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500만명이 본 다큐 ‘백년전쟁’의 김지영 감독

관객 1만명도 쉽지 않은 독립 다큐멘터리(기록) 영화시장에서 누적 관람객 500만명(민족문제연구소 추산)이라는 이변을 낳은 작품이 있다. 이승만, 박정희 등 전직 대통령들을 비판적으로 다룬 역사물 <백년전쟁>이다. 이 다큐는 지난 2012년 11월 26일 개봉한 후 유튜브(youtube) 등 온라인 사이트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정도 흥행이면 연출자가 유명세를 치르기 마련인데, 김지영(47) 감독은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자신을 ‘지독하게 평범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김 감독을 지난 5월 22일 서울 청량리에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났다.

▲ <백년전쟁>의 김지영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가 가장 즐겁다고 말했다. ⓒ 배상철

빚 청산 위해 광고일 시작했다 '과거 청산' 참여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어요. 영화감독이 꿈이었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았죠.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영화에 대한 미련이 계속 남아 결국 2년 반 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영화판에 뛰어들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유명 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영화 한편 제작에 수천만원에서 수백억원까지 들기 때문에 첫 작품에서 흥행에 실패하면 재기가 어렵다. 그래서 감독을 꿈꾸던 많은 이들이 광고계나 영상미디어 쪽으로 진로를 바꾼다. 김 감독도 그랬다. 2000년 무렵부터 영화판을 맴돌며 연출도 하고 시나리오도 썼지만 제작하던 영화가 잘 안 돼 빚을 지게 됐다. 빚을 갚기 위해 광고회사에 취직했다. 그 광고회사에서 우연히 한일과거사 청산 등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하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인연이 닿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에 친일인명사전(식민통치에 협력한 친일파를 기록한 인명사전) 을 만들고 있었는데, 제가 일하는 업체에 그 과정을 영상에 담아 세미다큐로 만들고 싶다는 의뢰가 들어온 거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 감독은 틈틈이 민족문제연구소 일을 돕게 됐다. 그러던 중 2011년에 한 지상파 방송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미화한 다큐를 방영했다. ‘역사왜곡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민족문제연구소는 김 감독에게 ‘제대로 된 역사다큐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김 감독은 고심 끝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2011년 6월에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 1년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영화가 바로 <백년전쟁>이다.

▲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 포스터.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대비로 긴장감 넘치는 영상

<백년전쟁>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1910년부터 2011년까지의 100년을 담기 위해 기획된 시리즈물로, 본편 4부작과 특별편으로 구성된다. 2012년 개봉한 본편 1부는 1945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앞으로 제작될 본편 2,3,4부는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군사독재시기를 거쳐 문민정부 시기까지를 연대기로 훑어갈 예정이다. 그리고 <프레이저보고서-누가 한국경제를 성장시켰는가>와 같은 특별편 제작도 계속된다. 

김 감독은 처음에 20여분 정도의 단편 다큐멘터리를 생각했지만 제작이 진행될수록 역사에 대한 사명감을 느꼈고 기존 역사 다큐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다는 욕심도 생겨 4부작을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역사 다큐는 윤봉길, 안중근 등 독립운동가를 다루면 항상 독립운동가만 다뤄요. 반면 친일파의 경우에는 친일파만 다루죠. 사실 이 사람들은 같은 시공간에 살았는데 분리해 놓은 거예요. 저는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한 화면에서 부딪히게 만들고 싶었어요. 흰색이 검은색을 통해 훨씬 하얗게 보이고, 검은색은 훨씬 검게 보이듯이 한 화면 안에서 본질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어요.”

김 감독은 이런 생각을 <백년전쟁> 1부 첫머리에 “우리가 어떤 나라에 쳐들어가면 한쪽엔 저항세력(resistance), 다른 쪽엔 협력자(collaborator)가 있고, 그 사이에 머뭇거리는 대중(masses)이 있다”는 괴벨스(나치독일 선동가)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드러냈다. 김 감독이 의도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대립구도는 영화 내내 긴장감이 지속되도록 만들었고,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패러디를 적극 활용하며 진지한 줄거리 흥미롭게 전달 

