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도 자살할 한국 교육현실 폭넓은 조명을
개성 말살하고 부자만 살아남는 교육으론 미래 없어

유대인의 교육열은 세계적으로도 유별나 ‘주이시 맘’(Jewish Mom), 곧 ‘유대인 엄마’라는 말은 특별한 의미로 통한다. 근래에는 미국 등지에서 ‘코리안 맘’(한국인 엄마)도 위세를 떨친다고 한다. 그런데 의미가 다르다. ‘주이시 맘’이 주로 가정교육에 열성적인 엄마를 뜻한다면, ‘코리안 맘’은 가정교육에는 크게 신경을 안 쓰면서 학교에 가서 ‘치맛바람’을 일으키거나 자녀를 여러 학원에 보내는 등의 열성으로 유명하다.

근본적인 차이는 교육관에서 비롯된다. 유대 격언에 ‘형제의 머리를 비교하면 양쪽 다 죽이지만 개성을 비교하면 다 살린다’는 말이 있는데, 유대인이 어디에 가정교육의 중점을 두는지 드러난다. 유대인이 자식을 개성적인 인재로 키우려 한다면, 한국인은 ‘전교 석차 1등’이 꿈이다. 자녀를 학교에 보내더라도 유대인은 ‘남과 다르게 되기’를 바라고, 한국인은 ‘남을 앞지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유대인인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학교에서 ‘이 학생의 지적 능력으로는 어떤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쪽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남과 같아지려면 결코 남보다 나아질 수 없다”며 “너는 남과 다르기에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이런 교육관의 차이는 어떤 결과로 나타날까? 유대계 인구는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하지만, 유대계의 노벨상 개인 수상자는 2010년까지 181명으로 22%를 차지한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100배 정도 많은 수상자를 배출한 것이다. 한국인 중에도 우수한 과학자가 무수히 많은 터에 노벨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지만 한국 과학교육의 성과와 대비된다.

카이스트 학생의 잇따른 자살을 계기로 한국 언론은 ‘카이스트 개혁’과 관련한 기사를 엄청나게 쏟아냈으나, 문제 해결에 역행하거나 변죽만 울리다 말았다는 느낌이다. 자살은 계속되리라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언론이 주로 문제 삼은 것은 ‘징벌적 등록금제’와 ‘100% 영어강의’였고, 학교당국이 두 문제를 개선하겠다고 하자 곧 우선적 의제에서 밀려버렸다. 서남표 총장의 퇴임도 없었던 일이 됐고, 24일 한국방송(KBS) ‘일요진단’에 출연한 그는 “소통부족은 고치되 개혁은 계속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가 소통부족에 있었다는 ‘진단’은 ‘오진’에 가깝다. 문제의 근원이 모든 학사행정의 초점을 무한경쟁에 맞춘 ‘서남표식 개혁’ 자체에 있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도 카이스트 학생상담센터 전화가 불통이었다며 소통부족을 추궁했으나 그런 대책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경쟁에 중독돼 무엇이 문제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인 것 같다.

‘개혁은 계속돼야 한다’는 일부 보수언론에 맞서 <한겨레>는 ‘자살 원인이 지나친 경쟁에 있음’을 해설기사와 칼럼 등으로 여러 차례 짚었다. 13일 오피니언면에는 무려 8건의 관련 칼럼이 실렸다. 그러나 시민편집인실에 보내온 정채호 독자와 김성옥 독자의 의견도 그렇듯이, 독자들에게는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 출고 날짜를 조정했더라면 좋았겠다. 한 40대 여성 독자는 “무한경쟁 논리를 넘어 사람의 개성을 고려하는 교육평가 방식은 없겠는지 <한겨레>가 고민해 지면에 반영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경쟁은 효율성 제고에 필요한 요소일 뿐 아니라 승자를 뽑는 공정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쟁이라는 수단이 목표가 되고 승자 독식의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는 사회라면 경쟁은 곧 경쟁지상주의로 치닫게 된다. ‘서남표식 개혁’은 자본주의 경쟁체제를 대학에 전면 도입하면서 원래 대학이 추구해왔던 가치, 곧 자율적 연구와 교육, 비판정신 등을 몰아내게 된다.

자본주의 경쟁체제는 가치마저 수치화하는 버릇이 있다. 대학에 순위를 매기려니 영어강의 비율 같은 것이 국제화지수로 채점된다. 강의 내용이 전달되고 안 되고는 점수와 무관하다. 우리말 강의는 아무리 전달이 잘되고 학생들을 감동시켜도 이 부문 점수가 빵점인 셈이다.

