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토크] 두근거렸던 기억을 떠올리다, '한여름의 판타지아'

우리는 영화 같은 인생을 꿈꾼다. ‘영화 같은 인생’에서 ‘영화’는 스릴러나 공포,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로맨스나 가족 영화같이 사랑의 감정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가족의 따뜻한 정이 가득한 아름답고도 황홀한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영화 같다'란 표현을 환상적인 일들이 눈 앞에 펼쳐질 때 사용하는 이유다. 영화와 달리 현실은 달콤하지 않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부지기수다. 좌절과 실패가 성공으로 이어지지도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불시에 잃기도 한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영화는 고단한 현실을 잊게 해주고,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꿈같은 일을 영상으로 현재화시킨다.

▲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영화 같은 인생'을 꿈꾸는 우리에게 현실 세계와 영화 속 세계를 비교해서 보여준다. ⓒ <한여름의 판타지아> 공식 페이스북

장건재 감독의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현실 세계와 영화 속 세계를 비교하는 영화다. 영화는 각각의 서사를 지닌 1장 ‘첫사랑, 요시코’와 2장 ‘벚꽃우물’로 나누어져 있다. 두 이야기는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 노인만 남은 일본의 고조시와 시노하라 마을을 배경으로 연결돼 있다. 1장에선 한국에서 온 영화감독 태훈(임형국 분)과 조감독 미정(김새벽 분)이 시나리오 구상을 위해 고조시와 시노하라 마을을 둘러본다. 1장이 현실 세계의 영화 제작과정을 찍은 다큐멘터리 같다면, 2장은 마치 1장의 태훈이 만든 영화처럼 보인다. 1장에서 고조시를 안내한 공무원 유스케(이와세 료 분)가 2장에서 혜정(김새벽 분)과 애틋한 사랑에 빠지는 감 농사꾼 유스케(이와세 료 분)를 연기한다. 김새벽과 이와세 료는 1장과 2장 모두에 나와 1인 2역을 연기했다.

삶은 첫사랑의 설렘을 추억하는 것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1장과 2장을 연달아 보여줌으로써 현실의 인생과 영화 같은 인생의 대비를 시도한다. 1장은 ‘산다는 건 마치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듯하다. 여기서 ‘첫사랑’은 아름답고 두근거렸던 과거의 기억을 말한다. 1장에선 고조시와 시노하라 마을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첫 장면에선 주점을 운영하는 노부부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장사가 잘 되던 때와 잘되지 않던 때를 회상하고 ‘지금은 모두 웃으며 기억할 수 있는 일’이라며 추억에 젖는다. 고조시 공무원인 유스케도 인터뷰에서 열정적이고 꿈 많던 과거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한때 배우가 꿈이었던 그는 잠시 극단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관두고 공무원 시험을 쳤다고 고백한다.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 때문인지 시종일관 편안한 미소를 짓는 유스케지만, 배우를 꿈꾸던 시절을 이야기할 때 그의 눈빛은 반짝인다.

▲ 고조시와 시노하라 마을 사람들은 아름답고 두근거렸던 추억을 이야기한다. ⓒ <한여름의 판타지아> 공식 페이스북

첫사랑의 내용은 개별적이지만, 첫사랑의 감정은 보편적이다. 만화 <H2>, 영화 <클래식>이나 <건축학개론>은 시대도, 배경도, 등장인물의 나이도 모두 다르지만 태어나서 누군가를 처음으로 사랑하며 느끼는 ‘설렘’을 다뤘다는 점에서 ‘첫사랑’이라는 공통분모로 묶일 수 있다. 모든 게 새로운 ‘처음’과 타인에 대한 진지한 호기심인 ‘사랑’이 결합한 첫사랑의 감정은 ‘설렘’이다. 1장에서 시노하라 마을을 안내하는 겐지의 첫사랑은 초등학교 동창인 요시코다. 그는 오사카에서 일할 당시 만난 요시코와 닮은 술집 종업원을 그리워한다. 두 사람은 엄연히 다른 인물임에도 겐지가 요시코와 그녀를 굳이 연관 지어 기억하는 이유는 '설렘' 때문이다. 순간순간마다 살아있음을 느끼며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설렘은 첫사랑에서만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젊었을 적에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열심히 일했던 노부부의 시간도, 언젠가 더 큰 무대에 설 날을 꿈꿨던 유스케의 시간도 설렘이 가득한 '첫사랑의 시간'이다. 1장의 인터뷰에서 이들은 모두 그 시간을 그리워한다.

