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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19금 만화’의 쾌락을 선사하다
[맑은 바람 밝은 달, 그곳에 산다 ] ⑦ 괴산 탑골만화방 양철모 작가
2014년 08월 30일 (토) 03:04:16 황상호 기자 homerunsery@gmail.com

싱그러운 산새 소리가 잠을 깨웠다. 옷에는 모깃불 향이 짙게 배어 있었다. 전날 밤 타닥타닥 희나리 타는 소리를 들으며 새벽까지 술을 마신 뒤였다. 지난 5월 11일 충북 괴산군 문백면 신기리의 탑골만화방을 찾아가 주인장 양철모(37) 사진작가와 만화방 단골손님들이 밤새 놀고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자리에 함께 했다.

탑골만화방은 신기리의 탑골마을 어귀에 있다. 물안개가 아름다운 문광저수지 옆, 열 네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다.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에 이 마을을 감싸는 송주산 아래 사찰이 있었는데 그 안의 탑이 아름다워 사람들을 이곳을 탑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만화방 주인장인 양 작가는 8부 바지에 조금 늘어진 면 티셔츠 차림이었다. 약간 그을린 피부와 마른 얼굴은 길에서 마주친 여행자의 모습 같았다. 그는 이주노동자를 주제로 서울을 오가며 사진을 찍고 있고, 다양한 문화단체에서 지역문화 콘텐츠에 관해 컨설팅(자문)을 한다.

   
▲ 편안한 차림의 양철모 작가. 뒤에는 외동아들 정윤군이 땔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 ⓒ 유순상

호두나무 심을 시골집 찾아왔다 만화방 열어

양 작가는 6년 전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 놀러갔다가 친구의 소개로 독일 동부 브란덴부르크 주의 콧부스라는 마을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 집 선반에는 호두가 양파 자루 가득 들어있었다. 집주인의 증조할아버지가 심은 아름드리 호두나무에서 수확한 것이었다. 나무와 열매, 그리고 가족의 유산! 그 호두 한 알에는 자연이 키운 ‘우주의 살’이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양 작가는 귀국하자마자 나무 심을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2009년 지인의 소개로 괴산군 연풍면의 대지 120평짜리 농가를 얻어 호두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독일 가정집의 호두를 보고 내 아이에게 나무를 물려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형제들끼리 나눠 먹을 수 있고 좀 많으면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것들이요.”

그 때부터 일터인 서울과 괴산군을 오가는 이른바 ‘반촌’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떤 서울 사람이 집 앞 진입로에 대해 개인 소유를 주장하면서 통행을 막아, 그곳을 문화 공간으로 만들려던 양 작가의 계획이 무산됐다. 그는 할 수 없이 괴산군 문백면의 60년 넘은 방 두 칸짜리 허름한 집으로 2년 전 이사했다. 그 집이 탑골만화방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처음 시골에 올 때부터 만화방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농촌에 자리 잡고 보니 조그만 텃밭을 가꾸는 일 외에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텃밭도 그만의 독특한 ‘냅둬유 농법’, 그러니까 밭이랑에 비닐을 씌우는 것 등을 거부하고 거의 내버려 두는 방식으로 경작했다. 화학비료도 없이 사람의 분뇨를 숙성해 거름으로 썼다. 수익을 목적으로 농사짓는 것이 아니니 시간이 남아돌았다. ‘좀 더 흥분된 일이 없을까’하고 주변에 귀촌한 청년들과 모여 궁리를 했다. 그러다 만화방에 생각이 닿았다. ‘누구나 좋아하는 만화를 가져다 두면 사람들이 모이겠지.’ ‘문은 항상 열어놓고 아무나 들러 쉴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거야.’

“처음에는 10년 이상 걸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지난해와 지지난해 문화예술진흥원을 통해 시민문화예술교육 거점공간 조성사업 명목으로 약 3천만 원의 지원금을 받게 돼 속도가 붙었죠. 작가와 지인들 중에 집수리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었어요. 시간도 많았죠. 창고 슬레이트를 직접 걷어내고 용접도 다 했어요.”

