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콩고 출신 난민신청자 프레디 피오피오

“엠부테!”

연보라색 셔츠와 회색 정장에 단정하게 넥타이를 맨 30대 후반의 남자가 링갈라어로 ‘안녕하세요’라는 뜻의 인사를 건넸다. ‘엠부테’라 쓰긴 했지만 첫음절은 ‘음’과 ‘엠’ 사이 어딘가의 소리라 우리말로 정확하게 적을 길이 없다. 링갈라어를 모국어로 쓰는 이 남자의 이름은 프레디 피오피오.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지금은 고향에서 1만2142킬로미터(km)나 떨어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산다.

중앙아프리카에 있는 콩고민주공화국은 곧잘 ‘아프리카의 심장’이라 불린다. 넓은 국토, 비옥한 토양, 풍부한 지하자원 등 잘 살 수 있는 자연 조건을 갖췄다. 그러나 오랜 독재와 전쟁, 만연한 부정부패 탓에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이 380달러(약 44만원)일 정도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피오피오 씨가 가난을 피해 한국에 온 것은 아니다.

부패와 가난에 찌든 나라 일으키려 정치 참여

▲ 콩고민주공화국 출신 난민 프레디 피오피오 씨는 난민의 사회통합에 좀 더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한다. ⓒ 이명주

그는 정치적 난민이다. 콩고는 1960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후 독재와 군사정변, 전쟁을 겪으며 그 어떤 나라보다 참혹한 현대사를 쓰고 있다. 피오피오씨는 로랑 카빌라의 쿠데타로 모부투 정권이 무너진 지 일 년 뒤인 1998년 킨샤사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30년 부패정치로 악명 높았던 모부투 정권이 무너진 것은 좋았으나, 로랑 카빌라 대통령 역시 군사독재로 국민 반발을 불러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강제폐교 등이 반복됐다. 1년의 학과과정을 마치는 데 2년이나 걸리는 우여곡절 끝에 그는 휴학을 하고 음악활동 등으로 떠돌다 2004년 법학으로 전공을 바꿔 복학했다.
 
“법을 공부하며 콩고 사회에 퍼진 문제의 실상과 마주하게 됐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 콩고를 변화시키기 원했습니다.”

지난 18일 서울 동작구 장승배기로의 국제난민지원단체 ‘피난처’에서 <단비뉴스>와 만난 피오피오씨는 아직 한국어가 능숙하지 못해 영어로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부정부패로 망가진 사회, 전쟁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조국에 자유와 정의를 실현시키겠다는 꿈을 꾸었다”고 회고했다. ‘사람들이 먹을 것을 손에 쥐고 퇴근하는 세상’을 바라며 정치운동에 가담했다고 한다.

2006년 대선은 콩고에서 반세기 만에 주어진 민주적 선거 기회였다. 2001년 로랑 카빌라 대통령이 암살된 뒤 아들인 조세프 카빌라(44)가 대통령직을 물려받아 과도정부 형태로 콩고를 통치하던 상황이었다. 피오피오씨는 현직 대통령의 경쟁자인 장-피에르 벰바(53)가 이끄는 콩고해방운동(MLC) 편에서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어릴 때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자랐어요. (대학) 휴학 기간엔 본격적으로 음악활동도 했죠. 음악은 선거운동에도 효과가 컸어요. 콩고인들이 워낙 노래를 좋아하다보니 음악이 있는 곳으로 자연스레 모여드는 경우가 많았죠.”

그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대중에게 친숙한 멜로디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불렀다.

[링크 : 프레디 피오피오 씨가 선거운동 당시 부르던 노래를 잠시 흥얼거린다. 노래 가사를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바로 지금이야. 세상 모든 일엔 때가 있는 법이지. 이제 콩고인들을 위한 시간이야. 우리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낯선 이들을 봤지. 지금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힘을 가질 때야.”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얼떨결에 나선 망명길

그러나 선거에서 그가 지지하던 후보는 패배했다. 재집권한 조세프 카빌라 정권이 반대파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고, 그의 집에도 두 차례나 경찰이 들이닥쳤다. 그는 친구들의 집으로 옮겨 다니며 몸을 숨겨야 했다. 어느 날 같은 당의 고위층 인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평소 잘 알지 못했던 사람이지만 만나러 갔다.

“이제 우리는 킨샤사 공항으로 갑니다.”

