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있는 서재] 은희경 ‘새의 선물’

▲ 은희경 <새의 선물>. ⓒ 문학동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은희경 소설 <새의 선물> 프롤로그 제목이다. 열두 살인 주인공이 어른들을 관찰하는 게 주 내용이다. 나는 소설의 그와 다르게 열두 살 이후에도 한참 더 성장해야 했지만, 이때 세상살이의 핵심 한두 가지를 깨치긴 했다. 무조건 권력자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이롭다는 것을.

초등학교 5학년 때 반에 힘세고 덩치 큰 여자애가 있었다. 남자애들과 어울려 축구를 해도 전혀 밀리지 않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반 아이들을 휘어잡기에 충분했다. 우리끼리 놀 때면 모두 그 애 눈치를 살폈고, 그의 뜻대로 결정됐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도를 지나친 것이었다. 많은 아이가 자기 비위를 맞춰주기만 하니, 조금만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반 친구들에게 욕지거리를 하는 게 다반사였다.

몰락은 갑작스러웠다. 그 아이와 함께 놀던 여자애 무리가 참다못해 따돌리기 시작했다. 말을 걸어도 대놓고 무시했고, 덩치를 가지고 킬킬거리기도 했다. 반 아이들도 점점 배척했다. 언제 그에게 달라붙은 적이 있었느냐는 듯, 어제의 권력자를 멸시하고 욕함으로써 무리에게 충성을 보였다. 재치 있게 그 여자애를 놀리고, 새 집단의 비위를 잘 맞추면 함께할 기회가 주어졌다. 옛 추종자들이 등을 돌리자 그 아이는 등허리마저 구부정해졌다. 권력 승계는 2학기가 시작되자 완성됐다. '반정'을 주도한 이들은 잘 나가는 아이의 표식인 '깻잎머리(깻잎 모양의 앞머리)'와 귀걸이를 하고 나타났다.

이런 행태는 성인 사회에서 더 많이 관찰된다. 특히 사회지도층의 충성 경쟁은 사회화가 덜 된 어린이보다 더 노골적이다. 국회를 예로 들면, 지금 여당의원들의 충성 바치기는 상상 이상이다. 개헌과 공천으로 대통령과 몇 차례 대립한 김무성 당 대표는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할 때면 공항 배웅에 나선다. 원유철 원내대표도 취임 100일 되던 날 "나를 신박(새로운 친박)으로 불러 달라"며 적극적으로 줄서기에 나섰다. 당대표부터 기초의원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박근혜 대통령의 '진실한 사람'을 자처한다. 누가 더 충성하는지를 가리기 위해 '진박(진짜 친박)', '가박(가짜 친박)', '칭박(자칭 친박)' 등의 딱지를 붙이는 촌극도 일어났다.

▲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유세 중인 박근혜 후보. ⓒ Flickr

국정을 이끌어야 할 대통령이 가두서명을 하러 나가도 집권세력 안에서는 "오죽하면 그랬겠냐"며 맹종하는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박 대통령이 말하는 경제활성화법이 실제로 경제를 살릴 수 있는지 따져보긴커녕 총리와 장·차관에 이어 각자가 입법기관인 의원들도 줄줄이 서명에 동참했다. 법을 만들어야 할 당사자가 법을 만들어달라며 서명운동을 하는 코미디가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

열두 살 무렵, 내가 하나 더 깨달은 교훈은 영원한 권력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가도 시간이 지나면 뒷방 늙은이 취급을 당한다. 한때 한나라당에서 다수를 차지했던 친이계가 지금 소수로 남은 것처럼, 사람들은 새로운 권력을 찾아 이합집산한다. 특히 권력을 믿고 전횡을 저지른 사람일수록 권력이동에 민감하게 적응한다. ‘국민을 위한 정치’는 ‘자신을 위한 정치’일 뿐이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가 죽자 부하들이 돌아서는 모습에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실은 아버지도 그도 자업자득 아닌가?


글쓰기가 언론인의 영역이라면 글짓기는 소설가의 영토입니다. 있는 사실을 쓰는 것이 글쓰기라면 없는 것을 지어내는 게 글짓기입니다. 그러나 언론인도 소설가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갖춰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단비뉴스>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단비서재’ 개관을 기념해 이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소설을 읽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첨삭을 거쳐 이곳에 실립니다. (이봉수)

편집 : 이명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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