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3월의 눈> 백성희 장민호에 관객 기립박수

연극 속의 아침이 오자 무대가 얼굴을 드러냈다. 한옥이었다. 대청을 사이에 두고 좌우 하나씩 마주보는 방이 있다. 다색(茶色)의 나무는 하얀 벽을 감싸며 옛 집의 소박한 틀을 돋보이게 했다. 무대에는 한 동안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찬찬히 집을 살펴보라고 시간을 주는 것처럼. 정적이 지난 뒤 방에서 나온 수수한 차림새의 노부인. 그녀가 대청을 가로질러 뜨개질통 앞에 앉자, 마당 쪽에서 어르신이 천천히 마루 위로 올라왔다. 느릿느릿 이야기를 시작하며, 노부부는 아침 해를 보듯 먼 시선으로 관객석을 훑었다. 올해 86세의 배우 백성희와 87세의 배우 장민호가 공연한 연극 <3월의 눈>은 이렇게 시작됐다. 

한국 현대사 대변하는 인물과 한옥세트

▲ 연극 <3월의 눈>의 한 장면. ⓒ 국립극단 제공

연극은 낡은 한옥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노부부의 하루를 담고 있다. 노인이 자주 가던 이발소는 사라지고, 관광객들은 옛집을 구경하러 마을을 돌아다닌다. 노부부에게 남은 일이라곤 구멍 난 창호지를 새로 바르는 일이나 뜨개질뿐, 땅주인이 인부를 데리고 들어와 마루를 하나씩 뜯어가도 막을 수가 없다. 손자의 빚을 갚기 위해 내 놓은 한옥에서 이들이 간직할 수 있는 건 집만큼 오래된 추억들뿐이다.

연극 속의 '장오'(장민호 분)와 '이순'(백성희 분)은 우리네 조부모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오래전 그들에게도 첫 만남이 있었을 것이고 이런 저런 시련들을 견뎌냈을 테지만 막상 여쭤보려면 쑥스럽지 않았던가. 그런데 극중의 노부부는 그런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하나하나 들려준다. 목석같던 사내가 ‘같이 밥 먹자’고 했던 말은 풋풋한 연애사의 한 장면을, 손자만 남기고 떠난 아들의 기억은 우리 현대사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두 사람이 함께 꺼내보는 추억은 때론 애틋하고 때론 애절했다. 빛바랜 창호지를 손으로 천천히 스치는 것처럼.

▲ 연극 <3월의 눈> 포스터. ⓒ 국립극단 제공
무대는 서울 성북구에 있는 상허 이태준(월북작가)의 고택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연출자 손진책은 오래된 부부 만큼이나 많은 사연이 깃들었을 한옥을 통해 대사로 다 전달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청마루 아래 한 귀퉁이만 내놓은 낡은 가방과 신발, 빛바랜 솥뚜껑과 전등에서 관객은 옛 집이 겪어온 긴 세월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한옥을 해체하느라 장도리질 하는 인부들을 등진 채, 장오는 쓸쓸하게 마루에 앉아 있다.

수십 년 된 마루를 뜯어 ‘찻상’을 만들겠다는 땅주인이나 블로그에 올릴 ‘인증샷’의 배경쯤으로 한옥을 찾는 관광객들은 우리 사회 곳곳의 개발사업들 만큼이나 속물스럽게 보인다. 오랜 세월 함께해 온 것들의 가치, 그걸 소중히 해야 하는 이유를 되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두 ‘대배우’의 연기를 지켜보고 기립박수로 경의를 표한 관객들은 ‘오래된 것의 가치’를 가슴으로 느끼는 듯 했다.

“완주를 할 수 있다는 거, 그 앉아계신 모습, 서 계신 모습 자체가 연기니까, 정말 감동적이었어요.......아, 저 연세에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정말 부러움도 있고, 배우로서, 저절로 기립박수가 나오는 거죠. 대사 하나 씹는 것도 없고, 하실 수 있다는 게 정말 경이로워요.”

 

공연을 보고 나온 배우 윤소정씨는 “감동해서 너무 우는 바람에 선글라스를 벗을 수 없다”며 “연극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와서 이 공연을 다 좀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무사 자리에 들어선 ‘백성희장민호 극장’의 첫작품

백성희와 장민호씨는 60년 이상 우리 연극계를 지켜온 원로 배우다. 백성희씨는 1943년 현대극장의 ‘봉선화’로 데뷔한 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예술계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극단 신협과 국립극단 단원을 거쳐 국립극단장을 역임했다. 대사 잘 외우기로 소문난 배우로, 지금까지 ‘원술랑’ ‘여인천하’ ‘솔베이지의 노래’ ‘문제적 인간 연산’ 등 4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장민호씨는 1945년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했다가 월남, 1947년 극단 원예술좌의 ‘모세’ 공연으로 데뷔했다. 1962년에 국립극단 활동을 시작했고 60년대 말과 80년 대 등 십수 년간 국립극단장을 맡기도 했다. 1966년 국내 초연된 ‘파우스트’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한 이후 ‘파우스트 장’이란 별명으로 불렸으며, 현역 국내 연극인 중 최고령이다. ‘북벌’ ‘성웅 이순신’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 등  200여 편의 무대에 올랐다. 

 장 씨는 <3월의 눈>에서 ‘연기 하지 않는 연기’를 하겠다고 밝혔는데, 정말 연극 속 노부부의 대사는 이 시대 평범한 어르신들의 구술사(口述史)처럼 들린다. 작가 배삼식씨가 이 작품의 대본을 오직 두 원로배우를 위해 썼다니,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 서계동에 자리했던 기무사 수송대(위), 같은 자리에 새로 들어선 '백성희장민호 극장'(아래). ⓒ 국립극단 제공

<3월의 눈>은 ‘백성희장민호 극장’의 개관 첫 작품이다. 극장이 자리한 서울 용산구 서계동 부지에는 본래 기무사 수송대가 있었는데 이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국립극단이 최대 400명 수용 규모의 ‘백성희장민호 극장’으로 만들었다. 군사정부시절, 정치 사찰로 민주 인사들을 탄압했던 기무사 건물이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는 역사적 의의가 있고, 우리 연극계를 이끈 대배우들을 기리는 헌정의 공간이라는 의미도 크다.

주말 공연이 있던 지난 3월 13일에는 김동호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과 손숙 전 환경부 장관,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등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극장을 찾았다. 정병국 장관은 “두 분이 지금 그 연세에 저렇게 연기, 아니 삶 자체를 보여주시는 것이 정말 감동적”이라며 “살아온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시는 이 공연을 젊은이들이 많이 와서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3월의 눈>에는 마지막 부분에 작은 반전이 있다. 그 반전이 환희나 놀라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쯤, 관객은 천천히 마당 위로 내리는 눈을 보게 될 것이다. 눈은 곧 녹고 말지만, 오래된 한옥의 모습과 노부부의 얘기는 좀처럼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다. 공연은 오는 20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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