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의 미디어 속 이야기]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청와대 주변에서 터진 일들을 두고 조선시대 궁중암투를 보는 듯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그건 조선 역사 전체를 욕보이는 말이다. 조선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암투는 있었지만 중국과 달리 내시나 승지가 국정을 농단한 사례가 아주 드문 나라였다. 내시는 정사에 개입할 수 없었고, 승지(承旨)는 말 그대로 임금과 신하 사이에서 뜻(旨)을 이어(承)주는 구실에 그쳤다. 임금과 신하가 단둘이 만나는 독대를 금했고, 신하가 임금을 만나면 사관이 모든 대화를 기록했다. 사관은 요즘으로 말하면 청와대 출입기자일 텐데 기록의 공정성과 객관성 면에서는 저널리즘의 표준을 목숨 걸고 지킨 이들이니 기자들이 본받을 만하다.

독대는 선조와 영의정 유영경, 효종과 이조판서 송시열의 기해독대, 숙종과 좌의정 이이명의 정유독대 등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이들 독대는 결국 정쟁의 불씨가 됐고 독대를 한 신하들은 후대 임금인 광해군, 숙종, 경종의 사약을 받았다.

정도전이 만들고 세종·성종 때 굳어진 독대 금지의 전통을 깬 것은 이승만과 박정희였다. 이승만은 특무대장 김창룡을 수시로 만났고,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주요 인적 정보를 독점했다. 유능한 정보기관이 있는 나라는 많지만 사람들의 뒤를 캐 최고권력자에게만 직보하는 선진국은 없다.

▲ 일러스트 | 경향신문 김상민 기자

조선시대 내시나 승지는
국정농단 사례 드물어
 
소신파 관료 다 쫓아내고
나라 다스릴 수는 없다
 
‘문건유출’ 틀 갇히지 말고
비선·비서정치 파헤치길

‘너그러운 정사 못 펴니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 없네’
 
연산군도 말년에 반성의 빛
대통령 사과·국정쇄신해야

이명박 정권에서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던 최시중·이상득·박영준도 결국 감옥에 갔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처럼 집권 초기부터 ‘비선정치’와 ‘비서정치’의 문제가 동시에 심각하게 대두한 적은 없었다. 행정부처 위에 비서실이 있고 비서실 위에 비선이 있으면 부처가 책임지고 일할 수가 없다. 프랑스는 아예 대통령 비서실이 연락 업무만 맡게 돼 있다.

더 큰 문제는 보수·진보언론이 함께 비판하는데도 박 대통령이 그 심각성과 원인을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말하는 것만 봐서는 사태파악이 안 되고 해결능력이 없는 데다 측근 감싸기에 급급해 문제를 더 키우고 있다. 인식능력이 모자라거나 측근들이 사태를 호도하지 않고서는 벌어지기 힘든 상황이다.

언론은 모처럼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친여 매체는 전례로 보아 언제 국정농단의 내용보다는 문건 유출이 문제라는 청와대와 검찰 프레임으로 돌아설지 모른다. 몇몇 신문이 특종기사로 수사를 견인하려 하지만, 중앙일보는 정윤회씨와 청와대의 주장을 비중있게 다루고 그들을 두둔하는 칼럼을 내보내기도 했다.

검찰을 동원해 비선과 비서들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발상은 최악의 선택이다. 그들은 더 기세등등해지겠지만 정치인과 관료집단은 더 몸을 사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검찰에 출두하는 사람치고 정윤회씨만큼 당당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집권 2년차에 전면적으로 불거진 정치 파탄의 폐해는 앞으로 3년간 국민에게, 종국에는 대통령 자신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환관정치는 충신을 내치고 간신을 들끓게 만든다. 돌이켜보면 제 목소리를 내던 진영, 유진룡 등 소신파 장관들은 다 쫓겨났다.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은 기초연금 공약 불이행 등 복지정책 후퇴와 관련해, 유진룡 장관은 문화체육관광부 인사를 둘러싸고 청와대와 갈등을 벌이다 축출됐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언론이 잘못된 인사로 지적한 예술의전당 고학찬 사장, 아리랑국제방송 정성근 사장, 한국관광공사 변추석 사장과 자니윤 감사는 유 장관이 ‘전문성 부족’ 등을 이유로 임명에 반대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대선 때 박 대통령을 도운 공적이 있을 뿐이다.

그 밖에도 박효종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이나 이인호 KBS 이사장처럼 뉴라이트 또는 박정희를 찬양한 인물들을 방송·문화 분야 기관장으로 대거 발탁했는데, 이는 국민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기관들이 공정성을 훼손하더라도 정권에 봉사해주길 청와대가 원했기 때문일 터이다. 한겨레 6일자 보도에 따르면 김기춘 비서실장이 온 이후 ‘성향’에 대한 검증이 굉장히 강해졌다고 한다.

승마협회를 감사한 문화부 체육국·과장은 박 대통령이 직접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며 경질을 요구했다. 항간에 “장차관 인사는 비서들이 하고 국·과장 인사는 대통령이 한다”는 비아냥이 떠도는 건 청와대의 인사개입이 얼마나 부적절한지를 말해준다. 측근정치 비판에 공감하는 국민이 76.4%에 이른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이해하기 힘들었던 수많은 인사 패착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 이번 문건 파문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비선이나 비서의 개입에 따른 것이건 ‘수첩인사’를 비서들이 검증하지 못한 것이건 결과는 매한가지다.

