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언제나 어려운 선택의 순간

▲ 조은혜 기자

나는 하얀 일회용 접시 위에 놓여있는 마지막 홈런볼 한 조각을 노려보았다. 아침부터 물밖에 삼키지 못한 배가 꾸르륵거렸다. 학과 사무실 중앙에는 유리로 덮은 사각 탁자가 놓여 있었고 늙은 남자 교수 두 명과 나를 포함한 30대 여자 시간 강사 네 명이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연구실 탁자에 앉은 다섯 명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들은 마지막 홈런볼 한 조각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 지은 쌤이 철도산업을 맡고, 현정 쌤이 항만산업을 맡읍시다. 이번 사업이 잘 되면 우리 불문과가 공대와 연계될 수 있을 거예요. 지금까지는 유례가 없었지요.”

학과장 교수의 말에 시간강사 네 명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론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론 한숨이 나왔다. 불문과와 공대의 연계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느 공대가 프랑스 문학, 언어학을 공부하는 인문학과와 철도, 항만사업 공동연구를 한단 말인가. 인문대 통폐합 바람에 밥그릇이 뺏길까 겁난 교수들이 따내지도 못할 사업공모에 손을 댔다. 죽어나는 것은 시간강사들이다.

홈런볼을 다시 노려보았다. 빈 뱃속에 저 폭신하고 달달한 과자를 입에 넣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홈런볼에 손을 뻗어 옆 사람의 주목을 끌고 싶지 않았다. 이 쪽 세계에서는 공기처럼 지내는 게 우선이다. 튀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셀린을 연구한 논문으로 주목받았던 똑똑한 선배가 있었다. 그녀는 할 말은 다 해야 하는 성격 탓에 교수와 사이가 틀어졌다. 선배는 작년 채용 때 교수직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녀는 강사직을 관두고 남편과 외국으로 떠났다. 그 선배처럼 `이 말도 안 되는 사업에 저희가 희생할 이유는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밀려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선배처럼.

“우리도 공모를 하는 입장이라 선생님들을 위한 예산이 딱히 없네요. 진행비는 받았으니 점심은 호화롭게 책임질게요. 여러분 모두 우리 과 졸업생들이니 애정을 가지고 열심히 해 봐요.”

공복감과 노곤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머리에 지끈하고 묵직한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창밖으로 누군가 타격연습을 하는 쇠파열음이 들렸다. 탱, 탱, 탱.

눈앞에 드넓은 야구장이 펼쳐졌다. 나는 타자가 되어 야구방망이를 들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수만 명의 관중이 숨죽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저 멀리 투수를 쳐다보았다. 짙은 남색 정장을 입고, 벗겨진 이마에 개기름이 번들한 학과장 교수였다. 젊음의 치기와 열정은 오래 전 저 기름에 미끄러져 사라졌을 것이다. 그의 표정에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 아, 지금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의 상황이군요. 김지은 선수에게는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습니다. 이제 두 가지 선택이 남아있습니다. 홈런을 노리느냐! 아니면 희생번트를 대느냐, 모험이냐 아니면 타협이냐. 선택이 기대되는데요?

▲ 변화구냐 직구냐, 번트냐 홈런이냐, 타협이냐 도전이냐! 야구에서든 인생에서든 언제나 어려운 질문이다. ⓒ pixabay

저 멀리 투구석에 서 있는 교수를 쳐다보았다. 교수는 한 발을 들고 투구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의 한 발이 올라가고 한 손이 뒤로 젖혀졌다. 볼을 잡은 그의 오른손이 점점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타구폼을 잡으며 고민했다. 홈런이냐! 희생번트냐!

“허허.. 지은쌤 많이 피곤하신가 보네.”

눈을 번쩍 떴다. 회의탁자를 둘러싼 열 개의 눈이 나를 쳐다보며 히죽 웃고 있었다. 나는 어지러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고 변명했다. 그리고 멋쩍은 듯 웃었다.

“오늘 회의 끝입니다. 다음 회의 때 봅시다. 수고해 주세요.”

학과장 교수가 마지막 말을 끝내고 몸을 일으켰다. 시간 강사 네 명도 거의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세 명이 허리를 굽히고 인사했다. 나도 기계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탁자 위 한 조각 남은 홈런볼이 보였다. 학과장 교수의 손가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지막 홈런볼 조각을 집는 것이 보였다. 그는 홈런볼을 입에 집어넣고 미소를 띠며 회의실 문 뒤로 사라졌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문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탁자 옆에 잠시 서있었다. 창 밖에서 누군가 타격연습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탱. 탱. 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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