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비평] 영웅서사구조로 본 SBS 스포츠 EPL 중계

캔맥주 서너 개에 감자 스낵 한 봉지, 푹신한 소파 그리고 박지성. 10년 전, 신 주말 풍속도는 그렇게 시작됐다. 축구팬들은 토요일 밤마다 TV 앞에 앉아 박지성을 기다렸다. 그의 선발 출장 소식에 설레어 했고, 몸동작 하나하나에 숨죽이며 브라운관 속으로 빠져들었다. 몇몇은 ‘츄리닝’에 슬리퍼를 끌고 동네 호프집에 모이기도 했다. 박지성이 공만 잡으면 “오, 박지성! 박지성! 박지서엉!”을 외쳐 댔다. 그 시절, 축구팬들에게 박지성은 영웅이었다.

신문선•차범근에서 박지성•손흥민으로

명문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입은 박지성의 등장으로 스포츠 중계방송은 질적 변화를 맞이했다. 신문선과 차범근으로 대표되던 국가대표팀 위주의 중계방송 편성이 유럽 프로축구 중계 중심으로 바뀌었고, 해설도 이에 맞춰 진화했다. 단순히 경기 상황을 전달하는 데 그쳤던 해설이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를 부각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캐스터와 해설자는 스토리 텔러로서 라이벌 더비 매치, 감독 간 갈등, 공격수와 수비수의 대결 같은 경쟁구도를 중심으로 중계를 이끌어 간다. 특정 선수 중심의 영웅 서사 중계도 그중 하나다.

▲ 아스널 벵거 감독(왼쪽)과 첼시 무리뉴 감독(오른쪽)이 언쟁을 벌이는 장면. ⓒ <SBS 스포츠> 중계방송 화면 갈무리

영국 프리미어리그(EPL)에서는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을 시작으로 손흥민, 기성용 등 수많은 한국 선수들이 꾸준한 활약을 이어왔다. 축구 본고장 영국에서도 잘나가는 한국 선수들은 우리나라 방송이 활용하기 좋은 소재였다. 특히 무명선수에서 영국 최고의 팀에 진출한 박지성은 이상적인 이야깃거리였다. 축구선수로서 그의 인생과 결승골로 팀을 위기에서 구하는 장면은 자연스럽게 ‘영웅 서사’ 구조를 띠게 되었다.

미국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보글러는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에서 영웅의 여정을 12단계로 제시한다. ‘일상세계-모험에의 소명-소명의 거부-정신적 스승과의 만남-첫 관문의 통과-시험, 협력자, 적대자-동굴 가장 깊은 곳으로의 접근-시련-보상-귀환의 길-부활-영약을 가지고 귀환’의 구조가 그것이다. 이 구조는 박지성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12단계 영웅 서사구조. ⓒ www.cugrow.com

뛰어난 체격도, 유려한 기술을 가진 것도 아닌 박지성은 2002월드컵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으로 이적하며 유럽 진출에도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무릎부상으로 부진을 거듭하다 홈팬들의 야유와 팀 동료의 노골적인 비난까지 받는다. 급기야 전 소속팀 일본 교토 퍼플상가로 복귀하는 것을 고민하기도 한다. 거스 히딩크 감독의 믿음과 배려로 서서히 기량을 회복한 박지성은 에이스로서 맹활약한 후 영국 맨유로 이적한다. 현지 언론은 ‘동양에서 온 유니폼 팔이’라며 혹평을 쏟아냈지만, 퍼거슨 감독과 동료들의 믿음으로 무난히 적응에 성공한다.

박지성은 거친 EPL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만의 능력에 집중한다. 체격을 키우고, 왕성한 활동량과 공간창출능력을 극대화했다. 고질적인 부상이 번번이 발목을 잡았지만, 묵묵히 훈련한 끝에 강팀들과의 경기에서 결승 골을 터뜨리며 확실한 주전으로 자리매김한다. 최고 활약을 이어가던 박지성은 퀸즈 파크 레인저스(QPR)를 거쳐 친정팀 PSV로 복귀한다. 노련미까지 갖춘 영웅이 화려하게 부활하는 시기다. 전설이 된 박지성은 명예롭게 은퇴한다.

‘기-승-전-박지성’ 영웅 서사

2010년 3월 21일에 펼쳐진 프리미어리그 31라운드 맨유와 리버풀의 대결은 박지성을 확실한 ‘영웅’의 반열에 올려놓은 경기였다. 리버풀에 짜릿한 역전승을 거둔 맨유는 라이벌인 아스널, 첼시와의 우승경쟁에서 우위를 점한다. 그 중심에 박지성이 있었다.

“전설의 매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치열한 라이벌 매치를 해왔는데요. 순위 다툼마저도 아주 치열하기 때문에 정말 대단한 혈투가 예상됩니다.”

일반적으로 스포츠 중계는 생방송 특성상 두 팀 간 대결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 경기를 중계한 <SBS 스포츠>는 오랜 라이벌인 두 팀의 대결구도보다 박지성 중심의 영웅 서사구조를 ‘창출’했다. 해설자는 박지성에게 도전과제를 제시한다. 경기 내내 시청자들을 영웅의 목표달성에 집중하게 만드는 장치다.

“박지성 선수는 프리미어리그 진출 이후에 첼시와 아스널 상대로는 골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유독 골이 없는 상대가 리버풀이죠. 빅4(맨유, 첼시, 아스널, 리버풀) 중 마지막 남은 리버풀을 상대로 골을 넣을지 주목됩니다.”