   
▲ 양 작가가 공공미술삼거리팀 등의 도움을 받아 창고를 만화방으로 개조하고 있다. ⓒ 유순상

녹슨 대문을 페인트칠하고 낡은 기둥은 허물고 다시 세웠다. 장판지와 벽지도 벗겨내고 새로 발랐다. 작업은 ‘건설’이 아닌 ‘재생’에 초점을 맞춰 콘크리트 벽 등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창틀과 유리창 등을 고치고 갈았다. 건축 자재는 시골 마을에 버려진 것들을 모아 재활용하기도 했다. 책장과 탁자, 의자 등도 직접 길이를 재고 망치질을 해서 만들었다. 다락방을 포함해 방 4칸에 마당까지 40평이 조금 넘는 만화방은 그렇게 해서 지난해 말 완공됐다.

만화방 소식이 알려지자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문화행정관련 대학교수가 만화책을 보내주기도 했다. 현재 탑골만화방에는 <아톰>과 <드래곤볼> 등 잘 알려진 일본 만화부터 중국과 이슬람권 만화 등 번역 출간된 각국 만화책들이 가득하다. 국내 최신 웹툰 만화책들도 꽤 있다. <행복한 시간> <언제나 꿈은>처럼 수위가 높은 ‘19금’ 일본 만화는 아이들 손이 잘 안 닿는 곳에 진열했다.

“시골에 머물다 내린 결론이 마을에도 쾌락이 있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혈연 중심 씨족 마을에는 그런 곳이 없잖아요. 젊은 사람들이 모이고 살갑게 놀 수 있는 공간요. 그래야 마을에 생기가 돌죠.”

   
▲ 완성된 탑골만화방의 모습. 곳곳에서 보내온 만화책들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 아이들이 시골 친척집에 왔다가 이곳에 들러 만화책을 빌려보곤 한다. ⓒ 유순상

서울에선 이주노동자와 연대한 예술 활동

양 작가는 일 년의 반을 괴산에서 보내고 나머지 반은 서울에서 작품 활동을 한다. 부인 조지은(39) 미술작가와 서울 홍대 거리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비빔밥이라는 뜻의 ‘믹스라이스(mixrice)’ 예술그룹 활동을 하고 있다. 동남아 국가 등에서 이주해 온 외국인 노동자의 눈을 통해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것이 작품의 주제다. 양 작가 부부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직접 영상 촬영 기술을 가르치고 연극도 하게 했다. 이 활동들을 사진으로 찍어 전시하고, 전시회장에 연극 무대도 열었다. 이런 활동을 통해 먼저 온 이주노동자가 나중에 온 동료들을 차별하는 문제도 발견했고, 그들의 눈을 통해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혈통주의, 가부장적 편견 등 부조리한 모습도 드러냈다. 양 작가는 또 자신이 소속된 공공미술삼거리팀과 함께 인천 마석가구단지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음악축제인 마석동네페스티벌(MDF)을 매년 열고 있기도 하다. 지난 2012년 첫 행사에는 가수 강산에와 인디밴드 술탄오브더디스코 등이 무대에 서 주었다.

“보통 사건, 사고 등 선정적인 보도에서 이주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어요. 거기서 그들은 어눌하게 한국말을 하면서 매를 맞거나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로 그려져요. 우리가 주목한 점은 이런 휴머니즘적 시선을 극복하는 것이었어요. 동정 어린 시선은 문제를 단순화시키거나 대리체험의 차원으로 변질시키기 때문이죠. (이주노동자들과) 수평적으로 대화함으로써 여러 아시아 국가들의 이야기를 알 수 있고 무엇보다 그들의 눈으로 한국사회의 민낯을 들여다볼 수 있죠.”

   
▲ 지난 2012년 열린 제1회 마석동네페스티벌. 이주노동자가 직접 섭외한 가수 강산에가 노래를 부르고 노란색 터번을 쓴 이주노동자가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 유순상

이런 활동들은 ‘돈이 생기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생계를 위해 상업적인 사진촬영도 한다. 어린이 잡지 <고래가 그랬어>를 위해 사진작업을 하고 있고, 선거 홍보용 사진도 의뢰를 받아 촬영한다. 또 문화단체들을 다니며 공공미술과 문화이주에 관한 강의도 한다.

