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있는 서재]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 김연수의 단편소설 <세계의 끝 여자친구>. ⓒ 문학동네

지난봄, 제천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느라 두 달 만에 만난 아빠에게는 앞니 하나가 빠져있었다. 다시 해 넣기 위해 뺀 것이긴 해도 이빨 하나에 딴 사람이 된 듯했다. 그날은 마침 아빠의 생일이라 가족들이 함께 간 노래방에서 아빠는 윤수일의 ‘아파트’와 편승엽의 ‘찬찬찬’을 잇달아 불렀다. 빈틈없고 근엄했던 아빠가 신나게 노래하고 영화 <영구와 땡칠이>의 영구처럼 앞니가 빠진 채 밝게 웃으니 모두가 따라 웃을 수밖에.

그날 살갑게 다가오는 아빠를 더욱 실감한 것은 내가 아는 아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감정표현에 서툰 사람이었다. 스무여섯 해를 살며 잘한 일도 없지 않았을 텐데 칭찬을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아빠와 내가 한 순간 장벽을 허물고 서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일까? 내가 두 달간 부모님을 그리워하듯 부모님도 처음으로 눈앞에서 사라진 딸이 눈에 밟혔던 걸까? 

대부분 사람은 살면서 갑작스레 변화를 겪는다. 평론가 신형철이 말했듯, 세계는 붕괴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 세계의 붕괴는 이전에 존재했던 세계를 무너뜨리고 ‘나’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인도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는 그 일이 있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기’에서 ‘저기’로, ‘저 너머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다. 사랑이 특히 그렇다.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저 너머의 세계’로 가는 과정을 9개 단편으로 엮었다. 각 단편에서 인물들은 관계를 맺으며 저마다 이야기를 만들지만, 누군가를 만나 새로운 세계에 진입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 세계에는 사랑이 있다. 김연수의 서사는 사람과 사랑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보편성을 지닌다. 내가 그의 소설을 즐겨 읽는 이유다.

▲ 한 세계의 붕괴는 이전에 존재했던 세계를 무너뜨리고 ‘나’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인도한다. ‘여기’에서 ‘저기’로, ‘저 너머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다. 사랑이 특히 그렇다. ⓒ flickr

다시 아빠를 떠올린다. 나보다 훨씬 긴 인생을 살아온 아빠는 몇 번이나 ‘저 너머의 세계’로 건너가 보았을까? 스스로 어딘가 변했음을 느끼며 다시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고 체념한 적도 있었으리라(<기억할만한 지나침>). 누군가 손을 잡고 메타세콰이아가 서있는 곳까지 걸어간 뒤 “여기가 세계의 끝”이라고 말해본 적이 있을지도 몰라(<세계의 끝 여자친구>). 이전까지 몰랐던 둘이 만나 함께 공유할 기억들은 또 얼마나 많이 만들어왔을까(<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그동안 무관심했던 아빠의 세계가 더욱 궁금해진다. 


글쓰기가 언론인의 영역이라면 글짓기는 소설가의 영토입니다. 있는 사실을 쓰는 것이 글쓰기라면 없는 것을 지어내는 게 글짓기입니다. 그러나 언론인도 소설가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갖춰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단비뉴스>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단비서재’ 개관을 기념해 이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소설을 읽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첨삭을 거쳐 이곳에 실립니다. (이봉수)

편집 : 유수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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