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북서울에 온 케테 콜비츠’ 판화전

독일의 대표적 판화가인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 작품 전시회가 지난 2월 3일부터 오는 19일까지 서울 중계동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다. 콜비츠의 대표작 56점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회는 소설가 서해성씨가 기획했고 (사)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와 일본 오키나와의 사키마미술관이 공동 주최했다.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 WOW 서울 홈페이지
콜비츠는 ‘계급을 배신한’ 예술가였다. 지금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 해당하는 동프로이센에서 유복한 중산층 가정의 딸로 태어났지만 노동자 등 어려운 사람들의 삶에 평생 주목했다. 목사였던 외할아버지와 사회주의에 몰입한 아버지에게서 소외계층을 향한 인간애와 사회적 책임감을 배웠다고 한다. 남편 칼 콜비츠도 베를린 노동자들을 돌보던 의사로서 아내의 헌신하는 삶에 동참했다. 콜비츠는 10대 시절부터 미술 수업을 받았고 ‘현대 독일 판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막스 클링거(1857~1920)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담은 것이었다.

이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콜비츠의 작품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콜비츠는 1차대전에서 두 아들 중 둘째를, 2차대전에서는 손자를 잃었다. 전쟁과 절규, 죽음이 판화에 담기기 시작했다. 작품 속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도 그려 넣었다. 300여개 작품 중 자화상이 100개가 넘는데, 동시대의 수많은 부모, 조부모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자식과 손자를 잃은 비탄이 투영됐다. 콜비츠는 이것이 ‘시대정신의 반영’이라고 자신의 일기에 썼다. 콜비츠 자신도 ‘전쟁의 희생자’이자 ‘예술소재’였던 것이다.

▲ 전시전 팜플렛 표지. (도안: 콜비츠 자화상, 에칭)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콜비츠가 오키나와를 거쳐 서울에 온 이유

서해성 작가는 지난달 28일 <단비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콜비츠의 작품이 시공을 초월해 민중의 설움과 눈물을 대변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국내 전시를 추진했다”고 말했다. 콜비츠의 작품은 전쟁과 빈곤, 분단의 아픔을 겪은 독일을 거쳐, 30만 인구 중 12만 명이 2차대전 당시 희생됐던 일본 오키나와에서도 전시됐다. 오키나와는 강제징집된 군인과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여성 등 한국인 1만여명이 목숨을 잃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면 지금 서울은 어떤가. 세월호참사 유가족, 해고에 저항하는 고공농성자 등 비탄에 빠진 이들의 비명이 가득한 곳이다. 서 작가는 “그들의 처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 이번 전시회의 기획 의도”라고 밝혔다. 이번 전시작 중에 청동조각상 ‘피에타’가 있는데 서 작가는 “(아들 예수의 시신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이) 세월호의 고통을 껴안고 살아야 하는 우리 자신과 시대의 고통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 피에타 (1937-38, 청동상). 콜비츠에게 피에타는 종교적 구원이 아니었다. 1차대전에서 아들을 잃은 그녀에겐, 피에타는 자식의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맞이한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예수의 얼굴은 아들 피터를 닮았다.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서 작가는 판화가 ‘민중에게 바치는 예술’이라고 설명했다. 인쇄나 사진술이 부족했던 20세기 초, 일단 판을 만들면 몇 번이고 찍어낼 수 있는 판화는 다른 예술과 달리 서민들도 즐길 수 있는 장르였다. 콜비츠의 판화는 특히 채색이 아닌 흑백 작품으로, ‘위선 없는 시선을 통해 삶의 진정한 가치를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초기에 비교적 제작이 쉬운 에칭(금속판화)과 석판화를 그리다가 후기로 갈수록 힘겹게 나무를 깎고 파내야 하는 목판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서 작가는 “콜비츠의 판화는 불편함의 위대함”이라며 “힘겨운 작업 속에서 삶의 진정한 고통과 현재적 진실을 만나게 했다”고 해석했다.

