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델피르와 친구들’ 60년 우정 서울에서 과시

‘사진 보여주는 일’에 일생을 바친 의대생 델피르

“처음엔 사람들의 병을 고치려다가 나중엔 그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싶어졌어요.”

의대생 델피르는 사진을 만나면서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스물둘 청년이었던 그는 우연히, 폐간 위기에 처한 교내 잡지의 편집장을 맡게 됐다. ‘새롭다’는 뜻을 가진 교지 <NEUF> 발간을 위해 발 벗고 나선 그의 용기에 많은 사진작가들이 선뜻 작품을 내줬다. 매그넘 에이전시 창시자 로버트 카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시무어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가들과 인연을 맺었고, ‘사진의 미다스 손’이라 불리게 됐다.

 ▲ 델피르가 만들었던 교지 . ⓒ 구세라

올해 그의 나이 여든넷. 프랑스의 사진 출판기획자이자 전시기획자, 예술감독, 영화제작자로 60여년간 활동해온 그의 사진인생을 기념하려 오랜 친구들이 뭉쳤다.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헌정 전시회를 연 것이다. 델피르의 사진인생 60주년이었던 2009년, 파리에서 열린 아를 사진페스티벌을 시작으로 2010년 유럽사진미술관을 거쳐 지금 <델피르와 친구들>이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 머물고 있다. 

12월 17일부터 열린 전시에는 185점의 원본 사진과 150권의 사진책을 선보인다. 27일이면 문을 닫으니 조금 서두를 만하다. 사라 문 감독의 ‘이미지의 전달자, 델피르의 초상’이라는 영화를 포함해 총 5편의 영상물도 관람할 수 있다.

 ▲ 로베르 두아노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키스' 사진이 전시장 입구에 구조물로 세워져 있다. ⓒ 구세라

'결정적 순간’으로 잘 알려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키스’의 로베르 두와노부터 요세프 코우델카, 로버트 프랭크, 윌리엄 클라인, 헬무트 뉴턴, 세바스치앙 살가두, 레몽 드파르동, 제인 에벌린 앳우드, 르네 뷔리, 미셸 반던 에이크하우트, 사라 문, 자크 앙리 라르티그, 마르틴 프랑크, 르네 뷔리, 아뤼 그뤼에르, 박재성 등 다양한 작가의 사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사진의 역사를 살펴보는 코너도 있다.

거장들 사진뿐 아니라 전시기법도 볼 거리

 ▲ 사진전 <델피르와 친구들>을 찾은 관람객들이 ‘포토 포슈’를 보고(위), 별도로 마련된 의자에 앉아 사진책을 보고(아래) 있다.  ⓒ 구세라  
전시회 구석구석에서 델피르의 세심함을 엿볼 수 있다. 벽에 걸린 작품들 옆 허리 높이엔 실제 발간된 사진책을 놓아 직접 넘겨볼 수 있게 했다. 사진집을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커다랗고 푹신한 의자를 놓아달라고 해, 주최쪽에서 별도로 큰 의자를 만들고, 방석도 맞춰 놓았다. 사진집도 닳거나 파손될 것을 우려해 2~3질씩 보냈다. 그는 전시회 영상물이 재생될 브라운관 크기까지 요구할 정도로 빈틈없는 전시기획자다. 모두가 관람객의 전시 집중도를 높이려는 꼼꼼한 배려다. 

델피르가 50년대 펴냈던 사진집은 양장본으로 고급스럽게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긴 어려웠다. 그는 학생일 때 넉넉하지 않은 경제 사정으로 책을 구입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경험들이 나중에 포토포슈(Photo poche)를 만들 때 도움이 됐다. 컬렉션 사진집인 ‘포토포슈’ 시리즈는 델피르의 가장 큰 업적이다. 손에 쥘 수 있는 엽서 크기 사진집은 사진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사진 크기가 작아진 만큼 가격도 싸졌고, 가지고 다니며 쉽게 볼 수 있어 사람들이 사진에 친숙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한국어판은 없지만 7개 국어로 번역돼 판매된다.

 ▲ 꼼꼼한 인쇄와 편리한 크기, 합리적인 가격의 ‘포토 포슈’는 논문, 역사, 주제, 기술 등과 관련된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 구세라

한겨레신문사 이길우 사업국장은 “한국에는 1960년대 열화당이라는 곳에서 사진집을 출간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델피르가 사진 대중화에 기여하며 사진 문화를 끌어올렸다는 말이다. 한국에선 <한겨레>가 <매그넘 코리아(2008)> <사라 문(2009)>에 이어 이번 <델피르와 친구들>을 열어 국내에서 수준 높은 사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다는 얘기도 전했다.

델피르와 친구가 된 사진의 전설들

“우정은 모든 것이죠, 정말입니다.” 그와 인연을 맺었던 사진작가들이 없었다면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는 델피르. 이 전시회를 기획할 때 그가 생각했던 제목은 ‘수천 가지의 감사’였는데, 자신을 있게 한 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 덕분이라는 것을 항상 감사하기 때문이다. 전시회에서도 상영되는 ‘이미지의 전달자, 델피르의 초상’에서도 볼 수 있듯 델피르는 그와 ‘사진’으로 인연을 맺은 작가들에게 애정이 넘친다.

