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농업이슈] 농업박물관 견학

“우리 조상들에게 농사는 축제였습니다. ‘꽂아보세, 꽂아보세.’ 노래를 부르며 값진 땀을 흘렸죠.”

한 시간 남짓한 관람 시간은 한국 전통농업의 재기발랄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지난 3월 26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지역•농업문제세미나’ 참가자들이 서울 중구 새문안로에 있는 농업박물관(관장 김재균)을 찾았다. 전시 해설을 맡은 이제구 학예사는 우리 조상들에게 농사는 축제였음을 줄곧 강조했다. 농사는 어떻게 축제가 됐을까? 

김매기와 마을 축제의 ‘융합’, 두레

“우리나라 농경 문화의 핵심은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김매기를 할 때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겠죠? 조상들은 자기 논이 아니더라도 모두 모여 농사일을 함께했습니다. 여기에 노래와 흥이 빠질 수 없죠. 고된 노동을 축제화한 조상들의 문화가 바로 두레입니다.” 

▲ 두레에서 춤추며 농사일 하는 조상의 모습을 본뜬 모형. ⓒ 하상윤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융합’을 실천해왔다. 바로 ‘두레’를 통해서다. 두레는 농촌의 공동노동 조직으로 농촌 사회의 상호 협력과 감찰을 목적으로 조직된 촌락 단위를 말한다. 두레의 공동노동 형태는 모내기•물대기•김매기•벼베기•타작 등 논농사 경작 전 과정을 아우른다. 특히 많은 사람이 합심하여 일해야 하는 모내기와 김매기에는 대부분 두레가 동원됐다. 농민들은 농사일을 함께하며 노동의 효율성을 추구해왔다. 충북 제천군 금성면 덕적리 한 농민은 “집집이 따로 하면 3일 걸릴 일을 두레에서 하면 2일 걸린다”고 주강현의 <두레: 농민의 역사>에서 밝혔다. 

그렇다면 땅 크기가 전부 다른데 어떻게 농사를 함께 지을 수 있었을까? 같은 노동력을 투입한다면 상대적으로 땅이 넓은 사람이 더 이익이 되지 않을까? 여기서도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넓은 땅을 가진 사람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술과 고기를 넉넉히 준비해 흥을 돋워주었다. 상대적으로 땅이 좁은 사람도 두레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다.  

▲ 농경문 청동기. ⓒ 국립중앙박물관

“이 사람이 기록상 최초의 우리나라 농민입니다. 그런데 옷을 전부 벗고 있죠. 자세히 보면 입도 웃고 있습니다. 농민은 왜 옷을 모두 벗었을까요?”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에는 머리 위에 긴 깃털을 꽂은 채 따비로 밭을 일구는 헐벗은 남자(사진 오른쪽 위)가 있다. 그 옆에는 괭이를 치켜든 인물과 항아리에 무언가를 담고 있는 인물이 새겨져 있다. 다른 한쪽 면에는 오른쪽과 왼쪽 모두 두 갈래로 갈라진 나무 끝에 새가 한 마리씩 앉아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렇다면 남자는 왜 옷을 벗고 밭을 일구는 걸까?

“이때는 땅을 여자라고 생각한 거죠. 땅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남자가 옷을 벗고 밭을 갈면 풍년이 든다는 믿음이 있었죠. 실제로 조선시대 때 함경도에서 옷을 벗게 하고 밭을 간 기록이 있습니다. 후에 관찰사가 그 풍습을 없앴어요.”