▲ 차에 치인 아이 (1910, 에칭). 아이의 육신은 하얗게 식었다. 가난한 노동자 부부도, 가난한 마을 사람들도 슬픔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산 자들의 육신도 새하얗고 야위었다. 죽은 자 살아남은 자 모두가 유령 같다.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 죽음과 여인 (1910, 에칭). 죽음이 여인의 삶을 휘감고 있다. 여인은 빠져나가려 몸부림친다. 아이는 괴로워하는 어미의 젖가슴에 애처롭게 매달린다. 죽음은 이렇듯 산 자에게도 고통을 남긴다. ⓒ 서울 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한국에서도 판화는 1970~80년 독재정권 치하에서 진실을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했다. 당시 민중의 고통을 표현하고 정치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을 담아낸 판화가 오윤, 이철수 등이 콜비츠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 가내노동 (1925, 석판). 노동자는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한다. 그 어느 시대의 노동자도 이 점은 다르지 않다. 지그시 감은 두 눈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밥을 벌고자 그저 버티고 있다. ⓒ 서울 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 친구로서의 죽음 (1934, 석판). 전후 독일에 남겨진 전리품은 폐허와 빚더미 뿐이었다. 하루하루가 어찌나 힘겨웠는지 빈민은 찾아오는 죽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맞이한다. ⓒ 서울 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회에 걸린 콜비츠의 작품들은 부드러운 에칭과 석판화 위주의 초기작품 부터 투박한 목판에 전쟁과 굶주림 등을 강렬하게 묘사한 후기작품까지 고루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어 당겼다. 10대 학생부터 50대 가정주부까지 다양한 관람객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작품을 감상했다.

▲ 관객 20여 명이 도슨트의 안내를 받아 콜비츠전을 관람하고 있다. ⓒ 이성훈

콜비츠 평전을 읽고 전시회를 찾았다는 이은숙(56·주부)씨는 “콜비츠의 자화상들이 기억에 남는다. 판화 속 콜비츠는 항상 정면을 바라보더라. 힘든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더라”고 말했다. 이씨는 이어 “세월호 아이들이 생각나 눈물이 났다”며 “괴로운 세상을 외면하고 나만의 행복 속에서 홀로 힐링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럽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지연(22·여·대학생)씨는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사회가 불행하게 만든 사람들이 보였다”며 “얼마 전 빈자들의 벌금을 대출해주는 장발장은행 소식을 들었는데, 그런 도움에 관심을 갖겠다”고 말했다.

▲ 사람들 (1922-23, 목판). 이 작품은 <전쟁 7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간다. 평화, 재산, 목숨까지 앗아간다. 품속에 안긴 아이가 유일한 희망을 상징한다. ⓒ 서울 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 지원병들 (1922-23, 목판). 이 작품은 <전쟁 7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콜비츠는 맨 앞에 해골을 그려 ‘사회적 타살’로서의 전쟁에 형태를 부여했다. 젊은이들은 ‘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전장에 끌려간다.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저들은 눈동자가 없다. 전쟁의 광기에 빠졌음을 뜻한다. 유일하게 눈동자가 그려진 두 번째 병사는 콜비츠의 죽은 둘째 아들이다. ⓒ 서울 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반면 산책 나온 길에 둘러봤다는 원희성(19·고등학생)군은 “가난과 고통은 옛날 얘기 아닌가. 달동네나 판자촌이 떠올랐지만 그토록 힘든 분들이 우리나라에 아직도 있을까, 공감하기 어렵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원숙(37·주부)씨는 “시대의 발전과정을 표현한 것 같다”며 “한국도 독일도 옛날엔 가난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정도”라고 소감을 밝혔다.

전시의 의미 살릴 친절한 설명 아쉬워

작품 자체는 풍성했지만, 예비지식이 부족한 관람객에 대한 배려 등 소통노력에는 아쉬움이 있었던 전시회였다. 도슨트(전시안내원)의 설명을 듣지 못한 일반 관람객들로서는 전시기획의 취지나 각 판화작품의 기법, 콜비츠의 삶과 한국 민주화역사의 연결지점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서해성 작가는 “기획에 수천만원이 드는 등 시민단체로서는 엄청난 부담이었지만 무상급식처럼 ‘문화적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 무료로 관람하도록 했다”며 “사실 이렇게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들은 국립미술관이 발굴하고 기획해서 시민들이 예술을 만나고 호흡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케테 콜비츠 판화전은 오는 19일까지 평일 10:00~20:00, 토·일요일 10:00~19:00에 관람할 수 있다. 도슨트의 안내는 오전 11시와 오후 2시 등 매일 두 차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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