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실종자가족의 1년] ③ 일반인 3명 혈육의 간절한 염원

“처음에는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1년이 다 돼가네. 아직 이러고 있으니 참….”

지난 3월 22일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만난 이영호(47)씨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이씨는 세월호 실종자 이영숙(52)씨의 막냇동생이다. 그는 지난 1년간 팽목항과 서울 집을 오가며 돌아오지 않는 누나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지난해 4월 16일 참사 후 수색작업이 한창 진행될 때까지만 해도 누나의 주검조차 찾지 못할 것이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5월이 되자 불안이 스멀스멀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곧 찾을 것이란 기대가 더 컸다. 9월이 되니 ‘실종자 가족’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부쩍 커졌다. 294번째 희생자가 발견된 시점이 7월 18일이었고, 295번째 희생자가 인양된 게 10월 28일이었다. 그 후엔 한 명도 더 나오지 않았다. 수색은 11월에 공식 종료됐다. 

“5월에는 하루에 한 명이라도 나오다가 갈수록 소식이 없었지. 그런데 계속 기대가 가더라고. ‘언제까지 여기에 있겠다’고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없었어.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니깐 지금까지 온 거지.”

 

▲ 이영호 씨가 팽목항의 바다를 바라본다. ⓒ 조창훈

밥 냄새가 갑자기 역겨워진 나날

이영숙씨는 제주도 서귀포의 한 호텔 식당에 정규직 일자리를 얻어 이사를 가던 길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살던 인천의 살림을 정리해서 미리 짐을 부치고, 사고 당일은 마지막 이삿짐을 배에 싣고 떠났다. 이씨는 누나의 새 삶을 응원하면서 사고 사흘 전 약간의 돈을 송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누나가 세월호를 타고 간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뉴스에서 세월호 사고 소식이 나오자 누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이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사람은 “누나가 아침에 전화로 배가 많이 흔들린다며 불안해하더라”고 전했다. 두 번째 친구는 “어젯밤 인천항에서 누나 짐을 세월호에 실어다 줬다”고 말했다. 이씨는 급하게 진도로 달려갔다.

진도체육관에서 경황없이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점심 무렵이었다. 간이식당 사이를 걷는데 갑자기 밥 냄새가 역겹게 느껴졌다. 누나의 생사를 모르는데 밥때가 됐다고 챙겨 먹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날 이후 이씨는 밥을 제대로 먹은 날이 없다. 밥 대신 술을 넘기고, 탈진하면 링거(영양수액)를 맞았다. 이씨는 누나 영숙씨가 오래전 이혼 한 뒤 3년 전까지 함께 살며 ‘누나 밥’을 얻어먹었다. 건축회사에 다니는 이씨를 위해 누나는 매일 아침 일찍 정성 어린 밥상을 차려주었다. 이씨에게 누나는 ‘따끈한 밥’이었다.

폐 절제 수술에 우울증까지...무너진 가족의 일상

진도체육관에서 이씨의 일상은 단순했다. 정부 브리핑을 듣고 팽목항에 다녀오고, 가끔 선체 수색작업을 하는 바지선에 올랐다. 그러던 7월 30일, 몸이 이상했다. 어지럽고 숨쉬기가 힘들어 의료진을 찾았더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그 길로 광주 전남대 병원에 입원해 8월 14일과 19일 두 차례 폐 절제 수술을 했다. 27일 만에 퇴원한 뒤 다시 진도체육관으로 돌아왔다. 의사가 운동을 많이 해서 폐활량을 늘려야 한다고 했지만 그럴 경황이 아니었다. 지금도 많이 움직이면 숨이 찬다. 그러나 이씨는 “몸이 아픈 것보다 정신적으로 힘든 것이 더 고통스럽다”고 했다.

“사람이 무서워. 우울증 치료를 했는데 (지금은) 병원 안 가고 약도 안 먹으니 더 상태가 안 좋아져. 폐 수술하러 입원해 있을 때 심리치료를 받았는데 지금은 안 받아.”

 

▲ 권오복 씨와 이영호 씨가 사는 팽목항 임시 주택에는 약을 모아두는 박스들이 있다. ⓒ 조창훈

이씨는 참사 후 일을 그만뒀고,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만날 여유도 없었다. 서울에 가면 중랑구에 있는 집에서 쉬다가 가끔씩 팽목항에 들러 다른 실종자 가족인 권오복(61)씨의 간이주택에서 잠을 청한다.