 ▲ 델피르와 친구들의 활동 모습이 담긴 사진.  ⓒ 구세라

시각에 대해 알게 해준 패션모델 출신의 사진 작가이자 델피르의 부인 사라 문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사라의 사진 속 주인공들은 모두 눈을 감고 있다. 현실을 부정하는 작가의 성향이 작품에 투영된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인터뷰어가 “사라가 델피르 당신도 부정하진 않나요”라고 묻자, 그는 “그건 사라한테 직접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며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델피르에게 인정받은 유일한 한국인 사진작가 박재성의 사진도 눈에 띈다. 이번 전시회에 걸린 그의 작품은 13점으로 작가들 중 가장 많다. 아홉 살에 미국으로 이민가 엄마 없이 소년기를 보내서인지 작품 분위기는 좀 어둡다. 30대에 프랑스로 넘어가 사진공부를 본격적으로 하던 그는 네덜란드 스히르모니코흐 섬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담은 사진으로 많은 관객과 수집가는 물론 델피르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델피르는 100롤의 필름을 선물로 주고 촬영을 독려하기도 했다. 그 필름으로 촬영한 사진은 델피르의 손을 거쳐 사진집 '여기 또는 그 어딘가: La ou Ailleurs‘로 탄생했다. 전시회에서 볼 수 있는 ’눈을 감은 소년‘이란 작품 속 소년은 마치 자신의 유년시절을 반영하는 것 같다.

 ▲ 프랑스인의 일상을 담아낸 자크 앙리 라르티그의 작품.  ⓒ 구세라

그와 달리 자크 앙리 라르티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10대까지 찍은 사진만 25만장에 이른다. 여섯 살 때 카메라를 선물 받은 이후 자동차 경주부터 세련된 파리 여인들 모습까지 프랑스인의 일상을 담아낸 사진은 중요한 기록이 되었다. 패션모델 넷이 워킹하는 모습을, 옷 입고 있는 모습과 하이힐만 신은 알몸의 모습을 비교해 찍은 헬무트 뉴턴과 미화되지 않는 미국의 객관적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낸 로버트 프랭크의 작품은 사진에 사회적 시선을 담아내기도 했다.

브라질 태생 경제학자인 세바스치앙 살가두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을 찍고 그들과 교감하며 삶을 보냈다. ‘결정적 순간’으로 유명한 브레송의 작품 가운데 신분이 높은 사람들로 둘러싸인 추기경에게 키스를 받으려는 평범한 여성의 애절한 눈빛도 관람객들을 집중하게 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들은 하나하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작품 '파셀리 추기경'.  ⓒ 구세라

델피르가 말하는 좋은 사진

사진은 항상 발명품의 혜택을 받아 끊임없이 진화해왔지만, 도덕성 없이 훌륭한 사진은 존재할 수 없다고 델피르는 전한다. 전쟁의 참상이나 사회 부조리 등 다양한 삶의 국면들을 사진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작가는 보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진을 찍어야 한단다. 보는 사람이 자신을 사진에 투영시킬 수 있도록 작가가 힘써야 한다고. 자신을 안 보여주면서 뭔가를 보여줄 순 없기에 사진작가는 대상에 자신을 투영시켜야 한다. 그는 사진을 찍는 것만큼 사진과 영상언어로 소통하며 내면화할 수 있는 대중의 역할 또한 강조한다. 사진을 찍는 건 결국 작가가 아니라 바로 사진을 보는 사람 자신이라고.

그는 미술, 건축, 아동과 관련된 도서도 출판했다. 기존의 동화책은 너무 소박하거나 정교했기 때문에 자신이 새로운 도전을 해본 것이라고. 특히 12개 언어로 번역된 <악어의 눈물>에는 흘러넘치는 상상력이 그림에 잘 녹아 있다. 그는 일러스트를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으려 애썼다. 광고에도 손댔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시트로앵’ 광고는 광고대상까지 받았다.

손꼽기도 힘들만큼 다양한 영역에 발을 담궜던 델피르가 항상 피해가지 못했던 비판은 깊이가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델피르는 “하나의 상에서 다른 상으로 제 관심은 옮겨 다니죠”라면서, 솔직히 말하자면 비판에 신경 쓴 적이 없다고 전한다.

 ▲ 출판인이자 전시기획자인 델피르의 면모를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사진전 '델피르와 친구들'.  ⓒ 구세라

델피르가 생각하는 ‘좋은 사진’이란 ‘진정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의미 있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사진이다. 사진에는 끊임없는 불안이 있는데, 바로 ‘그 때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평온한 불안’이란다. 모순적이지만 사진의 특성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지금은 200m를 천천히 걷는 것도 힘들게 느껴진다는 우리나이 여든여섯의 델피르. 하지만 늙는 몸이 그의 사진에 대한 사랑까지 늙게 만들 순 없나보다. 지금까지 “순항하는 배처럼 달려왔다”는 델피르는 “하지만 선착장이 어딘지는 모르겠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있어 행복은 ‘하는 것’이고 불행은 ‘안하는 것’이란다. 스무살 이후 자기 전에 꼭 책을 보고 수많은 분야의 지식과 지혜를 키워 150회 이상 전시회를 열었던 델피르. 책, 전시회, 작품 선정, 영화제작 등 사진기 셔터를 누르는 것만 빼고 사진을 위해 인생을 바친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해야 할 일’이 있기에 두려움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행복하다.

 ▲ 지난 12월 17일부터 열린 사진전 '델피르와 친구들'은 이달 27일까지다. 사진은 요세프 코우델카의 '멈춰버린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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