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가을의 끝자락에 배운 것

▲ 서창완 기자

서가 잔디밭에 누워있다. ‘가을 느끼기 야외수업’ 중인 그는 취업 준비생이다. 엄밀히 말해 대학원생이지만 언제든 대학원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기자만 되면 석사가 아니어도 좋다. 내년 가을에는 반드시 이곳을 떠날 것이다. 이번 가을 기자가 되어 고별사로 이별했던 선배 봉처럼.

누운 그의 머리 위로 햇볕이 쏟아진다. 얼굴을 때리는 강렬한 햇살에 눈을 감는다. 언론인이 되는 길은 저 해만큼 멀리 있다. 소설과 시를 쓰며 대학생활을 보냈던 그에게 ‘사실’ 중심의 글쓰기는 힘에 부치다.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하는 강의 ‘글’, 최의 ‘스펙’, 기의 ‘박학다식’, 구의 ‘논리’, 문의 ‘정보공개청구 능력’이 그를 짓누른다. 신들의 전쟁에 낀 무능한 인간이 된 기분이다.

울적해진 그는 몸에 묻은 잔디를 털고 일어난다. 외투를 입는다. 등 뒤에서 한껏 햇볕을 받아들이고 있던 나무에게 다가간다. 나뭇잎에 가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키가 크다. 만져본다. 표면은 거칠고 나무껍질은 금방이라도 벗겨질 듯 덜렁거린다. 가뭄에 광합성을 제대로 못한 걸까? 머리를 쥐어짜도 나오지 않는 자신의 글 같다. 거친 개요, 메마른 전개, 사방으로 뻗어나간 나열. 글 실력은 늘고 있는가? 오히려 작문을 위해 고민하는 시간이 줄고 있다. 혹평과 첨삭도 사유가 없으니 제 것이 되지 못한다.

언덕 위 벤치에 앉아 수첩과 볼펜을 꺼내 든다. 멀리 요구르트병만큼 작아 보이는 유가 잔디밭에서 무릎 모으고 앉아 무언가 적고 있다. 강은 풀밭에 누워 카메라로 하늘을 찍고 있다.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볼펜을 끄적여 본다. “가을은 이미 내 옆에 와 있었으나 가을을 느끼지... 귓가에 온 바람의 이야기는 따스하다...” 진부한 표현에 머리를 움켜쥔다.

▲ 언론인의 길은 익어 떨어지는 낙엽을 닮았다. ⓒ flickr

어깨 위로 단풍이 떨어진다. 홍색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잎이다. 멀리서는 밝게만 빛나 보이던 잎은 7개 잎맥이 가늘게 잎 전체로 뻗어있고, 곳곳에 흰색 점들이 박혀 있다. 잎 끝은 거뭇한데다 벌레가 파먹은 자국도 있다.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상처들이구나. 단풍이 짊어졌던 계절의 무게가 느껴진다. 열흘 전 이곳을 떠난 봉도 기자가 되기까지 숱한 고통과 좌절을 겪었겠지. 깊은 지식과 사유로 감동적인 글을 쓰고 거침없는 논리를 갖춘 학생들도 셀 수 없는 밤을 새웠겠지.

단풍은 진다. 지는 날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든 잎은 떨어진다. 잎들은 낙엽이 되어 바람을 따라 날리거나 빗자루에 쓸리기도 하고, 밟히거나 차이기도 한다. 그렇게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나면 썩어 서서히 땅에 스며든다. 고된 수습을 거쳐 그가 꿈꾸는 언론인의 길을 걷는 선배들처럼, 스며든 낙엽은 봄에 새잎의 자양분이 된다.

언론인이 되는 길을 생각한다. 언론인의 길은 해에게로 가는 길이 아니다. 비와 햇빛을 부지런히 먹고, 벌레와 태풍을 견딘 후 익어 떨어지는 낙엽의 길이다. 나의 고뇌와 인내도 모여 언젠가 단풍이 되어 떨어지겠지. 추운 겨울 동안 썩어 새 영혼의 거름이 되겠지. 그때까지 조급해하지 말자. 충분히 익기까지 아직 시간이 필요하니까.

“형 밥 먹으러 가요.” 문이 그를 보고 외친다. 신이 난 동기 누나가 팔을 벌리고 잔디밭을 뛰어온다. 야외수업을 마친 동료들이 모여든다. 그는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기지개를 편다. 일어나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바라본다. “밥 먹으러 갑시다!” 가을 햇살이 따스하다.


편집 : 유수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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