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보니] 드라마 '미생' 리뷰

상상이 만든 ‘나의 <미생>’

한 작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 상상이다. 독자는 작가가 작품 속에 남겨 둔 빈 곳에 상상을 채워 넣는다. 인물의 외모, 걸음걸이, 잠버릇 등 작품에서 표현되지 않은 부분을 상상한다. 채워 넣을 공간은 무궁무진하고 상상은 자유다. 같은 인물이라도 전혀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해석의 기준은 오로지 ‘나의 상상’이다. 그렇게 한 작품은 ‘나의 것’이 된다.

▲ tvN 새 금토 드라마로 만들어진 <미생>이 지난 17일 첫 방송을 탔다. ⓒ tvN <미생> 공식누리집

웹툰 <미생>을 봤다. 주인공 장그래에게 빠져들었다. 18살까지 오로지 바둑에 전념했지만, 프로 입단에 실패했다. 그 원인을 ‘열심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안 해서인 걸로 생각하겠다’고 말하는 장그래. 웹툰에서는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바둑을 포기했다고 생각하면 너무 아프기 때문에 본인이 열심히 하지 않아서라고 둘러대며 장그래는 눈물을 흘린다. 그가 겪었을 아픔을 상상했다. 작가가 대사 몇 마디와 눈물 한줄기로 표현한 채 남겨둔 그 무수한 ‘아픔의 감정과 기억’을 나의 상상으로 채워 넣었다. 입단에 실패할 때마다 더 처져 보였을 부모님의 어깨와 막상 바둑돌을 놓고 제 꿈을 포기하니 밀려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상상의 디테일은 내 경험에서 따왔다. 첫 번째로 들어간 대학에서 성적을 망쳐 정학을 받고 도망치듯 군입대를 했던 나. 친구들에 비해 혼자만 뒤처지는 기분에 한없이 작아지곤 했다. 괜찮다고 위로해주시는 부모님의 얼굴에 가득했던 주름을 보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나의 <미생>’은 그렇게 탄생했다.

‘나의 <미생>’이 ‘드라마 <미생>’과 공감하기

웹툰 <미생>이 드라마로 재탄생했다. tvN의 새 금토 드라마로 단장돼 지난 17일 첫 방송을 탔다. 한 작품은 자신의 상상으로 작품을 본 독자들의 숫자만큼 재생산되는 법. 웹툰 <미생>에 감정이입해 재해석한 뒤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독자들은 ‘나의 미생’이 어떻게 드라마로 만들어졌을지 궁금하다. 나 역시 드라마 <미생>을 통해 ‘나의 미생’을 공감받고 싶었다. 내가 채워 넣은 상상의 공간을 드라마 <미생>은 어떻게 채워 넣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일치하면 내 상상력이 보상받게 될 것이다. 설사 나의 상상과 다르다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나의 미생’이지 ‘나만의 미생’은 아니지 않은가. 어떠한 작품도 그 자체로는 완전할 수 없다. 완전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 그것을 보고, 듣고, 읽고, 자신의 상상력으로 해석해 그 작품을 완성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 '학생이든 직장이든 그들 속에 섞이고 싶다'고 말하는 장그래의 독백은 내가 상상했던 장그래의 아픔과 일치했다. ⓒ tvN 화면 갈무리

드라마 <미생>을 봤다. 1화에서 장그래(임시완 분)가 ‘열심히 안 해서인 걸로 생각하겠다’고 독백하는 장면이 나왔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우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도망치듯이 나오는 장그래. 이어지는 장면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그동안 공부했던 바둑책들을 정리해 한국기원에서 나오는 장그래의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부모님에 대한 그의 죄책감 그대로였다. 2화에서 밤샘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그래가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등교하는 학생들을 마주 본 채 걷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장그래가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철이 든 이후에 한 번도 섞여본 적 없던, 그들 속에 섞이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서’라고 독백한다. 장그래는 군 복무 시절 동료들의 대학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움츠러들었던 나 자신이었다. 장그래가 느꼈을 아픔의 빈 곳에 내가 채워 넣었던 상상은 공감받았고 내 아픔의 기억도 위로받았다.

