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의 미디어 속 이야기]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세월호 참사 한 달째, 국민적 분노와 슬픔이 오히려 더해 가는 것은 아직도 시신을 다 수습하지 못한 때문만이 아니다. 지난 한 달, 박근혜 정권과 언론이 보인 행태가 국민들을 더욱 깊은 절망의 바닷속으로 밀어 넣고 있기 때문이다. 끔찍한 사고를 당하고도 근본 원인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기심과 탐욕을 과적한 채 여전히 위험수역으로 ‘한국호’를 몰고 간다.

‘세월호를 잊지 말자’고들 하지만 세월이 흐르기도 전에 그 의미를 잊어버렸다. 아니, 우리 사회는 세계 최고의 경쟁지상주의와 성장제일주의, 그리고 배금주의와 천민자본주의를 향한 질주를 멈춘 적이 없다. 자본의 이윤 추구에 걸리적거리는 규제를 풀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등의 기본노선, 곧 ‘줄푸세’ 정책을 집권세력이 전환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가? 친정권 방송과 신문은 추모 분위기가 분노로 표출되는 것마저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기업사회인 한국의 근본적 방향전환을 요구할까 봐 경계한다.

보수·진보 할 것 없이 언론과 야당이 촉구한 책임추궁의 핵심은 관련자 엄벌과 대통령 사과, 그리고 개각이다. 사고가 ‘인재’이니 이제 관련자를 문책하고 안전대책과 매뉴얼만 잘 만들면 사고가 방지될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선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는, 버티다가 한다니까 사고 수습의 전환점이나 되는 것처럼 ‘기대’되는데, 즉각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의 한 특징은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는 점이다.

대통령책임제에서 총리를 비롯한 내각에 책임을 묻는 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총리에게 책임을 지우는 게 ‘블랙 코미디’인 줄은 누리꾼이 잘 안다. 정홍원 국무총리가 “책임지고 물러나겠다”고 하자, 트위터에는 이런 글이 돌아다녔다. ‘정홍원이 누구? 아, 물병 맞은 아저씨.’ 역대 총리의 존재감 없음은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번번이 패배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권한이 없는 이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자체 모순일 뿐 아니라 진짜 책임져야 할 권력자에게 면죄부를 주게 된다. 모든 권한을 틀어쥔 ‘제왕적 대통령’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코미디가 그의 ‘깨알지시’를 받아 적는 청와대 회의 장면이다. 그것을 볼 때마다 드는 느낌은 수첩을 복사해서 나눠주면 될 일인데 장관과 참모들이 고생한다는 거였다. 최고권력자의 말을 일제히 받아 적는 나라가 남북한 말고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은 의전, 곧 격식과 행사를 중시하고, 명령체계의 일사불란함을 귀한 가치로 삼는다. 박 대통령이, ‘윗분의 뜻을 받들어’ 모시는 데 이력이 난 김기춘 비서실장을 좋아하고, 맘에 들지 않거나 토를 다는 사람에게 레이저 광선을 쏘는 것도 같은 정서다. 그런 분위기에서 인사권을 쥔 대통령에게 목 내놓고 쓴소리할 사람이 있을까?

권력이 분산된 민주주의 국가보다 독재국가에서 대형 사고가 잦은 것은 권위주의가 부패의 온상이 되어 안전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원활한 의사소통에 의한 사고 예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고 직후 현장 지휘체계가 제 구실을 못한 것은 상관의 지시 없이 움직이면 손해라는 생각이 앞서 보고하기에 바빴던 탓이다. 툭하면 민원인과 시위대가 청와대로 몰려가는 것도 자업자득이다.

권한은 대통령이 장악하고 있는데 책임은 분산시켜 놓은 것이 지금의 재난구조체계이다. 지방행정연구원은 최근 ‘재난 대응 컨트롤타워를 대통령 직속 기구로 둘 경우 대통령 책임이 무거워진다’며 대통령의 안위를 더 걱정하는 보고서를 내놨다. 야당의원이 대통령을 비난하면 여당의원들이 ‘결사옹위’를 하고 나서는 것도 북한을 닮았다.

 

 

일러스트 경향신문 김상민 기자

▲ '물병 맞은 아저씨'에게 책임 묻는 게 무슨 소용
제왕적 대통령제 권한과 책임 일치 안되니
권위주의로 흘러 사고 유발

▲ '개각’보다 ‘개헌’으로 언론이 의제 확장할 기회
'선진국 중 미국만 대통령제 다른 나라 수출되면 죽음의 키스로 변해'
갈등 증폭시키는 다수결 대신
협의 민주주의 꽃피우는 내각책임제가 대세

세월호 관련 외국 언론 보도를 모니터링하면서 느낀 점은 이번 기회에도 책임을 묻는 정치체제를 만들지 못하면 앞으로도 인재가 계속 터질 것이라는 걱정이다. 영국 가디언은 ‘(이러고도) 지위를 보전할 수 있는 지도자가 서방에는 있을지 모르겠다’고 썼고, BBC는 실종자 가족들이 서울에서 420㎞ 떨어진 섬에서 도보행진을 시작하자마자 경찰이 막아선 화면을 내보내며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라고 보도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박 대통령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면서 국정원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여론조작 사건을 예로 들었다.

