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5일장-아우라지 스케치 기행

개성의 만수산이 정선아리랑에 나오는 이유

수많은 아리랑 중에서도 지역의 역사와 애환, 그리고 자연을 가장 잘 담아낸 것은 정선아리랑일 듯하다.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들고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 곳, ‘한치 뒷산에 곤드레 딱죽’으로 연명하던 곳이 정선아리랑의 본향, 정선이다.

정선은 원래 조선 개국에 반대한 고려 유신들이 개성 인근 두문동에 숨어살다가 더 깊은 은신처를 찾아 들어온 곳이었다. 그들은 고려를 그리워하며 나물을 캐먹고 살았는데 그 애환을 정선아리랑에 담았다고 한다. 정선에는 없고 개성에 있는 만수산이 정선아리랑에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원도에서도 첩첩 산골인 정선에는 이제 ‘물을 안고 돌아가는 물레방아'도, ‘아우라지 뱃사공’도 사라지고 없지만, 정선아리랑의 사설과 후렴은 구구절절이 남아 후인들의 심금을 울린다. 사람 살아온 이야기가 자연경관과 결합해 관광상품이 되는 시대에 정선은 지금 은신처가 아니라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리는 5일장이 됐다.   

▲ 2와 7로 끝나는 날 열리는 정선5일장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든다. ⓒ 김성숙

2일과 7일 열리는 정선5일장은 향긋한 시골 냄새와 장터 분위기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늘 시끌벅적하다. 길 양쪽과 통로까지 가득 들어찬 점포와 좌판들, 투구놀이와 제기차기가 한창인 마당, 도시에서 맛볼 수 없는 향토음식, 장터 공연장에서 흘러나오는 정선아리랑 가락은 눈과 귀를 아무리 활짝 열어도 거의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야단법석이다.

장터의 우애 “옆에 가서도 좀 팔아줘”

▲ 직접 채취한 나물 등속이 가득한 변옥주 할머니의 좌판. ⓒ 김성숙

5월 17일에도 좌판을 편 난전 상인 변옥주(85∙정선읍 덕송리) 할머니는 곤드레, 취나물, 곰취, 다래순, 미역취, 두릅을 하나씩 가리키며 모두 산에서 직접 뜯어왔다고 했다. 퇴직한 아들 내외가 농사지은 수수와 콩이며, 계곡에서 잡은 민물고기도 내다 판다. ‘중국산 아니고 정선산이 맞느냐’는 손님의 물음에 그는 목에 건 ‘신토불이증’을 당당하게 보여줬다. ‘신토불이증’은 정선의 산야에서 채취하거나 농사지은 작물을 파는 상인임을 지자체가 인정한 신분증이다.

쪄서 건조한 취나물과 햇볕에 가지런히 말린 피라미는 가공하지 않은 것보다 비싸지만 더 잘 팔린다. 노동을 투입해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여 판매해야 더 많은 이윤을 남긴다는 시장의 논리는 오랜 세월 장터에서 몸으로 익힌 진리다.

변 할머니는 자기 좌판에만 손님이 몰리자 나란히 앉은 고귀태(83∙북평면 북평리) 할머니가 안쓰러웠던지  “옆에 가서도 좀 팔아줘”라고 말했다. 자기 장사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옆자리 동료까지 생각하는 마음은 시골 장터의 정겨운 우애다. 고 할머니는 장터에 나오는 이유가 돈 버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했다.

“늙으면 누가 알아주나. 장에 나오는 게 낙이지. 여기 나오면 좋아. 얘기도 실컷 하고. 이런저런 소식도 듣고. 늘그막에 이런 여흥이 또 어딨어?” 

▲ 고귀태 할머니 얼굴에는 정선 땅에서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담겨있다. ⓒ 김성숙

가격 흥정을 벌이며 손님들과 대화하고 옆에 앉은 동료와 두런두런 수다를 떠는 것은 산골 노인이 장터에서 누리는 큰 즐거움이다. 고 할머니가 자신을 “일흔”이라고 소개하자 변 할머니는 “저이 나보다 겨우 두 살 아래야”라고 맞받아쳤다. 손님이 “깜박 속았다”며 “젊었을 때 미인 소리 많이 들었겠다”고 ‘아부’를 하자 고 할머니는 활짝 웃었다.

