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곽영신

      

▲ 곽영신 기자
마태복음에는 ‘포도원의 비유’가 나온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 품꾼들에게 은화 1데나리온을 지급하기로 약속하고 그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낸다. 그 후에도 일거리를 찾지 못한 품꾼들을 들여보내는데 그 중에는 오후 5시에 들어간 이도 있었다. 문제는 모두에게 1데나리온의 일당을 주었다는 점이다. 아침부터 일한 이들이 항의하자 주인은 “애초 1데나리온을 약속했고 내 돈 내 맘대로 쓰는 게 뭐가 잘못됐냐”고 응수한다.    

마태복음은 이 이야기를 ‘천국’에 빗댄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일찍 신앙을 갖고 더 많이 수고한 자와 나중에 신앙을 갖게 돼 상대적으로 덜 수고한 자가 둘 다 천국에 가게 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인류에게 천국을 허락하는 것은 어차피 신의 뜻이니 몽매한 우리 인간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신의 ‘공정’이다.

언뜻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특히 자유주의 시장논리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한 자가 더 나은 보수를 챙겨가는 것이 당연하다. 일류대학을 나와 해외 MBA를 따고 대기업에 입사한 자나, 사법고시를 통과해 변호사가 된 자는 억대 연봉을 받더라도 이치에 어긋난 게 아니다. 그러면 반대로 많이 배우지 못한 자나, 일류 직장•직업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자, 또는 저 포도원 품꾼처럼 자신을 써주는 이가 없어 시장을 배회할 수밖에 없는 자는 적은 몫으로 만족하거나 굶는 게 합당한 걸까?

다시 포도원 얘기로 돌아가면, 우선 오랜 시간 일한 사람이 주인에게 ‘일찍’ 발견된 것은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늦은 시각까지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도 일찍 발견되었다면 더 긴 시간 노동을 했을 것이다. 제 의지가 아니라 우연한 기회로 부를 거머쥔 사람들, 즉 고위 공직자나 재벌 자녀처럼 뒷배경이 화려해서 사회 상층부에 머물 기회를 얻는 사람들도 이와 같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의 부를 싹쓸이 해가는 것을 공정하다 할 수 있을까?

더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먼저 포도원에 들어간 이는 어차피 주인과 1데나리온을 약속했다. 받을 돈을 받은 것이다. 문제는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몫을 주었기에, 먼저 들어간 이가 상대적으로 억울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생각하는 공정의 의미는 더 수고한 자에게 더 주는 것이 아니라, 덜 수고한 자에게도 공평하게 주는 것이다. 사회에서 낙오된 자, 실패한 자, 기회를 얻지 못한 자를 그냥 내버려 두지 말고 최대한 공평하게 대우하는 것이 진정한 공정 사회라는 뜻이다.  

‘공정한 사회’가 온 나라의 화두가 되고 있다. 그러나 외교관 자녀가 특혜로 외교부에 입성하는 것을 막고, 공직사회에서 뇌물과 비리를 추방한다고 해서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이미 ‘기회균등의 원칙’만으로는 보정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양극화 사회가 되고 말았다. 누진과세 등을 통한 강력한 소득재분배 정책 없이는 소득양극화를 해소할 수 없다. ‘공정한 사회’는 얼핏 보기엔 ‘불공정한 수단’을 통해 성취될 수밖에 없다. ‘기회균등의 원칙’을 넘어 ‘차등의 원칙’이 강조돼야 하는 이유이다. 그 차등은 물론 약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경우에만 허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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