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토크] 누아르의 새 지평 연 '차이나타운'

영웅들이 치열하게 스크린을 점유하던 극장가에 여성의 약진이 돋보였다. 4월 29일 개봉한 영화 <차이나타운>은 지난달 20일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 누적관객수 145만 명을 돌파했다.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는 핸디캡이 있었지만 손익분기점(124만명)을 넘겼다. 대형 블록버스터인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천만관객 돌풍 사이에서 일궈낸 소기의 성과다. 게다가 올해 열린 68회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대되기도 했다.  

'여성 영화는 제작이 어렵다'는 통념이 있다. 실제로 여배우가 주연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영화는 찾기 어렵다. 2014년 <수상한 그녀>, 2011년 <써니> 정도가 대표적이지만, 그나마도 코미디나 드라마 장르다. <차이나타운>은 2002년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 이후 13년 만에 만들어진 '여배우가 액션하는 영화'다. 

<차이나타운>은 영화계의 속설을 깨고 어렵게 제작된 영화라 개봉 전부터 기대가 컸다. 특히 매 작품에서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김혜수와, 신인이지만 영화 <은교>에서 순수함과 발칙함 사이를 오가는 넓은 폭의 연기를 선보인 김고은이 주연을 맡아 2015년 상반기 개봉기대작으로 꼽혔다. 

“일영아, 내가 널 왜 계속 데리고 있는 것 같니.”

태어나자마자 지하철 물품보관소 10번에 버려진 일영(김고은 분), 이름도 숫자 1과 0에서 땄다. 썩은 햄버거를 먹으며 하루하루 살던 그녀는 낯선 이에게 납치되어 차이나타운에 발을 들이고, 거기서 '엄마'(김혜수 분)를 만난다. 일영은 엄마에게 쓸모를 증명하느라 '왜'라는 물음없이 본능으로 살아간다. 엄마의 사진관에서 불법체류자를 돕고, 사채를 빌려주고 받으러 다닌다. 우곤(엄태구 분)과 함께 발랄하지만 나약한 쏭(이수경 분)과 모자란 홍주(조현철 분)를 친동생처럼 보살피며 가족같은 이들과 짜장면을 먹는 것이 일영의 일상이다.  

▲ 엄마의 뜻에 따라, 그리고 자신이 살기 위해 거친 세계에서 쓸모를 증명하는 주인공 일영. ⓒ <차이나타운> 공식 페이스북

20살이 되던 어느 날, 평소처럼 엄마의 지시를 받아 일영은 필리핀으로 도망가버린 악성채무자의 집을 찾아간다. 거기서 채무자의 아들 석현(박보검 분)을 만난다. 석현은 빚을 받으러 온 일영에게 기죽지 않고 파스타를 만들어주고 일영의 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해준다. 석현에게서 일영은 낯선 친절을 느끼고, 이자를 주고받기 위해 만남을 지속하던 두 사람은 외로움이라는 공통점으로 점점 가까워진다. 일영은 꿈이란 무엇인지,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은 어떤 존재인지 호기심을 갖고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엄마는 일영의 변화를 눈치챈다. 빚을 갚기 위해 필리핀에서 일하던 석현의 아버지가 증발하는 일이 발생하고, 일영은 가족과 석현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다가온다.  

<차이나타운>은 취약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누아르 세계에서도 여성 주인공이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남자들만의 세계였던 어둡고 묵직한 암흑세계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데 김고은과 김혜수는 적격이었다. 김혜수는 거친 사람들을 통제하는 절대 권력자인 엄마 마우희 역할로 대체 불가능함을 증명했다. 나무같이 뻣뻣한 머리와 육중한 몸을 분장으로 만들었지만, 세월과 함께 쌓인 냉정함은 살아 있었다. 잔인한 세상에서 생존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김고은은 영화 속 일영 모습 그대로였다. 

▲ 잔혹함과 모성애를 가진 '엄마'를 연기한 김혜수는 <차이나타운>에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감을 여실히 증명했다. ⓒ <차이나타운> 공식 페이스북

<차이나타운>, 작법의 과감한 파괴? 단순한 성반전물?

‘검다'는 의미의 프랑스어에서 비롯된 누아르(Noir)는 '작법'에 충실한 장르다. 1940년대 프랑스 비평가들이 누아르란 이름을 붙이며 하나의 장르로 분류되기 시작됐다. 범죄가 판치는 암울한 도시, 명암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미장센, 선(善)과 악(惡)이 모호한 세계, 선 굵은 남성 주인공과 주인공을 파멸로 이끄는 아름다운 팜므파탈(Femme fatale)은 누아르 영화의 속성들이다. 

영화 <차이나타운>은 주인공이 어렸을 때부터 키워준 보스에게 대항한다는 점에서 <달콤한 인생>이나 <화이> 같은 기존에 만들어진 누아르 영화와 다르지 않다. 차이는 주요 등장인물의 성별이 반대라는 점이다.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은 여성 관객이 기존 누아르 영화보다 쉽게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차이나타운>의 흥행비결로 분석되고, 누아르 장르의 새로운 변주로서 의미가 생기는 지점이다.  