셋째이자 막내인 이씨보다 둘째 누나 이영엽(50)씨의 심리적 상태가 더 안 좋다. 영엽씨는 진도체육관에서부터 언니 영숙씨가 꿈에 나타난다고 말했다. 전라남도의 지원으로 전남대 병원에 두 달 동안 입원했다가 현재는 광주 집에서 쉰다. 이 때문에 이씨는 “둘째 누나는 트라우마(사고 후유 정신장애)가 심해 진도체육관이나 팽목항에 못 오게 한다”고 말했다.

부모의 이혼으로 3살 때 어머니 이영숙씨와 헤어진 아들(30)은 한때 실종자가족 대표를 맡기도 했으나 지금은 부산 집에 내려가 다시 회사에 다니고 있다. 그는 어머니가 제주도에 정착하면 따라가서 살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새 삶 꿈꾸며 제주로 향하던 가족 덮친 참사 

실종자 권재근(57)씨 일가는 세월호 참사의 최대 피해가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씨 가족은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도에 감귤농사를 지으러 이사 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이삿짐을 싣고 가족 네 명 모두 세월호에 올랐다. 권씨와 아들 혁규(8)군은 실종 상태고 베트남 이주여성인 권씨의 아내 한윤지(29)씨는 숨진 채 발견됐다. 참사 다음 날 진도체육관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는 사진이 찍힌 막내딸(6)만 살아남아 고모 집에 맡겨졌다. 현재 권씨의 형 오복씨 등 형제들은 서울과 팽목항 등에서 실종자 인양을 기다리고, 베트남에서 온 한씨의 아버지와 여동생은 경기도 안산의 사회복지시설에 임시 기거하고 있다. 

동생과 조카 찾기를 기다리는 권오복씨는 지난해 추석을 진도체육관에서, 올해 설은 팽목항 임시주택에서 보냈다. 사고 이후 진도 밖으로 나간 건 단 3일이다. 그것도 세종시에서 열린 해양수산부 회의에 참석하느라 나간 것이 두 번, 제수 한윤지씨의 유해를 임시 안치할 때 한 번이다.

 

▲ 실종자 권재근 씨의 형 권오복 씨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 조창훈

권오복씨는 언론 인터뷰를 많이 한 편이다. 사고 초기에는 ‘인터뷰에 응하는 유족이 적어서’, 이제는 ‘세월호에 대한 여론이 식어가서’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한다고 말했다. 언론에 잘 나서는 권씨에 대해 일부에선 ‘보상을 바라나’하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이에 대해 권씨는 “동생 가족이 모두 박살 났는데 가만히 지켜봐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지난달 7일 <단비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권씨는 정부가 지난 1일 세월호 배 보상금을 불쑥 발표한 데 대해 분개했다. 국민 성금까지 넣어 액수를 부풀리는 등 정부의 태도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권씨는 또 정부 여당이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뿐 선체 인양과 진상규명에 대한 의지가 없다고 성토했다. 지난해 세월호 수색을 종료한 건 (선체) 인양을 위한 수색중단이었는데 ‘파란 기와집 사람들’은 세월호를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권씨는 최근 정부가 선체인양계획을 발표한 데 대해서도 “또 연기를 피우는 것”이라며 “한 번 속았지만 두 번 속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랑 새누리당은 작년에 눈물 담화문으로 재미 많이 봤어. (7.30 재보궐) 선거에 이겼잖아. 세월호 인양은 올해 (4.29 재보궐) 선거 카드로 또 써먹는 거야. 정부 부처 어디든 인양 힘들다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선체인양은 또 보류할 거고) 내년 총선에서 (선체인양 카드를) 또 사용할 거야.”

생계 포기하고 조립식 간이주택에서 새우잠

기약 없는 팽목항 생활이 이어지면서 권씨의 생계는 ‘파탄 날 지경’이 됐다.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에 집이 있는 권씨는 제조업 회사에 다니다가 사고 이후 그만뒀다. 6개월 실업급여를 받았고, 지난해 10월까지 정부가 팽목항에 거주하는 가족에게 월 120만원 씩을 지원해줬지만 이젠 아무 수입이 없다. 그밖에 각종 지원금은 권씨처럼 실종자와 부모자식이 아니라 형제지간인 경우 받지 못한다. 인터넷 보안회사에 다니던 아들이 최근 회사를 그만두는 일까지 겹쳐 권씨의 살림은 말이 아니게 됐다. 

