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임칼럼]규제완화 속 ‘도박’이 낳은 저축은행 부실

▲ 제정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교수
"현대적인 금융혁신이 이뤄지기 전, 대출자들은 단순한 세계에 살았다. 그들은 신용도를 평가하고, 대출을 하고, 돈을 빌린 이들이 약속한 방식으로 돈을 쓰도록 하고, 그 돈을 이자와 함께 돌려받을 수 있도록 모니터링을 했다. 은행가들과 은행 일은 따분했다. 그들에게 돈을 맡긴 사람들이 원했던 게 바로 그런 것이었다. 보통 시민들이 어렵게 번 돈을 누군가가 가져가 그걸로 도박을 하는 걸 원치 않았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일찌감치 경고했던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가 최근 저서 '끝나지 않은 추락(Freefall)'에서 꺼낸 말이다. 스티글리츠는 '시장이 완벽하니 규제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기본 가정이 잘못됐음을 규명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이 책에서 금융전문가들이 '혁신'이랍시고 만들어 낸 신상품과 현란한 거래기법들이 사실은 규제를 피해 더 많은 수입을 올리기 위한 편법들에 불과했다고 꼬집었다. '인플레 잡은 중앙은행 총재'로 이름난 폴 볼커 백악관 경제고문이 "지난 수십 년간의 금융혁신 중 진짜 도움이 된 것은 현금자동지급기(ATM)밖에 없다"고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스티글리츠는 파생상품, 헤지펀드, 투자은행 등으로 상징되는 '혁신'과 '모험'이 금융을 '따분한 본업'에서 벗어나 '통 큰 도박판'이 되게 함으로써 파국을 불렀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위기 후에도 이를 적절히 규제하려는 노력이 좌초되고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위기가 올 수밖에 없다고 걱정했다.

파생상품과 헤지펀드 등이 아직 덜 발달한 우리 사회는 이런 걱정을 '남의 일'로 들어도 될까. 그렇지 않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위기'가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것처럼 서구 금융의 또 다른 실패와 위기는 우리에게도 가공할 위협이 될 것이다. 또 수준은 다르지만 '혁신'을 표방한 금융규제 완화의 부작용을 우리 역시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다. 부실 저축은행들의 잇단 영업정지 사태가 대표적이다.

국내 저축은행 105곳 중 8곳이 최근 무더기 영업정지를 당한 배경에는 '무분별한 규제완화'와 '분수에 넘친 모험투자'가 있었다. 원래 '상호신용금고'라는 소박한 이름으로 출발한 저축은행들이 금융규제완화의 시류를 타고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이라는 '대박'을 좇다 엄청난 손해를 본 것이다. 2001년 당국이 저축은행의 예금보험 보장한도를 2000만 원에서 5000만 원으로 올리자 고금리를 노린 자금들이 '안심하고' 몰려들었다. 늘어난 예금으로 수익 낼 곳을 찾던 저축은행들은 부동산 투자 바람을 타고 너도나도 PF에 뛰어들었다. 여기에 2005년말의 '8·8클럽정책'이 불을 질렀다.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비율이 8%를 넘고, 일정 기준의 부실여신 비율이 8% 미만인 '우량저축은행'에 대해서는 80억 원의 동일인 대출한도를 획기적으로 완화해 준 것이다. 그래서 한 프로젝트에 1000억 원대를 대출한 '간 큰' 저축은행까지 나타났고, 이는 부동산 침체기에 돌이킬 수 없는 부실로 이어졌다.

저축은행의 '대형화'를 유도한 정책도 문제였다. 이미 부실해진 저축은행을 퇴출시키는 대신 사정이 나은 다른 저축은행에 '지점을 늘려주겠다'는 등의 혜택을 붙여 떠안김으로써 결과적으로 함께 망하게 만들었다. 특히 영업정지 당한 저축은행의 절반, 그리고 전체 저축은행의 20% 가량이 금융감독원 고위직 출신을 감사로 고용했다는 사실은 이 모든 과정에 감독당국의 유착과 비호 등 사적 이해가 작용하지 않았는지 강한 의심을 부른다. 부실 저축은행 대주주와 경영진의 불법행위와 함께 감독당국의 책임을 낱낱이 따져야 한다.

동시에 중요한 것은 저축은행이 서민금융의 본령을 회복하도록 하는 일이다. 신용도가 낮은 개인들을 상대하는 서민금융은 당장 담보가 없고 형편이 어렵더라도 성실하고 유망한 대출자를 찾아내 기회를 주도록 '지역밀착영업'을 해야 한다. 고액자산가만 우대하는 프라이빗뱅킹(PB)과 달리 소액예금도 반갑고 소중하게 받아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위험한 '대박' 투자를 기웃거리는 대신 수익성과 안전성을 재는 '따분한 본업'에 충실하도록 대출한도와 영업범위 등을 적절히 규제해야 한다. 야채 팔고 닭 튀기며 힘들게 번 돈을 '금융 발전' 등 그럴싸한 구호 아래 '도박판 판돈'처럼 쓰게 놔둬선 안 될 일이다.


*  이 칼럼은 국제신문 2월 28일자 시론으로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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