애플도 '소리 크기가 115dB까지 올라가는 현 상태에서는 사용자의 난청을 유발할 수 있다'는 소비자들의 불만을 수용해 MP3제품인 아이팟의 최대 볼륨을 100dB로 낮췄다.

 

국내 제품 중에서 삼성 옙(YEPP)의 경우 최대음량을 제한하는 '와이즈 볼륨(Wise Volume)' 기능이 있어 높은 볼륨에 장시간 노출될 경우 화면에 경고표시가 뜨고 자동으로 음량을 조절할 수 있게 돼 있다. 그러나 이는 사용자가 직접 기능 설정을 했을 때만 작동하게 돼 있어 대다수의 옙 사용자들은 이런 기능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대형마트 등의 MP3 판매원들도 이 같은 기능을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최대 음량 50% 이하로 듣고 귓속형 이어폰 피해야

환경부는 이런 실태를 감안, 관련 기업에 최대 음량 제한을 권고할 수 있도록 하는 '소음·진동 관리법 개정안'을 지난달 14일 입법예고했다. 환경부 생활환경과 민재홍 사무관은 “5월부터 국내 MP3 사용 실태를 조사하고 dB 수치를 측정할 수 있는 표준시험방법도 마련할 예정”이라며 “2012년까지 권고 기준을 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난청 예방을 위한 정부와 기업의 노력은 아직 시작 단계이거나 미진하기 때문에 소비자 스스로 난청 예방을 위해 각별한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제천 필이비인후과 팽재필 원장은 “소음성 난청과 함께 발생하는 이명(귀울림)은 완화시킬 수 있지만 이미 저하된 청각을 되돌릴 수는 없다”며 예방이 최선임을 강조했다. 팽 원장은 “70~80dB까지는 안전하기 때문에 MP3 음량은 가능한 한 최대 볼륨의 50% 정도에 맞춰 놓고 듣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또 최대 음량의 50~60%정도 볼륨으로 듣는 것도 30분 이상이면 반드시 휴식을 취해 줘야 귀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또 음악 등을 들을 때는 귓속형 이어폰보다 귀 전체를 감싸는 헤드폰이나 스피커로 듣는 것이 안전하다고 조언했다. 귓속형 이어폰은 고막 가까이에서 소리를 내기 때문에 청각 손상의 위험이 특히 크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헤드폰을 쓸 때는 주위 소음을 완전히 차단하는 제품을 써야 주변이 시끄러울 때 볼륨을 높이는 행동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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