팽목항에는 실종자 가족용 간이주택과 쉼터 및 식당, 성당, 분향소 등 진도군에서 관리하는 10여 개의 조립식 주택이 있다. 권씨는 5평 남짓한 원룸형 간이주택에서 산다. 안산시와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는 화장실 및 세면시설, 식당 등은 따로 떨어져 있다. 원래 진도는 남쪽 지방 섬답게 겨울에도 따뜻한데, 지난겨울은 유독 추워 수도가 얼기도 했다.

“여긴 방에 있어도 외풍에 귀가 시릴 정도야. 한쪽으로 누워 자다 추우면 반대편으로 누워 자. 그래도 안 되면 이불 뒤집어 써야 했어.”

 

▲ 5평(15㎡) 가량의 팽목항 임시 주택. ⓒ 조창훈

권재근씨 가족 중 혼자 살아남은 막내딸은 서울에서 고모(52)와 함께 산다. 지난해까지 놀이방에 다녔지만, 올해부터 유치원에 간다. 재근씨의 큰 형 방일(65)씨는 “아이가 고모와 고모부를 ‘고모 엄마’, ‘고모 아빠’라 부르며 지낸다”며 “아직 엄마가 죽고 아빠를 찾지 못했다는 말을 하지 못했는데 애도 대충 알 것이라 짐작한다”고 말했다.

“사실 주변 사람들이 가장 무섭습니다. 막내딸이 워낙 유명한 탓에 어딜 가나 관심을 받아요. ‘살아남아 신기하다’고 머리 쓰다듬어주고 ‘안타깝다’고 신경 써주는 게 한편으로 걱정됩니다.”

권씨 가족들은 사고 전에 활달했던 아이가 한동안 늘 풀이 죽어있고, 자다가 깨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경우도 많아 걱정이 많았다. 다행히 요즘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한다.

 

▲ 팽목항에는 전라남도에서 세운 임시주택이 10여채가 있다. ⓒ 조창훈

베트남에서 온 가족도 기약 없는 기다림

한윤지씨의 아버지와 여동생인 판반짜이(63), 판록한(26)씨는 지난해 4월 19일 베트남에서 왔다. 진도에서 한씨의 시신을 확인하고 임시로 안치한 뒤 현재까지 경기도 안산시가 연결해준 안산 다문화 나눔센터에서 살고 있다. 권방일씨는 “베트남 가족도 유가족인데 정부의 지원보다 민간단체나 고마운 분들의 도움으로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판반짜이씨는 사위와 외손자를 찾을 때까지 국내에서 기다리겠다는 생각인 것으로 알려졌다. 판씨 부녀는 일주일에 한 번 안산온마음센터(안산정신건강 트라우마센터)를 다니는 등 안산에서 주로 지내다가 주말에는 서울로 가 권양을 만난다. 판록한씨는 안산 인근의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기도 한다. 지난 3월 중순경부터 판씨 부녀는 광화문의 세월호 유가족 피켓시위에 참여했다. <단비뉴스> 취재진은 안산 온마음센터를 통해 판씨 부녀 인터뷰를 몇 번 요청했지만 “언론에 많이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답변을 들었다.

 

▲ 권오복 씨가 동생 재근씨와 조카 혁규군을 그리워하는 깃발을 펼쳐보이고 있다. ⓒ 조창훈

세월호 희생자 중 일반인은 사망자 30명, 실종자 3명으로 단원고생 사망자 246명, 실종자 4명에 비해 소수였기 때문에 사회의 관심도 상대적으로 덜 받은 편이다. 그래서 희생자 가족들도 알게 모르게 서운한 부분이 있었다고 한다. 이영호씨는 “어디 말할 데도 없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일반인 희생자는 제주도에 놀러 갔다는 시선이 있어. 일반인 중엔 생계를 위한 사람도 많아. 용달차 운전사도 많았고 이삿짐 같은 짐을 실은 사람도 많았어. 선적한 내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보상 하나 제대로 못 받은 사람도 많지.”

하지만 일반인 실종자의 가족들 역시 최대의 바람은 학생, 교사 가족과 마찬가지로 ‘조속한 세월호 인양’과 ‘가족 찾기’, 그리고 ‘참사의 진상규명’이었다. 이영호씨는 “뼛조각이라도 찾아야 속이 풀리지 않겠느냐”며 “아직 누나가 바닷속에 있다는 생각만 하면 끔찍하다”고 말했다. 권오복씨는 “왜 국가정보원이 세월호에 관여하고 있었는지 등 별의별 의혹이 다 풀리지 않았다”며 “인양을 해서 사고의 증거들을 다 확보해 참사원인을 정확하게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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