“젊었을 때는 이뻤지. 바람도 피우고 그랬어. 왜 나이를 속였냐고? 장사하려면 거짓부렁도 하고, 공갈도 칠 줄 알고 그래야 돼.”

정선과 흥망성쇠를 함께 하는 5일장

문화관광해설사 서덕웅(69)씨는 산골에 흩어져 사는 화전민이 전부였던 정선의 역사가 탄광이 생기며 완전히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믿을 건 몸뚱어리뿐인 사내들이 모여들어 광부가 되었고, 그들을 상대한 장사치들이 모여 탄광촌을 이뤘다. 정선은 전국 곳곳에서 모여든 이들이 뒤섞여 사는 ‘팔도공화국’이었다. 5일장이 생긴 것도 탄광이 들어선 뒤인 1966년이다. 장이 흥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가 워낙 험준해서 벼농사 짓기 힘드니까, 정선에서 여자아이가 시집 갈 때까지 쌀 두 됫박 먹고 가면 부잣집이라 그랬습니다. 눈이 높아야 정선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하늘을 보려면 고개를 완전히 쳐들어야 했기 때문이죠.”

탄광이 있는 곳마다 기찻길이 지나갔다. 석탄을 실어 나르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정선사람들에게는 장날마다 험한 고개를 넘지 않아도 되는 고마운 교통수단이었다. 석탄산업합리화조치로 80년대 말부터 폐광이 본격화하자, 한때 12만이던 인구는 4만으로 줄었고 장터도 활기를 잃었다. 그러나 서울역에서 출발해 정선5일장을 돌아보고 귀경하는 열차가 관광상품으로 인기를 얻으며 장터는 다시 부흥기를 맞고 있다.

‘화티’와 ‘고콜’이 있는 정선의 옛집

“여기 어른들은 ‘아리랑 해라’ 소리 안 합니다. ‘아라리 한마디 하라’고 그럽니다.”

서덕웅 해설사는 ‘아라리촌’의 ‘아라리’는 정선 아리랑의 옛 이름에서 따왔다고 설명했다. 아라리촌은 정선의 옛 주거문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너와집, 돌집, 귀틀집, 저릅집 등이 복원돼 있다.

저릅집은 얼핏 볏짚을 엮어 지붕을 만든 초가집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볏짚과는 달리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벼를 재배하기 어려웠던 정선에서는 삼대의 껍질을 벗기고 난 줄기인 겨릅(강원도 방언은 저릅)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만들었다.   

▲ 얇은 판석을 두께 2cm 정도 돌기와로 만들어 지붕을 올린 돌집. ⓒ 김성숙

너와집 지붕에 겹겹이 포개진 널판은 이리저리 기운 누더기 같다. 이백 년 이상 자란 소나무의 토막을 쪼갠 널판으로 만든 지붕은 처마 밑까지 눈이 쌓이는 험한 날씨에도 끄떡없다. 너와집 내부는 아파트와 비슷하다. 대청마루 바로 앞에 있는 마당이 벽으로 둘러싸여있다. 사람이 사는 곳은 흙으로 바르고 큰 짐승이나 추위를 막기 위해 외부는 널빤지로 막은 구조다.

안에 있는 ‘화티’는 강원도 등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아궁이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쓰임새는 다르다. 아궁이에 재가 차있으면 불을 땔 수 없다. 불을 지피려면 재를 처리해야 하는데 밖에 버리면 불이 날 위험도 있어 ‘화티’에 옮겨 불씨를 보관했다.

등불인 동시에 벽난로 구실을 하는 ‘고콜’도 있다. 방구석에 자그마한 구멍을 만들고 그을음이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조금만 굴뚝도 만들었다. 송진이 많이 스며든 관솔을 얇게 썰어 불을 지폈다. ‘고콜’에서 나오는 빛 아래서 아낙들은 바느질과 길쌈을 했다. 할아버지가 손주 줄 감자를 굽는 화로가 되기도 했다.