영웅의 도전은 쉽지 않은 법이다. 팽팽한 라이벌 매치에서 박지성의 역할은 크게 돋보이지 않는다. 해설자는 전반 내내 부진했던 박지성의 플레이를 비판한다. 시련의 45분이었다.

“박지성 선수의 역할이 모호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2선 공격수도, 중앙 미드필더도 아닌 거죠. 계속 움직여주고는 있는데 전체적으로 세밀한 연결보다는 둔탁하게 가는 장면들이 많네요.”

후반 15분까지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스코어 1대 1. 팬들의 함성이 고조될 무렵, 오른쪽 측면에서 패스를 받은 박지성이 다이빙 헤딩 역전골을 터뜨린다. 해설진의 비판은 순식간에 찬양으로 바뀌었다. 시련을 이겨내고 목표를 달성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보상이자 화려한 부활이었다.

“골이에요. 박지성, 박지성이 만들어주네요. 리버풀을 상대로 첫 골을 만듭니다. 역전 골을 만들어내는 박지성! 박지성이 해결을 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을 상대로 해서 그것도 역전 골을 만들어내는 박지성 선수네요.”

▲ 다이빙헤딩으로 역전결승 골을 터뜨리는 박지성 . ⓒ 유튜브

중계방송은 라이벌 대결보다 ‘영웅’ 박지성에 초점을 맞춰 흘러간다. 그가 특별한 활약을 보인 즉시 영웅 중심 구조로 급선회한 것이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필부인 남자 시청자들은 ‘영웅’의 탄생에 자신을 투사시키며 열광한다.

“맨유는 마치 경기 전에 퍼거슨 감독이 써놨던 시나리오대로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에요. 만약에 써놨다면 박지성 선수가 제대로 오늘 주인공 역할을 한 거고요.”

벽돌공 성공신화, 찰리 오스틴

한국 선수가 아니어도 영웅 서사 중심으로 진행되는 중계 사례는 많다. QPR의 찰리 오스틴이 대표적이다.

▲ 퀸즈 파크 레인저스 공격수 찰리 오스틴. ⓒ Flickr

오스틴은 어렸을 때 축구를 시작했다. 레딩 유소년 팀에 입단해 축구를 배웠지만, 14살 때 무릎부상으로 팀을 떠난다. 그러나 축구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고, 부상에서 회복하며 13부 리그 지역팀인 킨트베리 레인저스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다. 공격수로서 진가를 발휘한 그는 순차적으로 8부, 7부, 3부, 2부 리그에 진출하고, 2013년에 마침내 1부 리그 QPR에 입성한다. 지난해 그는 EPL에서 4번째로 많은 득점을 기록하며 팀 내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벽돌공으로 일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다. 가난했던 오스틴은 청소년 시절 건축회사에서 벽돌을 나르며 축구를 배웠다. 그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Guardian)>과의 인터뷰에서 7부 리그에서 뛸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17살의 어느 날, 나와 동료들은 오후 두 시에 이미 땀에 절어있었고, 진흙투성이가 된 내 몸은 마치 유리처럼 약해져서 등을 구부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런 오스틴의 생애는 경기 해설에 그대로 녹아든다. 2014년 11월 9일 QPR과 맨유의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한 오스틴을 <SBS 스포츠> 중계 해설자 김동완은 ‘인간극장’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 오스틴의 골에 격하게 기뻐하는 동료들. ⓒ <SBS 스포츠> 중계방송 화면 갈무리

동영상링크: http://sports.news.naver.com/videoCenter/index.nhn?uCategory=wfootball&category=epl&id=104000&redirect=true

필부들이 영웅 서사에 환호하는 이유

박지성 경기에서 보듯 해설자는 그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그 역할을 이뤄내기를 원한다. 필부 시청자들도 같은 기대를 하게 된다. 세계 최고 선수들이 모인 EPL 무대에서 박지성의 임무는 곧 자신의 임무로 투사된다. 박지성이 그 임무를 완수했을 때 필부 시청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를 ‘영웅’으로 인정한다. 영웅이 되고 싶은, 갈망하는 필부들은 이 쾌거를 자신의 쾌거로 받아들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영웅 서사 해설은 시청자의 공감을 끌어내면서, 경기에 집중하게 만든다.

▲ 영웅 박지성의 화려한 비상. ⓒ Flickr

오스틴의 골 장면을 '인생극장'으로 표현한 중계도 마찬가지다. 시청자는 벽돌공 출신인 오스틴을 보며 희망을 떠올린다. 열악한 삶을 딛고 일어난 인물을 보며 꿈을 품는다. ‘인생역전’ 스토리를 그대로 옮겨 시청자에게 대리만족을 통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중계방송은 축구경기와 시청자를 연결하는 매개체다. 2시간 안에 승부가 결정되는 경기에서 해설은 시청자를 붙잡아두기 위한 가장 직접적인 도구다. 현재 EPL에는 손흥민을 비롯한 한국 선수들이 맹활약하고 있다. 손흥민도 박지성처럼 영웅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 필부들도 ‘영웅’이 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까. 앞으로 펼쳐질 경기에서도 중계진의 해설이 ‘영웅’이 탄생하는 기쁨을 우리에게 듬뿍 안겨줄 것인가.


편집 : 박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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