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실종자가족의 1년] ⓵ 단원고생 4명 부모들의 비탄

지난달 24일 오전 9시, 세월호 참사로 실종된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 박영인(당시 2학년)군과 허다윤, 조은화 양의 가족 등 10여 명이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 안산분향소 앞에 대기 중이던 미니버스에 몸을 실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안산분향소를 출발하는 이 버스가 두 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곳은 서울시 종로구 효자동 청와대앞 분수대 광장. 다윤양의 어머니 박은미(45)씨는 지난 2월 26일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 분수대 광장과 광화문 광장에서 손팻말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이날은 박씨의 몸 상태가 평소보다 더욱 좋지 않았다. 신경섬유종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박씨는 참사 후 상태가 급속히 나빠져 뇌와 양쪽 귀에 종양이 생겼고 한쪽 귀는 아예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됐다. 의사는 집에서 쉬어야 병의 진행속도를 늦출 수 있다고 말했지만 박씨는 “차가운 바닷속에 있는 딸을 생각하면 도저히 집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은화양 어머니 이금희(46)씨가 버스에서부터 박씨를 부축해 분수대 광장까지 함께 걸었다. 이날 박씨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겨운 모습이었다. 고개를 계속 바닥으로 떨궜고, 주저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청와대 분수대 광장에는 중국인 관광객이 많았다. ‘아이들을 찾아달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고 있던 이씨에게 경찰이 다가와 자리를 옮겨달라고 말했다. 관광객들에게 불편을 끼친다는 이유였다. 박씨는 분수대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로 발을 옮겼다. 한 달 가까이 들고 다닌 손팻말은 군데군데 너덜너덜해져, 붙여놓았던 아이들 사진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씨는 팻말 앞에 쪼그려 앉아 사진을 매만지며 나지막이 말했다. “(배)안에서 이렇게 움직였어야지….” 

▲ 손팻말 속 아이들의 사진을 고정시키고 있는 조은화양 어머니 이금희씨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허다윤양 어머니 박은미씨. ⓒ 박고은

“밤새도록 팻말을 들고 있으면 아이들을 품에 돌려줄까?” 
“여기 드러누우면 쳐다보기라도 해줄까?” 

청와대 쪽을 보는 게 무섭다고 하면서도 두 어머니는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1시간 30분가량 번갈아가며 손팻말을 들었다. 같은 시간 다른 희생자 가족들은 광화문광장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다.  

길가는 유치원생만 봐도 딸 생각이 사무쳐 

박씨와 이씨가 광화문광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노란 원복을 입은 유치원생 10명 정도가 둘씩 손을 잡고 지나갔다. 두 어머니는 아이들에게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이씨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수첩에서 은화양의 어릴 때 사진을 꺼내 보며 눈물을 흘렸다. 평소에도 방금 본 유치원생들이 같은 시간에 지나가는데, 그때마다 딸이 생각나 견딜 수 없다고 한다. 

“유치원 애들 보면 우리 은화 어릴 때가 생각나. 화장한 아가씨들 보면 우리 은화가 커서 화장했으면 얼마나 예뻤을까 상상하고 그래. 그냥 아직 수학여행 가 있는 거 같아….” 

▲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박영인군 아버지 박정순씨와 어머니 김선화씨가 팻말 시위를 하고 있다. ⓒ 박고은