문건 파문의 와중에도 인사 패착은 계속되고 있다. ‘영업의 귀재’로 통하던 이순우 우리은행장이 박근혜 대통령후보 후원 모임인 ‘서금회’(서강금융인회) 출신에게 밀리는 걸 보고 은행원들은 영업보다 줄 서는 데 혈안이 되지 않을까? 이명박 정권에서 고려대 출신이 금융계를 장악하더니 이 정권에서 서강대 출신이 최고경영자 자리를 줄줄이 꿰차는 것을 우연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있을까?

박근혜 정권의 최대 약점은 대통령 자신의 정치 행태에 있다. ‘인사 참사’만 하더라도 대부분 지나치게 보안을 강조하다가 빚어진 일이었다. 보안에 대한 그의 집착은 ‘촉새가 나불거려가지고’라는 말에 나타나지만, 밀실 인사는 공론장에서 활발해야 할 인사검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박근혜 인사’의 또 하나 기준은 의리다. 박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만큼 흉한 일도 없을 것”이라고 썼을 만큼 의리를 인간관계의 금과옥조로 여긴다. 의리는 좋은 덕목이지만 다른 모든 기준을 제쳐두고 그것만 앞세우는 집단은 조직폭력배들이다.

한국사회에 희화적인 ‘의리 열풍’이 불고 있는 건 박근혜 정권 출범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부모를 모두 잃고 칩거하던 시절 그는 아버지 측근들이 유신을 비난하는 ‘배신’ 행위에 한을 품었으리라. 그러나 정당성이 전혀 없는 유신체제에 대해 뒤늦게나마 반성하는 것을 배신으로만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는 유신헌법을 기안했던 김기춘씨를 발탁하고 15년간 자신을 모셔온 정윤회씨와 ‘문고리 3인방’을 여론의 질타에도 내치지 못하고 있다.

김재원·박대출 의원 등이 유진룡 장관이나 조응천 비서관 등을 ‘배신 프레임’으로 엮은 것은 ‘주군’의 심경을 잘 읽었기 때문이리라. 문제는 일부 보수언론이 이 프레임을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경향신문도 ‘콩가루 된 정부’(6일자) 기사에서 유진룡 장관과 청와대 주장을 대비시킨 뒤 문화부 내 분위기를 전하면서 ‘유 전 장관에 대한 호감이 컸으나 이번 일을 계기로 “적절하지 않은 처신” “문화부의 앞날이 걱정”이란 의견이 많았다’고 보도했다.

‘레이저광선’을 쏘는 박 대통령 통치 2년 만에 쓴소리를 하는 이들은 여권 실세에서 모두 배제된 걸까? 7일 청와대 오찬에서 ‘각하’ 칭호가 부활하고 ‘진돗개가 실세’라는 대통령 농담에 박장대소하는 장면을 보면서 따라 웃은 국민은 많지 않았으리라. 아첨꾼의 특징은 별로 우습지 않은 윗사람 농담에도 크게 웃는 것이다.

용렬하고 못난 임금일수록 측근을 중시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뒤 논공행상을 하면서 문신 86명, 무신 18명을 공신에 봉했는데, 문신 중에도 내시가 24명이었다. 일선에서 목숨 걸고 싸운 김덕령 같은 의병장에게는 공신 직첩 대신 사약을 내린 반면 도망치는 자기를 의주까지 모시고 다닌 근신들을 어여삐 여긴 것이다.

연산군이 신하들을 마구 죽여 간언을 하는 이가 없게 됐을 때 목숨 걸고 극간을 한 이는 내시 김처선이었다. 그는 연산군이 쏜 화살을 맞고 다리가 잘리면서도 쓴소리를 했다. 사실 조선의 내시는 정사에 개입하지 않다가도 이런 충성심을 보인 이가 많았지만 사극들이 혈손 없는 내시들을 종종 간신처럼 묘사해 명예를 훼손한 적이 꽤 있다.

이른바 ‘찌라시’ 유출로 청와대에 파견됐던 사정기관원 20여명이 축출된 데 이어 이번에도 공직기강비서관실을 범죄집단으로 몬다면 사간원을 아예 폐지하고 사헌부를 축소한 연산군과 무엇이 다르랴. 연산군은 성군의 자질이 있었으나 비명횡사한 어머니의 한풀이를 하다가 국정을 그르쳤다.

폭정을 저지른 연산군은 말년에 반성의 빛을 보이기도 했다. 뛰어난 시인이었던 연산군은 이런 시구도 남겼다. ‘용렬한 자질로 왕위에 있은 지 십년인데, 너그러운 정사 못 펴니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 없네.’

포악한 연산군에 견준다면 박 대통령 스스로 억울할 것이다. 그가 국민에게 사과하고 국정을 쇄신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이유는 우리가 그래도 연산군 때보다는 나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희망고문'일지라도.


* 이 기사는 <경향신문>과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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