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실종자가족의 1년] ② 단원고 양승진·고창석 교사

매해 꽃망울이 터지는 3월 하순을 유백형(55ㆍ주부)씨는 늘 기다렸다. 결혼기념일인 22일과 남편의 생일인 23일이 이어져 부부에게 둘 만의 축제기간과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달 22일과 23일은 예년과 달랐다. 지난해 4월 경기도 안산 단원고 학생들과 수학여행을 떠났던 남편 양승진(56·사회) 교사가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씨는 세월호 사고로 실종상태인 남편의 생일을 챙겨주기 위해 지난달 전남 진도군 팽목항을 찾았다. 눈부시게 화창한 하늘 아래, 남편이 좋아하던 인절미와 미역국으로 생일상을 차려 놓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양 교사는 1983년 경기도 부천시 부천여중에서 처음 교편을 잡았다. 교사생활 10년차에 안산시의 원곡고로 전근했고 이어 성안고, 양지고를 거쳐 2013년 단원고에 부임했다. 양 교사는 단원고에서 인성생활부장을 맡았다. 흔히 말하는 학생주임이었지만 무서운 선생님이 아니라, 학교 뒤뜰 농장을 가꿔 학생들과 감자, 당근 등을 나눠먹는 다정한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방학마다 가족여행 다니기를 좋아하고 식탁에 둘러앉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길 즐기는 자상한 아버지기도 했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가 친구시라 조카 돌잔치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어요. 덩치도 큰 사람이 다방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해요.” 

양 교사가 강단에 선 첫 해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1남 1녀를 낳아 대학까지 보내고 편안한 노후를 기대하는 중년 부부가 됐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한 결혼기념일은 서른 번째에서 멈추고 말았다. 

안산 분향소와 광화문을 떠날 수 없는 삶

팽목항으로 내려가기 전날인 지난달 21일, 유씨는 아직 찬 밤공기를 버티기 위해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농성 중인 세월호 유가족 일행을 찾아갔다. 준비해 간 열 댓 조각의 노란 인절미를 쉼터에 있던 10여 명의 가족과 자원봉사자들에게 나눠줬다. “남편이 좋아하던 음식이니 남기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인절미는 순식간에 동났다. 

▲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있다. 참사 후 반년 이상의 수색작업에도 불구하고 9명의 주검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 조창훈

1년 전 참사 소식을 듣고 진도체육관으로 달려간 뒤 하염없이, 처절하게 기다리는 생활을 해야 했던 유씨는 지난해 11월 12일 수색종료 선언 후 팽목항에 마련된 임시거처로 옮겼다. 그곳에서 올해 1월까지 생활하다 안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남편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지는 집에서 잠들 수가 없어 한동안 친정과 언니집을 전전했다. 지금은 안산 집에 머무르면서 안산분향소와 광화문 농성장을 오가고 있다. 

하지만 매일 농성장에 나가진 못한다. 몸이 성한 데가 없기 때문이다. 진도체육관에서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다 몸이 굳어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너무 많이 울다보니 눈이 아파 안과치료도 받아야 했다. 잠을 이루지 못해 정신과 도움도 받았다. 제대로 먹지 못하니 잇몸이 약해져 치과에도 가야 했다. 온 몸의 진이 빠져 영양수액도 수시로 맞았다. 지금도 그런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유씨는 “계속해서 이곳저곳 얻어맞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진도체육관에는 보건복지부가 의료진을 파견해줬지만 수색이 종료되고 체육관에서 철수한 후에는 병원진료도 모두 자비로 받고 있다. 게다가 올해 91세인 친정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경기도 안성에 있는 요양원에도 일주일에 몇 번은 가야하는 형편이다. 83세인 노모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양 서방을 찾았냐’고 물을 때마다 눈물이 나고 몸이 아파요.”

유씨는 사고 전에 집 근처 마트의 반찬코너에서 9년여 근무하면서 생활비를 보탰다. 지금은 그만뒀다. 웃는 낯으로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어서다. 요즘은 남편의 기본급여와 한푼 두푼 모아온 노후자금으로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유씨는 아무리 일정이 힘들고 생계가 어려워도 지원 얘기는 꺼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배·보상 문제에만 관심을 쏟지만, 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실종자를 찾고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씨의 아들(26)은 관세사 시험에 1차까지 합격했지만 2차 시험을 두 달 앞두고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2차 시험에 실패했다. 아버지처럼 선생님이 되겠다며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딸(28)도 사고 후 공부에 집중할 수 없어 시험을 포기하고 어머니 곁을 지켰다. 유씨는 ‘아버지가 진짜 바라는 건 이게 아닐 것’이라며 딸을 설득해 다시 서울 노량진 고시촌으로 보냈다. 아들은 대기업 공채를 준비해 지난 1월 취업에 성공했다. 안산 집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회사라 아들은 아침저녁으로 어머니를 보살핀다. 유씨와 아들은 취직을 ‘아빠가 주신 선물’이라 여긴다고 한다. 