오후 1시 30분,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 영인군의 아버지 박정순(48)씨와 어머니 김선화(44)씨는 각각 남색과 흰색 운동모자를 눌러쓴 채 ‘영인이를 엄마, 아빠 품으로’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요즘 박씨 부부도 매일 시위를 하러 광화문 등에 나오는 것이 생활의 거의 전부다. 두 사람은 지난해 4월 16일 이후 줄곧 전남 진도군 진도체육관에서 영인군이 나오길 기다리다가, 수색이 공식 중단된 11월 18일 절망감만 안고 안산의 집으로 돌아갔다. 박씨는 다니던 회사에서 편의를 봐줘 11월까지는 월급을 받았지만, 아들을 못 찾는 상황이 지속되자 사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이렇다 할 수입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박씨는 참사가 일어나기 전과 오늘을 ‘천국과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사고 당시 재수를 하고 있던 영인군의 형(21)을 생각하면 박씨의 마음은 더욱 미어진다. 박씨 부부가 혼이 나간 채 진도체육관 등에 가 있는 동안 영인군의 형은 동생과 함께 지내던 방에서 혼자 슬픔과 외로움을 견뎌야 했다.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웠고, 지난 연말 입시에서 실패했다. 영인군 형은 올해 역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 연말에는 군대에 갈 생각이라고 한다. “그냥 잘 견뎌주기만 바랄 뿐이죠.” 박씨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인군은 아버지에게 친구 같은 아들이었다고 한다. 박씨는 외출할 때마다 뒤를 따라 나서던 작은아들의 모습이 자꾸 눈에 아른거린다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3년 전 영인군과 설악산 대청봉을 다녀왔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단다. “영인이가 다시 한 번 꼭 같이 가고 싶어 했는데….” 박씨에게 ‘다시’라는 말은 가장 가슴 아픈 단어가 돼버렸다.

아픈 육신, 고립된 삶, 가혹한 하루하루

단원고생 4명을 포함, 9명의 실종자들 가족 가운데 중 몸이 성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다윤양의 아버지 허흥환(51)씨는 아침에 일어나면 다리를 구부릴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일어나자마자 30분가량 스스로 왼쪽 다리를 주무른다. 허리디스크도 문제지만, 왼쪽 다리를 충분히 풀어주지 않으면 버스를 타러 나가기도 어려울 정도다. 허씨 부부는 아침 7시쯤 일어나 9시 안산분향소에서 서울행 버스를 탄 뒤 오전 10시 40분부터 12시까지 청와대 분수대 광장 시위, 오후 1시 30분부터 3시까지는 광화문광장 시위를 하고 오후 5시쯤 안산으로 돌아온다. 집에 도착하면 거의 죽은 듯이 쓰러진다고 한다. “오늘도 고생했네”하며 서로 아픈 곳을 주물러 주며 위로하기도 한다.  

다윤양의 언니 서윤(21)양이 참사 후 부모와 함께 저녁을 먹은 날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올해 대학교 2학년이 된 서윤양은 부모가 생업을 포기하고 동생 찾기에 나선 이후 밤 12시까지 시간제 일을 하며 용돈을 벌어 쓰고 있다. 집에 와서 부모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하루 30분 정도에 불과하다. 

 좀처럼 힘든 내색을 하지 않던 서윤양이 며칠 전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아 허씨 부부가 찾아 헤맨 일이 있다. 딸의 친구들까지 나서서 갈만한 곳을 다 수소문했는데, 서윤양은 해가 진 지 한참 지난 줄도 모르고 다윤양의 학교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고 한다. 서윤양은 힘들 때마다 동생이 다니던 학교나 안산분향소에서 혼자 마음을 달래고 돌아왔다고 한다. 첫째 딸은 혼자 고통을 삭이고, 둘째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 현실. 허씨는 평화롭던 예전, ‘오늘은 어느 놈이 마중 나올까’ 기대하며 퇴근하던 그 길이 너무 그립다고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 박씨는 “두 딸이 모두 하루 중 아버지의 퇴근 시간을 가장 손꼽아 기다렸다”고 말했다. 

“다윤이가 애교가 많았죠. 맨날 붙어가지고 매달리고...그 때 좀 더 안아주고 그랬어야 했는데 피곤하단 이유로 그렇게 못 해줘서….” 

▲ 지난 24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허다윤양 아버지 허흥환씨가 세월호 인양 및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 박고은

허씨를 포함한 실종자 가족들은 정부가 ‘인양도 수색의 한 방법’이라고 한 말을 믿고 기다렸다고 한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선체 인양을 하지 않고 참사의 진상규명에도 의지를 보이지 않아 다시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해양수산부는 현재 “인양에 대한 어떤 결론도 나오지 않았다”며 “공론화 과정을 거친 후 인양을 결정하겠다”고만 밝히고 있다. 허씨는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게 어떤 것도 없다는 게 가슴이 아팠다”며 “지금 할 수 있는 게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밖에 없어 거리에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내 새끼가 세월호 안에 잠겨 있는 거 뻔히 아는데 부모들이 어떻게 살아요. 이건 애만 죽이는 게 아니에요.” 