강의실도 되고 카페도 되는 문화 공간

양 작가는 탑골만화방이 인근 지역으로 문화운동을 확산시키는 거점이 되길 희망한다. 그래서 다양한 놀이거리를 기획해 사람을 모으고,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상호 학습’의 기회도 적극적으로 만들고 있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엔 ‘탑골다방’을 열어 손님들과 직접 원두를 볶고 커피를 만들어 마시며 일상사부터 사회적 이슈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이야기를 나눈다. 규모는 작지만 대기업 사원, 협동조합 활동가, 귀농한 청년 등 서울, 대구, 부산, 경남 하동군 등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인다. 작은 영화제를 열어 독립영화 등을 함께 보고, 하와이 기타인 ‘우쿨렐레’를 배우는 소모임도 연다. 상호 학습은 만화방 손님들이 각각 자기 분야의 강사가 되는 것인데, 지난 7월 26일 열린 첫 세미나에서는 괴산으로 귀농한 비폭력대화 전문가 강현주(41) 씨가 ‘평화소통’을 주제로 강의했다.

   
▲ 만화방 손님들은 마당 평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거나 영화를 보기도 한다. ⓒ 유순상

일 년에 두 번 만화에 관한 세미나도 연다. 지난해에는 대안만화출판사인 새만화책의 김대중 대표가 ‘만화, 더듬더듬 만지작’이란 제목으로 여름 강의를 맡았다. 또 겨울에는 만화가 지망생을 위해 일본 언더그라운드 만화지 <악스>의 편집장 아사카와 요시히로가 방문, 통역의 도움을 받아 일본 대안만화의 역사를 가르쳤다. 탑골만화방 세미나에서 처음 만화를 배운 한 미술작가는 올해 만화책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만화방에 모인 사람들은 밥을 짓고 설거지와 청소하는 일 등을 다 함께 나눠서 한다. ‘사다리 타기’ 등의 게임을 통해 담당자를 지명하거나 자발적인 분업을 통해 각자의 몫을 나눈다. 주말 농장을 하는 만화방 손님의 텃밭에 가 일손을 돕고 음식을 나눠 먹기도 하고, 다른 이들이 호미나 낫을 들고 일하는 동안 우쿨렐레를 치며 흥을 돋우는 것으로 노동을 대신하기도 한다.

양 작가는 만화방을 통해 지역과 연계한 사업도 하고 있다. 만화가를 농가와 연결해서 농산물 소개 전단지를 만화 형식으로 만든 게 대표적인 예다. 지난해의 경우 국산 깨 가공 영농조합인 괴산군 ‘깨가 쏟아지는 마을’에 여성 미술작가 김유인(34)씨를 연결해 참기름 전단지 등을 만들었다. 한 달 전에는 양 작가의 아내인 조지은 작가가 괴산 주민의 두부 판매를 돕기 위해 포장지에 붙일 스티커를 만들기도 했다. 작가들은 작업의 대가를 현물로 받는다. 김 작가는 옥수수를, 조 작가는 따끈한 손두부를 받았다고 한다.

   
▲ 미술작가 김유인씨가 만든 참깨 전단지와 포장지. 김씨는 수고비로 현금 대신 옥수수를 받았다. ⓒ 유순상

“시골이 문화 소외지역이라고들 해요. 그런데 제 생각에 삶의 문화는 시골이 더 풍부해요.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수확하고 또 축제를 하고요. 도시에서 문화가 풍부하다는 것은 돈을 주고 소유할 수 있는 것들, 가령 영화를 보거나 세련된 갤러리를 다니는 일들이죠. 자신의 직접적인 삶과 개별화되어있죠. 하지만 시골에는 공동체 문화뿐만 아니라 자연과 직접 교감할 수 있는 문화가 널려있죠.”

   
▲ 마당에 열린 앵두를 따 볕에 곱게 말리는 모습. 앵두주를 담궈 시장에 내다 팔 계획이었지만 단골손님들이 절반 가량을 몰래 마셔버렸다. ⓒ 유순상

8월 들어 탑골만화방에 다시 찾아가니 어른 허리 높이였던 옥수수가 2미터까지 훌쩍 자라있었다. 붉게 영글었던 앵두는 소주에 담겨 만화방 한 구석에서 익어가고 있었다. ‘쾌락이 있고 예술이 꽃피는 시골 마을을 만들겠다’는 주인장의 꿈도 그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생태공동체를 꾸리거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맑은 바람 밝은 달,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 충청북도에는 유독 사연 많고 소신 있는 예술인과 공동체운동가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다. <단비뉴스>는 이렇게 충북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문화인과 활동가들을 찾아 나섰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인 CJB청주방송 황상호 기자가 글을 쓰고 서양화가 유순상 씨가 사진기와 붓을 들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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