사진으로만 만날 수 있는 남편

유씨는 집에 있는 방 하나를 남편의 사진으로 장식했다. 검붉은 피부에 건강미가 드러나는 신랑과 부드러운 표정의 신부가 나란히 선 결혼식 사진, 부천중학교의 꽃나무 아래에서 찍은 가족사진, 사고 1년 전 다녀 온 안면도 가족여행 사진 등이 걸려있다. 유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방을 둘러보며 사진 속의 남편을 만난다. 

▲ 지난 해 방한 당시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을 특별히 위로했던 프란체스코 교황의 모습이 안산 분향소 내 세월호 유가족 대기실에 걸려있다. ⓒ 조창훈

유씨의 시간은 2014년 4월 16일에 멈춰있다. 거리에서 손팻말 시위를 하기 위해 늘 두터운 옷만 골라 입고, 더 이상 화장은 하지 않는다. 새로 아침을 맞아도 어떤 새로움도, 즐거움도, 행복도 기대하지 않는다. 

“1년 동안 먹을 것도 못 먹고 잠도 안 오고 불안하고 가슴도 계속 두근두근하고...”

남편의 주검이라도 찾고 싶다는 유씨의 귀에 세월호 진상조사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를 ‘세금도둑’이라고 비난하고 유가족을 ‘돈 받아 내려 떼쓰는 사람들’로 비난하는 일부의 망언은 비수처럼 꽂힌다. 유씨는 “사람이라면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해줘야지, 옆에서 지켜주지 못할지언정 비방하는 이들은 살인범보다도 더한 괴물”이라고 분개했다.  

지방으로 자취를 숨긴 교사 가족도 

양 교사와 함께 실종상태인 고창석(40) 교사는 ‘양복입고 다니는 체육선생님’으로 불렸다. 실습시간을 제외하면 언제나 옷과 머리를 단정하게 정돈했다. 학생들은 왁스로 머리칼을 세운 고 교사를 ‘고슴도치’에 비유하며 ‘또치샘’으로 불렀다. 생존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 교사는 사고 당시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학생에게 벗어주고 다른 학생들을 구조하러 나섰다. 바다수영도 잘했던 고 교사였지만 결국 배에서 나오지 못했다. 

고 교사의 아내(36)도 교사다. 그녀는 남편의 주검을 찾기 위해 진도체육관에서, 팽목항에서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나날을 보냈지만 수색이 중단되자 지난 연말 안산 생활을 접고 다른 지방으로 내려간 뒤 전근을 신청했다.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 교사가족 대표인 김성욱(56·단원고 고 김초원 교사 아버지)씨는 “고 교사의 아내는 (초등학생인 2명의)아이들이 자란 후 세월호 참사와 아버지 실종에 혹시라도 상처받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 교사의 아내는 현재 휴직계를 낸 상태인데 한 지인은 “다시 교편을 잡으면 수학여행을 가야 할 터인데 복직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어렵게 접촉한 고 교사의 아내는 “(선체를) 인양해서 남편을 찾아 장례도 치러주고 제사도 지내야 한다”라며 “인양은 내 인생의 목표”라고 말했다. 고 교사의 아내는 현재 가족을 제외한 지인들과 연락을 끊고 있다고 말했다. 

▲ 3월 28일, 홍대입구역 9번출구 걷고싶은 거리에서 실종자 가족과 대학생들이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 김현우

세월호에 탔던 단원고 교사는 14명이었다. 강민규 교감을 비롯한 3명만 생환했다. 강 교감은 사고 이틀 후인 18일, “나에게 모든 책임을 지워 달라, 시신을 찾지 못하는 녀석들과 함께 저승에서도 선생을 할까”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양 교사와 고 교사는 다른 7명의 학생, 일반인과 함께 아직도 뭍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선체 인양은 우여곡절 끝에 정부가 오는 9월부터 시작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실종자 수색과 사고 진상 규명을 위해 유가족들이 간절히 희망하던 작업이 늦었지만 결정된 것이다. 아직 정부가 인양 방침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지난달, 양 교사의 아내 유씨는 ‘선체를 반드시 온전하게 인양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또 하나의 불안을 털어 놓았다.

“남편은 말 그대로 증발해 버렸어. 인양해서 남편 장례도 치러주고 제사도 해야죠. 아직 남편 사망신고도 못했어. 그런데...만약 인양했는데도 내 남편이 없으면 어쩌지….”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