공감 없는 감정이입엔 ‘우리’가 없다

내 상상이 미치지 못한 곳에서 공감하기도 했다. 바둑은 혼자 하는 일이다. 회사 일은 다르다. 나와 동료가 ‘우리’가 돼 함께 해야 한다. 혼자 하는 일에 익숙했던 장그래에게 ‘우리’가 돼 함께 일하는 건 쉽지 않다. 오상식(이성민 분) 과장은 다른 인턴의 실수를 뒤집어쓴 장그래를 위해 “우리 애만 혼났잖아!”라며 술주정한다. 웹툰에선 장그래가 오 과장에게 감사인사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드라마에선 집에 돌아온 장그래가 오 과장의 ‘우리 애’라는 말을 곱씹은 뒤 노트에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라고 적고 고개를 든다. 그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그렇다, 회사 일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장그래는 그렇게 세상과 만난다.

▲ 오 과장이 "우리 애만 혼났잖아!"라며 술주정하는 모습. 드라마 <미생>은 '우리'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 tvN 화면 갈무리

우리는 종종 혼자라는 절망에 빠지곤 한다. 치열한 경쟁을 요구하는 사회일수록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든다. 비교됨과 동시에 구별되고, 그 과정에서 나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외톨이가 된다. 외톨이 현상은 공감의 부재에서 온다. 세월호 참사에 분노하는 ‘감정이입’은 하면서도, 철저한 진상규명이 경제보다 우선이라는 것엔 ‘공감’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 ‘우리의 세월호’는 ‘유가족의 세월호’가 되고 말았다.

감정이입과 공감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감정이입은 ‘대상의 의견이나 생각을 이해한다’며 자신과 타인의 구분을 전제하지만, 공감은 ‘대상의 의견이나 생각을 똑같이 느낀다’며 타인과의 동일시를 전제한다. 공감 없이 감정이입만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없다. 드라마 <미생>이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웹툰보다 강조한 건 세상을 외톨이 천지로 만드는 이 시대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다. 지금 우리에겐 혼자를 만들어 내는 ‘감정이입’이 아니라 우리란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공감’이 필요하다.

<미생>, 여전히 열려있는 미래

바둑에서 ‘미생’은 내 말이 아직 완전하게 살아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집이 지어지고 내 바둑돌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나의 상상력을 총동원해 바둑판의 빈 곳을 채워야 한다. <미생> 역시 그러하다. 만화든 드라마든 <미생>에는 우리의 상상으로 채워 넣어야 할 빈 공간이 여전히 존재한다. 반가운 일이다. 작품의 빈 곳을 채우는 상상하기 작업은 너무나 즐겁다. 우리가 어느 작품을 감상하는 건 그것을 통해 상상하기 위해서다. 나의 상상과 해석을 통해서 한 작품이 생명력을 얻는다.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은 종이묶음일 뿐이고, 아무도 보지 않는 영상은 필름 그 자체일 뿐이다. 드라마 <미생>은 ‘열심히 하지 않아 실패했다’고 말하는 장그래의 아픔을,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라는 ‘우리’의 가치를 재조명했다. 시즌1이 끝난 지 1년. 웹툰 <미생>이 다시 생명을 얻어 꿈틀대기 시작했다. 여전히 <미생>인 채.

▲ <미생>을 통해 우리의 미래는 가능성으로 열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tvN 화면 갈무리

삶 역시 미생이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다. 단식하는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음식을 먹으며 이들을 조롱하는 사람들, 세월호 참사에 대해 사과하며 눈물을 흘렸던 대통령은 이제 경제 이야기만 한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미생>에 빈 공간이 있듯이 우리에겐 다가오는 미래가 있다. 이 미래라는 바둑판을 ‘희망’이라는 상상으로 채워가며 살아가야 한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져야 우리 사회가 바뀔 수 있다. 이 믿음을 지키는 것이 힘들고 외로울 때, 삶이 <미생>임을 기억하자. 완생이 아니라 <미생>이기에 우리의 미래는 가능성으로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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