우리나라의 독립 다큐멘터리 시장은 매우 열악하다. 공들여 작품을 만들고 극장에 걸어도 대개 1~2주가 지나면 내려야 한다. 관객이 적은 탓에 수지가 안 맞아 영화관측에서 장기 상영을 꺼리기 때문이다. 그 짧은 상영기간 중에도 다른 영화와 교차로 상영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다큐는 관객 2000~3000명을 넘기 어렵다. 이런 현실도 문제였지만, 김 감독은 "이명박 정부에서 등급심의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튜브를 통한 개봉을 선택했고, 인터넷에 무료로 배포한다면 30만 명 정도는 볼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측했다고 한다. 약 2500만원의 제작비용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주로 대고 4·9통일평화재단도 얼마간 지원했으므로, 비용 회수에 대한 부담 없이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막상 인터넷에 올리자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타났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입소문이 돌면서 폭발적인 관심이 쏠려, 지난 5월 기준으로 누적관람자수가 500만명을 넘은 것이다. 스타 연예인이 등장하는 것도 아닌 역사다큐에 사람들이 이렇게 열광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 감독 자신은 ‘재미’를 꼽았다. <백년전쟁> 1부는 ‘두 얼굴의 이승만’이라는 부제로 이 전 대통령이 독립운동보다 개인의 입신에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다양한 패러디와 코믹한 해설 등으로 관객의 눈과 귀를 끌어 당겼다.

▲ 이승만의 독립운동 전략을 설명하며 '20세기 폭스'의 오프닝 로고를 패러디했다. ⓒ 영화 <백년전쟁> 화면 갈무리

“사람들이 다큐멘터리는 공짜로 보여줘도 잘 안 봐요. 그런데 영화는 9000원을 내고 가서 보잖아요. 왜 그럴까요? 재미있기 때문이죠.”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김 감독의 원칙은 ‘재미있게 만들자’다. 아무리 훌륭한 내용이라도 재미가 없으면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한다는 것이다. 자칫 지루하기 쉬운 다큐멘터리를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비결은 뭘까. 김 감독은 “대중성을 추구하는 상업영화판에서 10년 넘게 연출을 하고 시나리오를 썼던 내공이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녹아나는 것 같다”고 자평했다. 

<백년전쟁> 제작에 참여한 최진아 피디(PD)도 “김 감독은 본인 스스로 지루한 것을 못 견뎌한다”며 “재미를 지향하거나 추구한다기보다 체질화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김 감독은 자주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경쾌하게 이끌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의 역할과 가능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매우 진지했다.

명예훼손 공방 불구 "끝까지 만들 터"

“2012년 한진중공업사태 때 노동운동가 김진숙씨의 다큐를 봤어요. 부당해고에 대한 항의로 크레인에 올라갔는데 거기서 핸디캠으로 자신의 일상을 찍어서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었죠. 일반 카메라로 찍다보니까 흔들리고, 화질도 안 좋고 소리도 직직거리고 엉망진창이었어요. 그런데 빨려 들어가더라고요. 약간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까요. 그때 느꼈어요. 영화는 진심이구나. 사람들이 이런 맛에 다큐멘터리를 보는구나.”

그는 일단 <백년전쟁>을 4부까지 완성한 뒤 영화 <부러진 화살>처럼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2013년 5월 공개 예정이었던 <백년전쟁> 2부의 제작이 아직까지도 지연되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씨가 김 감독과 최진아 PD,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등 3명을 사자명예훼손으로 고소했기 때문이다. 이씨 등 유족들은 "(백년전쟁이) 허위 사실과 자료 조작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인격 살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지난 4월 1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민족문제연구소와 <백년전쟁>에 대한 공안몰이 수사 중단을 요구했다. ⓒ 오마이포토

검찰 조사에 대응하느라 후속 다큐 제작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김 감독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끝까지 만들 것”이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현재 검찰은 <백년전쟁> 명예훼손 사건을 당초의 형사부 담당에서 공안부로 재배정해 수사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정치적 색깔을 보이는 내용이라는 점 등을 감안했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측은 지난 4월 14일 기자회견을 열고 “<백년전쟁>은 철저히 사료에 입각해 만든 역사 다큐멘터리”라며 “무리한 공안몰이 수사를 즉각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김 감독은 다큐 제작을 미룬 채 지루한 법정 공방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서도 낙관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백년전쟁>을 감독한 것은 제 인생에 다신 없을 행운이에요. 영화 시사회에서 관객과 대화를 하는데, 어떤 분은 악수를 청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이런 다큐를 만들어줘서 감사하다’며 격하게 저를 껴안기도 했어요. 그 때의 기분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죠. 역사의 진실을 바라는 사람들의 응원과 후원이 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에요. 포기하지 않습니다. 2부를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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