<차이나타운>에서는 남성이 여성 주인공의 보조적 역할을 담당한다. 치명적인 존재인 '팜므파탈' 역할도 남성이다. 석현은 암흑세계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일영을 대한다.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영화를 보고,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외로움이라는 공감대를 나눈다. 일영은 거칠고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석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기도 한다. 이 신은 영화 속에서 '일영이 느껴본 적 없는 평범한 일상'으로 대표돼 암흑세계와 대비를 극대화하는 소품처럼 사용된다. <달콤한 인생>에서 희수(신민아 분)가 선우(이병헌 분)의 마음을 흔들던 장면과 유사하다. 아수라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제공되는 잠깐 동안의 평범한 일상이 주는 안락함. <달콤한 인생>에서는 선우가 첼로를 연주하는 희수를 바라보고 일영이 요리하는 석현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안락감은 잠깐, 일영은 석현을 위해 처음으로 엄마의 뜻을 거스른다. 일영의 선택은 극에 갈등을 불어넣는다.  

▲ 일영에게는 채무자의 아들이었지만, 동시에 다른 세계를 보여준 역할을 한 석현. 그는 일영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온 '타인'이었다. ⓒ <차이나타운> 공식 페이스북

반면, 피도 눈물도 없던 '엄마'는 극이 진행될수록 일영을 의식한다. 기존 누아르 영화가 보스의 잘못된 판단으로 극적 클라이막스를 유도했다면, <차이나타운>에서는 엄마의 모성애가 극적 갈등요소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고 엄마의 아들이었던 치도(고경표 분)가 일영에게 전한다. 이 대사는 ‘엄마이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긴 하지만, 평소의 엄마라면 이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치도의 대사를 시작으로, 엄마는 관객들이 상상하지 못할 방법으로 가족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선택을 하면 할수록 엄마와 일영은 파멸로 달려갈 뿐이다.

창작에서 여성성의 쓸모

영화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누아르임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전형적인 여성 이미지는 그대로다. 엄마의 딸 중에 한 명인 쏭(이수경 분)은 기존 영화에서 여성이 소비되던 행태와 판박이다. 직접 '작업'에 나서지 않으며 쇼핑을 즐기고 한켠에서 매니큐어를 바르며 항상 사진관을 지킨다. 나약하고 수동적이며 평면적인 캐릭터다. 

<차이나타운>의 매력인 '여성 누아르'는 역으로 관객의 기대를 반감시킬 위험이 있다. 여성과 여성이 부딪칠 때 드러나는 색다른 긴장관계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영과 엄마의 행동은 남성 누아르 영화의 주인공들과 차이가 없다. 엄마를 다시 찾아가는 동안 일영은 만나는 장애물을 가차없이 폭력으로 돌파한다. 엄마도 자기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은 거침없이 처단한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야 했던 감독은 여성 누아르가 보여줄 주인공들의 행동방식을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기존 장르의 단순한 성반전(genderswap)물이라고 지적받는 이유다. 

▲ 노련한 연기와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김혜수와 매 작품마다 신인같지 않은 선택을 보여주는 김고은의 만남은 영화의 기대치를 높였다. 하지만 빈약한 설정과 남성 캐릭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여성 캐릭터는 아쉬운 점으로 꼽힌다. ⓒ <차이나타운> 공식 페이스북

<차이나타운>은 어느 정도 쓸모를 증명했다. 우선 '여성이 등장하는 영화는 흥행이 어렵다'는 통념을 깼다. 영화의 성공으로, 여성 영화라고 무조건 투자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또 하나 앞으로 제작될 영화들은 여성 캐릭터의 유의미한 활용을 고민해야 한다는 과제를 남겼다. 여성 캐릭터 발굴은 세계적인 경향과도 맞닿아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품인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작가 이브 엔슬러와 함께 작업했다. 현실적인 여성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매드맥스>의 여성 인물은 그 누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기 위해 노력한다. 뒤처지거나 '민폐 캐릭터'가 아니라 자주적인 한 인간으로 존재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소설이 다수를 차지하는 남성 작가에 적합한 방향으로 발전해왔다는 점을 지적하며, 여성들이 자유롭게 소설을 쓸 수 있게 되면 "기존소설을 부수고는 다시 알맞은 형태로 만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더 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스크린 속에서 '설치고 떠들고 생각한다'고 가정해보라. 세상이 달라진다. 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여성인물이 등장해 여성의 시각으로 사회가 가진 다양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여성'이 남성 조직폭력, 남성범죄 일색인 한국 영화에 새로운 여성 누아르 영화세계를 여는 키워드가 되었듯이. 남자나 가족 문제 말고 자신의 문제로 웃고 눈물짓는 진짜 여성을 스크린에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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