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저널리즘 상실'의 또 다른 이름

지난해 2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개봉했다.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에서 일했던 반도체 노동자의 백혈병 산재실태를 그린 실화영화다. 7월에는 ‘공공재 민영화’ 화두에 맞춰 외국 1세대 민영화 국가들의 실패를 담은 <블랙딜>이 나왔고, 10월에는 세월호 사건 당시 제 구실을 하지 못했던 정부와 언론의 작태를 고발한 <다이빙 벨>이 개봉했다.

이 외에도 지난 한 해 동안 <제보자>, <나의 독재자>, <카트>, <송곳> 등 실화를 바탕으로 한 미디어콘텐츠들이 쏟아졌다. 플랫폼은 TV, 스크린, 인터넷 등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우송대 방송미디어학부 박성우 교수는 특히 스크린에서 돋보이는 이러한 현상을 ‘실화영화 홍수 현상’이라고 명명했다.

▲ 지난 한 해 동안 실화를 기반으로 한 미디어콘텐츠들이 우후죽순 쏟아졌다. ⓒ 각 영화 공식사이트 및 페이스북

언론의 주요기능을 대신하는 ‘실화콘텐츠’

‘실화콘텐츠’는 실존인물과 실제 사건을 다룸으로써 그 사회적 현안과 이어지는 함의를 대중에게 제공한다. 관객들은 <또 하나의 약속>과 <카트>, <송곳>을 보면서 노동현실 개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블랙딜>을 통해  민영화의 함정을 깨달으며, <제보자>를 보고 언론의 책임과 표현의 자유를 숙고한다. 정부와 국민의 합의가 필요한 정책이나 사용자와 근로자의 상생이 필요한 노동문제, 사회의 부패를 견제해야 하는 저널리즘의 역할 등 사회적 의제가 실화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로 발산되고 있다. 언론의 대표적 구실인 의제설정기능과 공론기능을 ‘실화콘텐츠’가 대신하는 것이다.

정부와 기업에 대한 날 선 비판과 함께 사회조정기능을 이행해야 할 언론의 불구화로 ‘실화콘텐츠’가 양산되고 있다. MBC는 2년 전 시사교양국을 분리한 데 이어 지난해 10월에는 교양국을 아예 폐지해버렸다. 사회부패를 막는 ‘방부제’ 구실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지난해 5월 김시곤 보도국장이 정치권의 개입을 폭로한 이후에도 KBS는 여전히 집권정부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종편 JTBC나 상업방송 SBS의 신뢰도를 높게 평가하는 국민의 반응은 ‘반전’이 아니라 국내 언론현실의 ‘기승전결’이 되어 버렸다.

▲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서치뷰> 및 인터넷방송 <팩트TV>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공영방송보다 종편채널과 상업방송의 신뢰도가 높다. ⓒ 조민웅

‘감시견(watchdog) 기능’을 상실한 저널리즘에겐 기대할 것이 없다. 진실에 대한 갈증이 증폭된 대중은 결국 직접 정부와 기업에 맞서고 진실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그 방편으로 대중은 ‘실화콘텐츠’를 제작하고 소비한다. 부실하다 못해 부재한 언론 덕분에 미디어콘텐츠 시장이 성장한 꼴이 됐다.

대중들이 실화콘텐츠를 제작·소비하는 이유

실화콘텐츠 양산은 언론의 편파적 보도행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주류언론은 사회적 현안을 다루기는 하지만, 어젠다 세팅, 프레이밍, 프라이밍 기능을 절묘하게 오용(?)하는 곡예를 부린다. 지난 12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이후 지상파에서는 ‘정윤회 뉴스’를 찾아보기 힘들다. MBC <뉴스데스크>는 비선논란 대신 통진당 해산 뉴스에만 23꼭지를 할당했다. KBS와 SBS는 각각 10꼭지였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역사적 결정”이라는 대통령의 말에 맞추어 언론은 정권의 비선 의혹을 앞서서 덮어주었다. 권력에 편승한 주류언론은 ‘의도적으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린다. 자신의 삶을 왜곡시키는 언론에 맞서 대중은 새로운 ‘아고라’를 찾고 있다.

새로운 ‘아고라’ 형성에 앞장서고 있는 이들은 영화감독, 만화가, 방송프로듀서, 독립언론인 등 예술가적 지식인들이다. 영화 <제보자>를 제작한 임순례 감독은 "당시 사건의 진위가 아니라 언론의 역할과 우리 사회의 숨어 있는 제보자에 대해 집중하려 했다"며 언론이 추구해야 할 가치를 짚어냈다. 웹툰 <송곳>의 최규석 작가는 “노동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완화하는 것이었다”며 시사적 작품을 만든 이유를 밝혔다. 그들은 ‘시민’으로서 언론이 마련한 ‘아고라’에서 국가정책이나 사회적 현안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표출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독자와 시청자가 주인”이라는 말만 내세울 뿐, 신문과 방송에선 ‘시민저널리즘’이 제대로 구동하지 않는다. 결국 자신들의 영역에서 영화감독은 실화영화를 만들고, 만화가는 실화만화를 그린다. 정부, 기업, 언론이 보호해야 할 사회적 가치를 외면하자 대중은 ‘실화 기반 콘텐츠’를 제작·소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 ‘실화콘텐츠’는 영화, 출판, 공연을 넘어 메모리얼 전시 공간을 창조하는 영역까지 확장했다. ⓒ 황용운(프레시안 협동조합 조합원)

지난 12월  제주도에서는 ‘세월호 기억 공간 프로젝트’ <re:born>이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했다. 크라우드 펀딩이란 '대중으로부터 자금을 모은다'는 뜻으로 소셜미디어나 인터넷 등의 매체를 활용해 자금을 모으는 투자 방식을 가리킨다. ‘실화콘텐츠’는 영화, 출판, 공연을 넘어 메모리얼 전시 공간을 창조하는 영역까지 확장했다. 실화콘텐츠가 양산되는 것은 사회적 현안에 대한 토론,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을 감수하지 못하는 현실이 변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다. <re:born> 기획자 황용운 씨는 “4·16 이후 우리가 셀 수 없이 외쳤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아직 듣지 못했다”며 대중들로 하여금 한국 언론의 부재를 실감케 한다.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신문 없는 정부와 정부 없는 신문 중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나는 후자를 택하는 데 잠시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언론이 사실을 호도하거나 가려진 진실을 파헤치지 않고 대중의 삶을 계속 왜곡시킨다면 대중은 ‘신문없는 정부가 차라리 낫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신문 없는 정부가 꾸리는 사회에선 여전히 ‘실화콘텐츠’가 언론의 자리를 갈음할 것이다. 사라져가고 있는 저널리즘을 언제까지 시민과 미디어콘텐츠가 대신할 수는 없다. 주류언론은 언제쯤 언론의 사명에 충실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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