은화양의 어머니 이씨는 지난 1년 간 실종학생 부모들의 인간관계는 대부분 끊겼고, 사회로부터도 고립된 상태에 놓였다고 말했다. 특히 실종자 가족들을 외면하는 국가가 가족들을 고립시키고 있다고 분개했다. 이씨는 세월호 참사 발생 직후 진도체육관에서 희생자가족 명찰이 없다는 이유로 ‘선동꾼 아줌마’로 몰리기까지 했다. 권은희 새누리당 의원은 당시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유가족인 척하면서 선동하는 여자가 있다”며 이씨를 겨냥하는 글을 올렸다. 나중에 잘못된 내용이었음이 밝혀지면서 권 의원이 가족들에게 사과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아직까지 연락은 없다. 은화양 아버지 조남성(56)씨는 “당시엔 정신이 없어서 아무런 법적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며 “사과를 의도적으로 안하고 세월호에 대한 여론을 식히려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조씨는 전국을 돌며 선체 인양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하다가 심혈관계 이상 등으로 몸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 그래서 이달부터는 아내 이씨가 대신 전국을 돌며 서명을 받을 예정이다.  

온전한 배 인양만이 마지막 희망 

지난달 28일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 홍대입구역 9번 출구. 조남성 씨와 ‘세월호대학생연석회의’ 소속 학생들이 선체 인양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세월호 아직 안 끝났어요?”라고 물었다. 자원봉사자들은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이 아직 시작도 안됐어요”, “대통령 시행령이 반쪽짜리예요” 등 열심히 답했다.

조씨는 세월호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게 가장 두렵다고 말했다. 여론이 식기를 기다리며 시일을 질질 끌다 결국 온전한 선체 인양을 무산시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는 것이다. 조씨는 “정부가 일부러 시간을 끌어 유가족들을 지치게 하고, 여론을 ‘먹고사는 문제’로 돌리고 있다”며 “이대로 가다간 세월호를 온전한 채로 인양하지 못하고 함수와 함미로 나눠 (반토막을 내서) 인양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가족들에겐 온전한 선체 인양을 통해 배 안 어딘가에 있을 아이들을 찾는 게 유일한 희망이다. 은화양 어머니 이씨는 지난달 24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인양과 특조위 출범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가족들이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라”며 “바다에 남겨진 가족들 찾아서 마무리 할 수 있게 꺼내달라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이런 가족들을 특히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세월호 인양에 1천억원 이상, 1년 이상이 걸린다는 등 비용을 내세우고 세월호 특조위에 대해 ‘세금도둑’이라고 비난하는 등 부정적 여론을 조성하는 여권 정치인들이다. 박정순씨는 “국민이 바다에 잠겨 있는데 비용을 따지는 정부가 올바른 정부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광화문 광장에 마련되어 있는 추모 공간. ⓒ 박고은

박씨 부부는 이따금씩 전남 진도군 팽목항을 다녀온다. 지난 2월 5일 영인군 생일 때 다녀왔고 지난달 1일에는 또 다른 실종학생 남현철군 생일을 맞아 또 팽목항을 찾았다. 영인군 생일날 박씨 부부는 미역국과 케이크를 준비해 팽목항 방파제에 조촐하게 생일상을 차렸다. 실종자 부모들이 팽목항까지 가는 이유는 따로 ‘찾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실종자 부모들은 차마 분향소에 발을 들일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은화양 어머니 이씨는 “내가 우리 은화를 (바닷속에서) 못 데려왔는데 어떻게 내 딸 영정사진을 보겠냐”며 울먹였다. 안산분향소에는 9명의 실종자 사진이 검은 띠를 두르지 않은 채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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