민주주의의 핵심이 책임정치와 집회·표현·언론의 자유 등에 있음을 체득하고 있는 영국인들 안목으로는 세월호 침몰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국적 현상’이 이상할 수밖에 없다. 영국은 내각책임제라서 크게 책임질 일이 있으면 정권이 바뀔 뿐 아니라, 핵심 권부인 의회 앞에 각종 단체 시위대가 주둔하다시피 하는 나라다. 결사의 자유도 완전히 보장해 극우정당이나 공산당까지 소수의 목소리로 보고 인정한다. 신문도 좌우균형을 이루고 공영방송 BBC가 중심을 잡고 있다.

한국의 기득권 세력은 세월호 참사조차 정치로부터 분리하려 애쓰고 얼이 빠진 듯한 제1야당은 납작 엎드려 있다. 자본의 방종과 관료의 유착을 제어하기는커녕 조장하다시피 해온 정치에 가장 큰 재난 원인이 있는데도 정치로 해결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정부를 견제해야 할 의회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마당에 소셜미디어와 거리의 정치까지 막으려 든다. 가장 치명적인 유언비어는 ‘전원 구조’라는 당국의 발표였는데도….

언론 또한 공범이다. 저널리즘의 기본마저 내팽개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특히 제일 먼저 현장에 달려간 목포MBC 취재진이 ‘160여명밖에 구조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는데도 서울 보도본부가 무시한 사례는 언론에도 ‘과실치사죄’를 적용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분노를 자아낸다. 언론이 ‘전원 구조’라는 초대형 오보를 내지 않았더라면 구조인력이 그렇게 늦게 도착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경향신문을 비롯한 진보매체들도 속보경쟁을 하면서 많은 과오를 저질렀지만, 사고의 원인이 규제 완화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있음을 지적하는 등 나름대로 차별성을 보였다. 경향은 “심층기획-한국사회의 민낯 ‘세월호’ ”(14일자) 등을 통해 안전이 세월호만의 문제가 아님을 파헤치고, 사설에서 ‘섣부른 국가개조론을 경계한다’(1일자)거나, ‘분노한 민심을 정치 공방으로 덮겠다는 건가’(14일자)라며 새누리당을 질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언론, 특히 진보매체들이 이번 기회에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의제는 책임정치 구현의 제도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재난에 효율적일 것 같은 대통령제가 실은 권위주의로 흘러 재난을 유발하고 수습에도 취약하다는 점은 앞서 지적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내각제였다면 4대강에 재앙을 초래하는 사업을 추진하지 못했을 터이다.

대통령제는 국민 여론 수렴에도 취약하다.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 지지율은 51.6 대 48이었는데 권력은 100 대 0으로 분배됐으니 그것을 민의라 할 수 있을까? ‘전부 아니면 전무’이니 선거가 사생결단일 수밖에 없고, 재임기간에도 야당은 정권을 잡기 위해 무조건 반대하고 여당은 야당 말을 안 듣는 게 정치문화가 됐다. ‘협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수결 민주주의’가 관철되니 국민의 갈등도 증폭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 34개 회원국 중 대통령제를 채택한 나라는 한국, 미국, 칠레, 멕시코 말고는 없다. 미국은 물론 삼권분립이 확립돼 있고 중간선거 등을 통해 끊임없이 민의를 수렴한다. 독일 정치학자 뢰벤슈타인은 “미국 대통령제는 다른 나라로 한 발짝 수출되는 순간 죽음의 키스로 변하고 만다”고 했다. 선진국 중 우리만이, 그것도 ‘제왕적 대통령제’를 채택해 ‘죽음의 키스’에 빠져 있는 셈이다. ‘개헌’을 해야 책임을 제대로 물을 수 있어 국민주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것이다.

야당과 진보언론이 툭하면 주장하는 개각만큼 결과가 허무한 일도 없다. 여당은 그것으로 위기 국면을 넘길 수 있지만 야당은 개혁을 추진할 동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권위주의에 빠지면 반성을 싫어해 사람을 교체하는 일도 ‘측근 돌려 막기’로 끝나는 게 보통이다. ‘인사는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는 생각도 권위주의적 발상이다.

내각제를 채택해 야당과 협의하며 정치하는 유럽에서 특히 정파적이면 안되는 자리에는 야당도 수긍하는 인물을 앉힌다. BBC가 공영방송의 모델이 된 것은 이런 정치문화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KBS와 MBC의 요직에 측근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을 앉혀 방송을 장악한 것도 제왕적 대통령제의 귀결이다. 아무리 여론의 욕을 먹더라도 자기한테 배신하지 않으면 중용하는 인사 행태는 여론보다 자신의 안위와 권위 유지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데서 비롯된다. 방송통신심의위원장에 5·16쿠데타를 미화한 뉴라이트 교수를 임명하고, 민정비서관에 300억원대 자산가이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사한 검사를 임명한 게 그들로서는 잘못된 인사가 아니다.

워낙 과오가 많은 국정원장이나 비서실장 교체라면 의미가 있겠지만, 총리나 취임한 지 얼마 안되는 안전행정부 장관에게 국회가 사표를 쓰라고 질타하는 모습은 희생양을 바치기 전에 치르는 희생의식을 닮았다. 권위주의 정권의 개각과 인물 교체는 프로레슬링의 태그매치와 비슷해 야당으로서는 새로운 강자를 불러들이는 것과 같다. ‘개각’보다 ‘개헌’이 훨씬 절실한 이유다.


* 이 기사는 <경향신문>과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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