공항에 도착하자 또 다른 남자가 나와 여권과 항공권을 건넸다. 그렇게 비행기를 탄 것이 콩고와의 마지막이었다. 부모와 형제자매들에게 작별인사도 못한 채 에티오피아와 태국을 거쳐 한국에 도착했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8월이었다.

옷 몇 벌과 대학 강의노트 몇 권이 든 가방 하나를 달랑 들고 공항에 내렸을 때, 그는 일단 ‘이제 감옥에 가거나 생명의 위협을 받을 일은 없겠다’고 안도했다. 하지만 이후의 하루하루는 순탄치 않았다. 망명을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후 2009년까지 이의신청 과정을 거쳤지만 거부됐다. 난민심사 과정에서 여행날짜와 관련된 통역 상의 작은 실수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한다.

불안정한 체류자 신분으로 하루하루를 살던 그는 인권변호사와 난민지원단체의 도움을 받아 지난 9월부터 재신청과정을 밟고 있다. 하지만 결과를 낙관할 수 없어 불안한 마음이라고 한다. 피난처 등 난민을 지원하고 있는 시민단체들은 우리나라의 난민인정절차가 지나치게 까다롭고 전문성도 부족해 많은 신청자들이 하염없이 기다리는 형편이라고 말한다. 법무부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유엔난민협약에 가입한 후 20여년간 난민지위 인정을 신청한 외국인이 총 1만2208명이지만, 난민으로 받아들여진 사람은 지난 7월 기준 522명으로 4.2%에 불과하다. 세계 평균은 38%다.

피오피오 씨가 떠나온 콩고에서는 내년에 대통령 선거가 시행되는데, 대통령을 연임한 조세프 카빌라의 재출마가 헌법상 금지돼 있음에도 대선 준비는 시작도 되지 않고 있고, 헌법을 지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탄압받고 고문을 당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피오피오씨는 그래서 콩고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외롭고 막막한 이방인의 삶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져 합법적 신분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시간제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기도 한다. 어떤 가게에서는 일흔 넘은 나이에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는 어르신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데, 자신의 처지도 문제지만 노인이 그렇게 일해야 하는 한국 현실도 안타깝더라고 말했다. 참고로 콩고의 평균 수명은 50세 정도다.

그는 종종 대학과 시민단체 등에서 난민인권에 대한 강연을 한다. 인터뷰 당일도 저녁에 서울대에서 강연이 있다고 했다. 그는 청중들에게 ‘난민도 인권을 가진 사람들’임을 강조하고,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난민들의 인권에 좀 더 관심을 가져달라는 메시지를 전한다고 한다. 피오피오씨는 ‘흑인은 멍청하다’는 편견을 가진 사람 등 인종차별적인 한국인이 많아 속상하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도와주는 변호사, 시민단체 간사 등 좋은 친구가 여럿 생겼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역경 극복 의지 큰 난민, 정착지 사회 기여도 높아

국내외에서 난민 지원 활동을 하고 있는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난민들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정착지 사회의 발전에 기여도가 높은 편이라고 평한다. 피난처에서 난민 취업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지은 간사는 “난민들은 대체로 활발한 성향이 있고 역경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강한데다 생명의 위협을 벗어나게 해 준 나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며 우리 사회가 이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피난처는 임파워먼트 훈련(Empowerment Training)을 통해 난민들이 한국 문화에 대해 배우고 취업에 필요한 훈련을 받는 등 한국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데, 피오피오씨도 지난 여름과 가을에 이 과정을 수료했다.

▲ 12월 8일 희망토크콘서트는 난민과 지역사회의 소통을 꿈꾸는 자리다. ⓒ 피난처 공식 홈페이지

피난처는 난민들과 우리 국민이 서로 소통하고 연결되는 작은 고리를 만든다는 취지에서 다음달 8일 저녁 7시 <희망토크콘서트>를 열 계획이다. 서울 중구 남대문로의 서울시 엔피오(NPO)지원센터에서 콩고, 우간다, 코트디부아르 출신 난민 4명이 그들의 경험과 꿈을 이야기한다. 이 자리에서 피오피오씨는 그동안의 삶을 얘기하고 노래도 부를 계획이다.

한편 피오피오 씨는 최근 파리테러를 계기로 난민에 대한 세계의 시선이 차가워지고 있는 것이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난민들의 삶은 이미 너무 힘겨운데, 이런 상황 때문에 난민의 법적인정이 더 어렵게 될까봐 걱정스러워요. 난민들은 테러로부터 보호가 필요해서 오는 사람들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해요.”


편집 : 문중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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