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여론의 공론장>에서 삐딱한 시선들을 만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힐튼 호텔. 검은 정장의 사내가 택시에서 내린다. 양 손에 큰 여행 가방을 든 꺽다리 사내는 프런트에서 방을 배정받은 뒤 투명한 엘리베이터를 탄다. 널찍한 방에 들어가 잠시 소파에 앉아보더니 벌떡 일어나 침대와 테이블을 모조리 벽 쪽으로 붙인다. 이어 정장을 훌훌 벗고 등산복에 등산화까지 챙겨 신고는 방바닥에 인조 잔디와 낙엽을 깔고 동굴 모양의 텐트를 친다. 노트북에 연결한 스피커에선 새소리가 들리고 텐트 안엔 양초가 타오른다. 버너에 불을 붙인 뒤 물을 끓여 티백을 우려내는 남자. 어두운 방, 텐트 안을 밝히는 촛불과 유리창 너머 빌딩의 불빛이 대조를 이룬다. 사내는 천천히 차를 마신다.

▲ 텐트 안에 켜놓은 촛불과 창 너머 고층빌딩의 불빛이 대조적이다. ⓒ 민보영

독일의 비디오 아티스트 다니엘 비어스테쳐(33)가 기획, 출연한 영상의 줄거리다. 지난 2007년 제작된 이 작품은 서울 서교동 ‘대안공간 루프’의 <여론의 공론장> 전시회에서 상영되고 있다. 차가운 도시 문명, 회색의 빌딩 숲을 벗어나 자연과 가까운 혼자만의 ‘아지트’를 갖고 싶은 현대인의 마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행동하는 예술인'의 작품 볼 수 있어

지난해 12월 10일 시작된 <여론의 공론장>은 현대 미술이 디지털 시대에 어떤 공공적 기능을 할 수 있는지 모색하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자본권력, 정치권력 등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술 공동체가 이상적인 민주사회를 향한 대안을 제시하자’는 게 참가자들의 뜻이라고 한다. ‘게릴라 걸스’ ‘나탈리 북친’ ‘그래피티 리서치 랩’ 등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해외 미디어아트 활동가와 국내의 ‘가짜잡지’ ‘옥인 콜렉티브’ ‘양아치’ ‘노순택’ 등 총 17개 그룹이 참여했다. 

▲ <여론의 공론장> 전시회 입구. ⓒ 민보영

홍익대 인근 골목에 자리한 전시장을 들어서면 거꾸로 세워놓은 빨간 피켓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얗고 차가운 것들을 위하여’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서울 종로구의 옥인아파트 철거과정에서 영감을 받아 결성됐다는 ‘옥인 콜렉티브’의 작품인데, 철거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힌다. 김화용 이정민 등 ‘옥인 콜렉티브’의 네 작가는 재개발과 철거가 일상이 된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하는 낡은 아파트가 보여주는 폭력성과 쓸쓸함’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 옥인 콜렉티브의 작품 '하얗고 차가운 것들을 위하여' . ⓒ 옥인 콜렉티브

지하 1층에서 상영되는 미국 작가그룹 ‘그래피티 리서치 랩’의 영상물은 건물 외벽 낙서를 통해 기성권력 혹은 권위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는 그래피티 장르를 뉴미디어와 결합한 것이다. ‘그래피티 분석 3.0(Graffiti Analysis 3.0)’이란 영상물에서는 사람이 기계에 매직으로 문자를 그려 넣으면, 이를 인식한 컴퓨터가 펜이 움직이는 곡선을 입체(3D)화면으로 보여준다. 또 ‘완벽한 첫 계절(The Complete First Season)’은 이 그룹의 활동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영상인데, 건물 벽을 캔버스 삼아 초록색 레이저 빔으로 그래피티를 그리는 과정 등이 소개된다. 이 그룹은 온라인을 통해 활동을 벌이면서 전 세계 시민들에게 ‘정부를 향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라’고 주문하고 있다.

▲ 그래피티 리서치 랩이 선보이는 기술. 강한 레이저 빔을 건물에 쏘면, 건물 외벽에 '그리듯' 글자가 쓰여진다. ⓒ 민보영

지난 85년부터 미국 사회의 남성중심주의를 고발해 온 그룹 ‘게릴라 걸즈’의 사진도 영사기를 통해 만날 수 있다. 고릴라 탈을 쓴 여성이 속치마 차림으로 관능적인 자태를 뽐내는 사진 등 성상품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비튼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이 그룹은 작품을 전 세계에 온라인으로 배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전시회에서도 사진들을 하얀 벽에 스크린 빔을 통해 투사했다.

▲ 전시장 벽면에 걸린 게릴라 걸즈의 삽화(위), 영사기에 투사한 게릴라 걸즈의 활동사진들(가운데, 아래). ⓒ 민보영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우리에게 무척 익숙한 사진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매향리의 미군사격장 문제와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미선이 효순이 사건’을 카메라에 담아 유명해진 사진작가 노순택의 작품들이다. 시위대와 경찰의 몸싸움, 피 흘리는 시위대의 모습 등을 포착했다. 방패 옷과 투구차림의 경찰들에게 옷이 반쯤 벗겨진 채 붙잡혀 저항하는 사내와 ‘YTN’ 카메라로 이를 촬영중인 사진기자의 냉철한 표정을 담은 사진도 눈에 띈다.

▲ 벽에 걸린 노순택 사진작가의 사진들(위). 관객이 노순택 사진을 감상하고 있다(아래). ⓒ 민보영

예술을 통해 공감하는 사회적 이슈들

전시장을 둘러보면 경제난에 내던져진 세계 예술인의 고민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미국의 ‘크리티컬 아트 앙상블’은 실직자들이 모여 재취업을 요구하며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작품 ‘타겟 디셉션(Target Deception)’을 내걸었다. 일본 작가 히카루 후지이는 ‘조용한 관계(Silent Linkage)’라는 동영상작품에서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급식소 풍경과 문제가정에서 자라난 아이, 직장에서의 폭력 등을 다루었다. 실직당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화면 분할 효과를 활용해 인상적으로 보여준 미국 작가 나탈리 북친의 ‘해고(Laid off)’도 발길을 멈추게 했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심효원 큐레이터는 “하버마스가 사회구성원들이 모여 공공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합리적 의사소통을 추구하는 공간으로 ‘공론장’을 정의한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예술가들이 사회 문제를 함께 얘기해보자는 뜻에서 ‘여론의 공론장’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전시회의 작품들은 만만하지 않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소비자’에게 어필하기 위해 친절하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상품’ 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각각의 작품들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이 세계에 잘못된 것은 없냐고. 너도 나와 같은 걸 느끼고 있진 않느냐고. 전시회는 오는 6일까지 계속된다. 관람비는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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