국내에서 대학에 순위를 매긴 것은 <중앙일보>가 처음이었고, <조선일보>가 뒤를 이었다. 세계적으로 대학평가를 하고 있는 신문으로는 영국 <더 타임스>가 대표적이다. 226년 전통의 이 신문은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이 인수한 뒤 보수성향이 너무 강해지면서 권위지 반열에서 밀려났다. 보수신문들이 대학평가에 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 광고 유치 외에도 대학을 자본주의 경쟁체제로 몰아가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시장주의자들이 만든 잣대에 따라 대학이 평가되니 시장과 기업의 대학 지배는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

자율적 경쟁은 대개 효율을 가져오지만, 타율적 경쟁은 경쟁 참여자들을 획일화로 몰고 갈 수 있다. 점수화한 승자선발기준을 통과하려면 개성을 죽이고 부문별로 고루 득점해야 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일제고사에서부터 박사논문 제출 자격시험에 이르기까지 수백번 치르는 고난의 시험 과정은 범용 인재에게 유리하다.

전과목에서 80점 정도 맞은 학생보다, 한 과목 100점에 나머지 과목 낙제점을 받은 학생이 천재일 가능성이 높지만, 한국의 교육과정은 그런 천재를 낙오자로 만든다. 영국의 에이레벨(A-Level)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캐나다의 대학입학시험들은 대개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 셋 정도만 잘하면 된다.

정상적인 교육시스템에서라면 소중한 인재로 커나갈 수 있었던 카이스트의 네 학생은 우리 교육현실을 고발하는 것으로 세상 태어난 보람을 다하고 스러졌다. 그러나 <한겨레>를 포함한 한국 언론은 대개 카이스트 문제에 국한하면서 의제 확장의 기회로 삼지 못했다. 대학사회 전체의 문제로, 아니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전체 교육과정의 문제로 부각시키지 못한 것이다.

참여연대 조사 결과를 보면 대학생은 등록금·공부·취업부담 등으로 60%가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고, 경찰청 통계를 보면 실제로 2008년 332명, 2009년 249명이 자살했다. 이것이 대학 진학률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한국 고등교육의 현실이다. 서남표 총장은 툭하면 엠아이티(MIT)를 거론하는데 그곳에서도 입학 첫 학기에는 통과(Pass) 여부만 가려 학생들의 적응을 도와준다. 그들에게는 적어도 영어 부담은 없는데, 우리 대학생에게는 그것이 멍에처럼 덧씌워진다. 대학을 향한 무한경쟁에 내맡겨진 중·고교생들은 2008년 교과부가 7만명을 조사한 결과 ‘최근 1년 사이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학생이 19%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경쟁, 경쟁, 경쟁만이 살길이요 개혁’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 ‘그들은 도대체 어떤 부류인가’ - 욕이 나온다. 경쟁 자체도 한국 사회에서는 전혀 공정하지 않다. 학업에서도 부모의 재력이 곧 경쟁력이다. ‘적자생존’도 아닌 ‘부자생존’의 법칙이 통하는 천민자본주의 정글이다. 대학생의 88.6%가 등록금 마련에 고통을 느끼는 나라에서 장학생 선발도 학점이 기준이다. 많은 선진국에서는 대학에 지원되는 정부보조금이 상당할 뿐 아니라 등록금도 성적이 아니라 부모의 재정상태에 따라 결정하는 대학이 많다.

사회가 조화롭게 굴러가려면 경쟁뿐 아니라 협력이나 연대 같은 것도 필요하다. ‘남을 앞질러야 살아남는다’는 무한경쟁 풍토는 그런 호혜의 정신이 깃들 여지를 없앤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는 끈질긴 집념과 팀원의 협력에서 나올 터인데 ‘몇 년 안에 졸업하고’, ‘몇 년 안에 성과가 나와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은 열정과 팀웍을 빼앗는다. 공부만 해서는 길러지지 않는 게 창의력이라면 ‘여유’와 ‘놀이’도 학업과 연구의 과정으로 봐야 한다.

포항공대에는 1986년 설립 당시 우리나라에서 노벨상 과학부문 수상자가 나오면 흉상을 올리기로 하고 비워놓은 ‘미래의 한국과학자’ 좌대가 있다. 그때 신문을 검색해보면 15년쯤 뒤에는 주인이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사반세기가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니 무슨 영문일까? 차라리 그 좌대를 허물어버리는 건 어떨까, 그것이 최후의 승자만을 부각시키는 경쟁 일변도 교육의 상징이라면.


* 이 기사는 <한겨레>와 동시에 실리지만, 일부 내용이 보완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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