시노하라의 폐교에서 태훈은 겐지의 초등학교 시절 사진을 발견한다. 어린 겐지는 앞에서 말을 하는 선생님이 아닌 요시코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 속의 어린 겐지가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요시코를 바라보듯이, 현실의 겐지도 설렘으로 가득했던 '첫사랑의 시간'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루하루가 새로웠던 '설렜던 시간'이 그리운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그때가 참 좋았다'며 과거를 말한다.

지금이 '영화 같은 순간'이다

1장이 과거 이야기로 가득하다면, 2장의 모든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에서 혼자 여행 온 혜정은 감을 재배하는 청년 유스케와 우연히 만난다. 그녀는 배우로 활동하고 있지만, 배역을 따내지 못해 일거리가 없어서인지 고민이 많아 보인다. 배우의 꿈을 접은 1장의 유스케와 달리 그녀는 현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다. 고조시에 도착한 직후 혜정은 누군가와 통화하며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섭외 전화나 오디션 합격 소식일 게다. '기다린다'는 건 '나아질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단 뜻이다. 우리가 아무리 가능성이 작은 일일지라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좋은 결과를 기다리듯이.

한나절로 끝날 줄 알았던 둘의 인연은 혜정이 유스케에게 시노하라 마을 안내를 부탁하며 다시 이어진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안하다가도, 때로는 묘한 긴장감이 넘칠 듯 말 듯 찰랑거리는 감정을 주고받는다. 둘의 '설렘'은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까지 전달된다.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히 고르듯 천천히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사랑에 빠졌을 땐 누구나 상대방의 표정이나 몸짓, 말 한마디에도 온통 신경을 집중하지 않는가. 1장의 겐지는 과거에 설렜던 '첫사랑의 시간'을 그리워한다면, 2장의 혜정과 유스케는 현재 '설렘'을 느낀다.

▲ 지금 설레고 있다면 '영화 같은 순간'인 것이다. ⓒ <한여름의 판타지아> 공식 페이스북

감독이 1장과 2장을 나눈 기준은 '시간'이다. 1장은 '과거'에 대해, 2장은 '현재'에 대해서 말한다. 감독은 영화에서 ‘현실의 인생’과 ‘영화 같은 인생’을 분리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이 둘이 다르지 않음을 강조한다. '영화 같은 인생'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지금 자신을 설레게 하는 모든 건 '영화 같은 순간'인 것이다.

판타지를 현실로 만드는 방법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에서 주인공이다. 때로는 자신의 인생이 하찮고, 지독한 무력감에 희망이 없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살아가는 일이 '영화 같은 일'이다. 장건재 감독은 2장을 시나리오 없이 작업했다. 배우들은 최소한의 기본 설정만 하고 즉흥적으로 연기했다고 한다. 현재에 충실한 연기와 순간들이 모여 한 편의 영화가 됐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삶은 변화한다. 이 '변화'야말로 우리를 설레게 하는 원동력이다.

감독은 삶을 변화시키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을 포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1장에서 태훈과 미정, 유스케가 골목길을 지나가는 장면 뒤에도 카메라는 골목길을 한동안 비춘다. 풍경을 바꾸는 건 골목길 그 자체가 아니라,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1장에서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과거는 과거의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유스케는 배우의 꿈을 꾸던 그때의 자기 자신을 그리워하고, 겐지는 첫사랑 요시코를 그리워한다. 2장에선 혜정에게는 유스케가, 유스케에겐 혜정이 삶의 변화를 가져다준 존재다.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타인은 모두 잠재적 경쟁자가 되고, 1인 가구 비중이 점차 높아지는 한국의 현실을 떠올리면, 한국에서 '사람'이 만드는 변화로 인해 '영화 같은 인생'을 사는 건 어려워 보인다.

▲ 이번 여름, 설레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망설이지 말길. '한여름의 판타지아'가 '현실'이 될 것이다. ⓒ <한여름의 판타지아> 공식 페이스북

1장과 2장은 모두 주인공들이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끝이 난다. 불꽃은 어두운 밤하늘에 순간 피어올랐다가 금세 사라진다. 우리를 두근거리게 만드는 순간 역시 찰나에 지나갈 것이다. 현재에 집중하지 않으면 지나고 난 뒤 아쉬움에 사무칠지도 모른다. 2장에서 유스케는 혜정에게 '지금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있는데도 그러기가 어렵다'고 말하며 혜정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지금 설레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망설이지 마라. '영화 같은 일'이 눈 앞에 펼쳐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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