사공과 뗏꾼이 떠난 아우라지 누가 지킬까

아우라지는 여량면 구절리에서 내려오는 송천과 삼척시 중봉산에서 흘러내린 골지천이 만나 ‘어우러진다’는 뜻이다. 장날이면 아낙들을 태우고 오가던 배는 지금도 화요일마다 손님을 받는다. 배를 타러 걸어가는 강가 돌밭 한 편에 세운 큰 돌에는 정선아리랑 한 가락이 새겨져 있다.

‘아우라지 지장구 아저씨 배 좀 건너 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가사에 나오는 ‘지장구’는 1960년대까지 살아있던 뱃사공 지유성씨인데 스무살부터 예순셋까지 아우라지에서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장구를 잘 쳐 ‘지장구’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정선아리랑도 잘 부르는 명창이었다. 아우라지에는 예부터 뗏군들의 애환과 정한이 함께 흘렀다. 정선에서 출발한 뗏목이 서울에 닿는 데는 수량과 유속, 중간기착 등에 따라 짧게는 사나흘에서 길게는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떼돈 번다’는 말이 생겨난 걸 보면 뗏꾼들이 고생과 외로움의 대가로 챙긴 이문이 꽤 쏠쏠했던 듯싶다.

삶의 애환을 담는 정선아라리

▲ 사랑하는 임과 헤어지는 슬픔을 흘려보냈던 아우라지. ⓒ 김성숙

정선군은 지난해까지 여량면 유천리 일대에 아리랑박물관과 여송정을 세우고 주막을 복원했다. 그믐달이 걸린 ‘오작교’와 마주섰다가 강물을 가로질러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니 솔숲 사이로 정선 토박이먹거리를 내오는 ‘아리랑 주막촌’이 눈에 들어왔다. 메밀로 만든 콧등치기 국수에 옥수수 알갱이로 쑨 올챙이묵부터 수수부꾸미, 장떡, 메밀전병, 메밀부침, 감자부침, 녹두전까지 정선 아낙들이 종일 정지(부엌)에서 만들었을 법한 음식들이 상 위에 올랐다.

정자에 둘러 앉아 한참 옥수수 막걸리를 주고받던 일행에게 주막 대청마루에 앉아 약주를 나누던 두 할머니가 다가왔다. 그들은 “늙은 게 진미가 나지 젊은 게 뭔 재미가 있냐”며 정선아라리를 한 곡 뽑으며 어깨춤까지 선보였다.

‘아우라지 강물이 소주 약주 같다면
오고 가는 친구가 모두 내 친굴세
아우라지 강변에 수줍은 처녀
해가 지고 달이 떠도 떠날 줄 모르네’

“세월호 손주들 배웅하는 거예요”

‘장에서 장사하는 장꾼’과 ‘아리랑전수관 사모님’이라고 서로를 소개한 두 할머니는 “가기 전에 영감이나 하나 해주고 가라”는 둥 농을 던지다가도 어느새 구슬픈 아라리로 돌아갔다. 

▲ 두 할머니의 재담과 노래에 흥겨워 하는 일행. ⓒ 신은정

“우리가 좋아 이러는 게 아니고. 이런 할머니도 세월호 뉴스 보잖아요. 엄청 울었어요. 아침 먹으려고 갖다 놓고 뉴스 틀면 (눈물이) 나오는 거야. 사람은 잠시 잠깐이라도 좀 웃다가 가야 되잖아. 정선아라리 한마디로 우리 손주들 배웅하는 거예요.”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들의 노래 가락은, 인생을 너무나 짧게 마감한 세월호 희생자에게는 진혼곡이었고,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속 깊은 위로가 되는 듯했다. 구성진 노래 가락에 세상 걱정을 잠시나마 묻다 보면 이 모진 세상도 그럭저럭 살아갈 만하게 느껴질까? 아라리 가락은 저물어가는 강변에서 더 또렷해지는 아우라지의 물소리를 닮았다.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이 개설한 [지역∙농업보도실습]의 일환으로 쓴 것입니다. 이 강좌는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함께 지역 이슈와 농업∙농촌 문제에 대한 기자∙PD 지망생들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개설됐습니다. 대산농촌문화재단과 연계된 이 프로그램은 지역∙농촌 현장실습과 여행에 동참하는 교수가 현장에서 취재와 기사 틀짜기를 지도하고 나중에 첨삭까지 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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