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농업이슈] 제주도 올레길 답사기

제주 여행은 하늘에서부터 시작된다. 비행기가 구름 속을 뚫고 내려간다 싶더니 제주도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제주도는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푸른 산과 푸른 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천혜의 관광지다. 푸른 빛 일색에 눈이 시릴까 봐 가끔은 기암괴석이 검은 자태를 드러낸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산록이 밋밋하게 펼쳐지다가 파도에 부딪히기 전에 제주시와 국제공항이 들어설 만한 평지를 이루었다. 해안선을 끼고 달리던 비행기가 계류장에서 멎자 내리는 사람은 거의가 관광객. 유배된 이에게는 죽음의 땅이나 다름없던 제주도가 한 시간 남짓 비행하면 닿는 최고의 관광지가 된 것이다.

걸어가면 볼만한 게 많은 섬

제주에서도 행선지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요즘은 올레길이 대세다. 억새 사이로 불어오는 해풍을 맞으며 들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돌담길로 진입하고 문득 해안가로 빠져 나오기도 한다. 빌딩 사이 보도블럭만 밟고 다니던 도시인에게는 모든 게 편안하고 정겨운 풍경일 수밖에 없다. ‘한걸음씩 걸어가면 볼만한 것이 많지만 서둘러가면 별 볼일 없다’는 말은 올레길을 걸을 때 실감하게 된다.

▲ 해안도로 옆으로 바다가 펼쳐져 있다. 멀리 산방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 박동국

공항을 빠져 나와 한 시간쯤 버스를 타고 찾은 곳은 서귀포 모슬포항. 올레길 11코스부터 걷기 위해서다. 제주도에는 숙박시설이 다양하다. 특히 게스트하우스는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찾아온 여행객에게 싼 값에 '세어하우스' 형식의 방을 제공한다. 싼 가격뿐 아니라 밤마다 펼쳐지는 '라운지 파티' 문화도 즐길 수 있다. 밤 8시가 되면 1층 라운지에 모여 생면부지 사람들과 술잔을 부딪히며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밤새 젊음의 향연이 이어진다.

▲ 모슬포항에 있는 한 게스트하우스에는 매일 저녁 생면부지 여행객들이 모여 제주 술을 마시며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 박동국

"태국이나 베트남 등 동남아보다 제주도가 훨씬 아름다운 거 같아요."(강지훈 32·전북 정읍)

모두에게 여행의 이유가 있었다.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제주도에 온 이유'를 한 명씩 말하는 기회를 가졌다. 제주도 ‘광팬’을 자처한 강지훈씨는 올레길 코스 종주를 꿈꾸며 올해만 3번째 제주에 들렀다. 일주일 전 사표 내고 제주에 왔다는 20대 여성은 하와이 현악기인 우쿨렐레 하나를 들고 있었다. 한 달 더 제주도에 머물다가 일자리를 찾아볼 예정이란다. 한국인 여자친구와 방학을 맞아 놀러 왔다는 데이비드(24·독일 플렌스부르크)는 서툰 한국말로 "한잔 해~"를 외치며 흥을 돋우었다. 서귀포 밤 하늘을 공유하던 그들은 내일이면 각자 목적지를 찾아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내게도 여행의 이유가 있었다

내게도 여행의 이유가 있었다. 6년 전, 해병대 복무 시절 모슬포항에 두 달간 파견을 나온 적이 있다. 아침 구보마다 멀리 보이던 산방산은 내 가슴을 더 뛰게 만들었다. 그러나 군부대 담에 막혀 눈으로만 절경을 구경해야 했다. 군부대란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닫힌 공간이었다. 결국 한번도 산방산에 들르지 못하고 육지로 복귀했다. 나는 그때 "전역 후 꼭 다시 산방산을 찾겠다"며 스스로에게 약속했고, 이번 여행으로 약속을 지켰다. 

산방산을 찾기 위해 아침 일찍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이른 시간일수록 제주의 생동감을 만끽할 수 있는 까닭이다. 새벽에 출항했다가 돌아온 배들이 항구에 정박하자 어부들은 배 옆구리에서 쉴 새 없이 생선 상자를 꺼냈다. 항구를 벗어나니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해안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제주의 아침 하늘을 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먼 바다에서 물질하는 제주 해녀와 해안가에서 어패류를 캐는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 '져냥(절약)정신'으로 자연산 홍합을 캐고 있던 김기목 할머니가 방금 딴 홍합을 보여주고 있다. ⓒ 박동국

"뭐 캐고 계시는 거예요?"

"홍합이요. 한국 토종 홍합이에요. 집에 가서 먹을라고. '져냥'하기 위해 캐는 거예요."

'져냥'이 무슨 뜻일까? 자신을 제주도 토박이라고 소개한 김기목(70·서귀포 안덕면)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절약정신의 제주도 방언’이라고 했다. 그는 육지 사람이 반가운지 사투리 몇 개를 더 가르쳐줬다.

제주도에서 챙겨오는 것

제주도의 특이한 풍광은 사람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동물원에서나 보던 말이 풀밭에 아무렇게나 방목되고, 모난 돌에서조차 태초의 신비함을 느낄 수 있다. 올레길을 따라가다 보면 송악산 산책로에 자연스레 접어드는데, 그곳에는 탐스럽게 피어난 수국이 끝없는 초원을 수놓고 있다. 정상까지 20분쯤 걸어 올라가면 대한민국 최남단 섬 마라도와 가파도가 보인다.

▲ 제주 조랑말은 아무렇게나 방목되어 있고, 섭돌조차 태초의 신비함을 느끼게 한다. 수국은 서귀포 초원을 수놓았다. ⓒ 박동국

사방을 둘러보아도 수평선뿐인 제주도는 바다가 인간의 삶과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남자들은 거친 바다를 헤치고 고기를 잡아야 했고, 해녀들은 ‘물질’로 살림을 꾸려야 했다.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로 척박한 땅이었지만, 시원스럽게 펼쳐진 바다를 보고 있으면 지금 제주도는 자연의 혜택을 넉넉히 누리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올레길을 따라 걸은 지 5시간만에 산방산 기슭에 닿았다. 산방산은 설화 속 주인공인 '설문대 할망'이 빨래방망이를 잘못 놀려 한라산 봉우리를 치는 바람에 그 봉우리가 잘려 날아와 산방산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설문대 할망' 전설을 생각하며 다시 산방산을 올려다보니 제주도는 더 아름답고 신비로워 보였다.

▲ 산방산은 아름답고도 신비한 매력을 가진 산이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한 지 6년 만에 산방산을 찾았다. ⓒ 박동국

오늘도 나라 안팎의 관광객들이 제주도로 밀려온다.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밑지는 섬이 바로 제주도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때로는 깊은 생각에 잠기면서 제주도를 걸어보라. 하늘과 바다, 산과 들, 모든 것이 푸른 제주도에서 챙겨오는 건 ‘푸른 생각’일지도 모른다.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지역농업이슈보도실습] 강좌의 산물입니다. 대산농촌문화재단과 연계된 이 강좌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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