대전에서 출토된 농경문청동기는 농경과 관련된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된 도구다. 맨 위 작은 구멍 여섯 개는 구멍마다 조금씩 닳아 있어 끈으로 매달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쪽 면에는 한가운데 세로 방향과 가장자리 윤곽을 따라 빗금∙선∙점선을 이용한 무늬띠가 돌아가고 안쪽 빈 공간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농경문청동기는 인물∙농기구∙경작지 등을 추상적인 선으로 묘사해 청동기시대의 농경과 관련 의례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토지 공개념 이전에 ‘소 공개념’

선농단(先農壇)은 농사짓는 법을 가르친 고대 중국의 제왕 신농씨와 후직씨를 주신으로 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신라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역대 임금들은 풍년을 기원하며 선농제를 지냈다. 제를 올린 뒤에는 선농단 남쪽에 마련된 적전에서 왕이 친히 밭을 갈기도 했다. 

▲ 왕이 적전에서 밭을 갈며 풍년을 기원하고 있다. ⓒ 하상윤

“왕이 직접 쟁기를 끈 이유는 백성들에게 농사일의 소중함을 알리고 권농에 힘쓰기 위해서겠죠. 가장 큰 이유는 뭘까요? 이때는 지금처럼 9시뉴스가 없었기 때문에, 왕이 직접 쟁기를 끌어 농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왕이 선농단에서 친경하는 제도는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융희 3년(1909)을 마지막으로 일제하에서 폐지됐고, 지금은 돌로 쌓은 사방 4m 단만 남았다.

농부에게 가장 큰 재산은 ‘소’다. 소를 이용하면 농업생산력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소를 가진 농민이 많지 않아 소 한 마리에 주인이 여럿이었다. 동네 사람 모두가 공동으로 보살피며 소를 이용해 밭을 일구었다. 이 학예사는 이를 ‘소 공개념’이라 불렀다. 

▲ ‘지역•농업문제세미나’ 참가자들이 이 학예사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 하상윤

소에 얽힌 일화는 또 있다. 사진에 보이는 소는 사람을 떠받을 만큼 성질이 고약하다. 어떻게 단박에 아냐고? 뿔을 보면 알 수 있다. 뿔이 앞으로 휜 소는 ‘뜨는소’라 하여 사람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반면 뿔이 곡선을 이루거나 밑으로 휘어 있으면 사람 말을 잘 듣는 착한 소다.

조선시대 ‘노래방’, 디딜방아

디딜방아는 발로 디뎌 곡식을 빻는 방아이며, 다른 말로 ‘말방아’라고도 한다. 발 디디는 부분의 개수에 따라 ‘외다리방아’와 ‘두다리방아’로 구분한다. ‘두다리방아’는 외다리방아보다 많은 양을 찧을 수 있지만 균형 맞추기가 힘들다. ‘외다리방아’는 중국이나 일본, 대만, 동남아시아 등에서 널리 쓰였지만, ‘두다리방아’는 우리나라에서만 써왔다. 왜 선조들은 불편한 ‘두다리방아’를 고집했을까? 여기에도 ‘흥’이 있다. 두 명이 함께 노래를 부르며 곡식을 빻아 일의 고단함을 덜었다. 디딜방아가 있는 곳은 조선시대의 노래방이었던 셈이다. 

▲ 이 학예사는 ‘농민독본’을 가리키며 농업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 하상윤

일과 놀이를 분리하지 않았던 조상들의 삶은 세종대왕이 추구하던 가치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생업에 충실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기를 바랐다. 바로 ‘생생지락(生生之樂)’이다. ‘생생지락’은 즐겁게 일하며 사는 삶을 뜻한다. 임금의 바람은 농민들에 의해 논밭에서 실현됐다.

농사일이 힘들수록 더 크게 노래 불렀던 조상들에게 축제는 위기 극복의 효과적 방편이었다. 그러나 바쁜 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일과 놀이를 함께 생각할 여유가 없다. 농업박물관은 고된 노동과 유희를 하나로 결합한 조상들의 지혜를 엿보게 한다. 오늘날의 노동현장에서도 ‘생생지락’을 즐길 수는 없을까?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지역농업이슈보도실습] 강좌의 산물입니다. 대산농촌문화재단과 연계된 이 강좌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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