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불패] 문경 엄재성∙최영희 부부

흔히 봐온 연한 살구색이 아닌 옅은 푸른색을 띠는 달걀이 지난 3월 한 백화점을 통해 처음 소개됐다. 청란(靑卵)이라 불리는 이 달걀은 1000원 안팎의 비싼 몸값을 자랑하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이다.

문경시에 속하긴 하지만 택시기사도 꺼릴 정도로 험한 산길을 달려 도착한 산양면 청계농장(추산로 119-39)이 자연농법으로 청란을 낳는 청계(靑鷄)를 키우는 젊은 귀농부부의 일터다. 양계장 세 동과 살림집으로 쓰는 아담한 가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주변에 인가가 없는 외딴 산 속에서 닭을 키우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래, 마흔에는 시골에서 살자고 했지…’

2010년 1월 26일. 엄재성(43)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녁을 먹고 있는데 마침 TV에서는 ‘6시 내고향’이 방송되고 있었다. 닭과 돼지를 키우는 부부 이야기였다.

▲ (위)부인 최영희씨가 청계 병아리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아래)생후 한달 10일 된 청계들. ⓒ 이문예

“방송을 보면서 스무 살 때 메모로 남겨뒀던 ‘나의 인생계획’이 갑자기 떠올랐어요. 찾아보니 ‘40대에 돈을 어느 정도 벌어놓고 시골에 가서 살자’라고 적혀 있었어요. ‘아차’ 싶더라고요. 딸 건강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는데 귀농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엄재성씨는 인천에서 맞벌이 부부로 살고 있었다. 제때 부모가 밥을 챙겨주지 못하니 딸은 인스턴트 식품을 가까이 했고, 아토피로 온 몸을 매일같이 긁어댔다. 11살 꼬맹이가 역류성 위염까지 걸려 부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딸을 위한 일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가 지체없이 귀농을 택한 이유다.

막상 농촌으로 내려왔지만 농사를 지을 기술도, 경험도 없었다. 양계사업을 하기로 마음먹고 여러 인터넷 사이트나 논문들을 검색했다. 그러던 중 청란이 아토피에 좋다는 정보를 얻었다. 무작정 귀농을 결심했듯 무작정 청계를 키우는 농가가 있다는 청양에 가서 한 달 동안 끈질기게 졸라댔다. 그렇게 청계 100마리를 얻어 지금껏 종계갈이를 하며 마리 수를 늘려왔다.

“작년에 2500마리까지 키우다가 종계갈이를 위해 좋은 개체 500마리만 남겨두고 처분했어요. 그런 식으로 종계갈이를 하다 보니 지난 4년간 수입이 거의 없었죠.”

청계는 ‘아메리우카나’라는 종과 토종닭을 교잡해 탄생한 종이다. 아직 100% 고정되지 않아 1년에 한 번씩 종계갈이를 해야 한다. 파란 달걀만을 낳아야 하는데 가끔 빨간 달걀을 낳는 등 안정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탓이다. 아직도 몇 년은 더 고생해야 하지만, 그래도 내년쯤이면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에 마냥 힘들지만은 않다.

내 딸에게 먹인다는 생각으로

“적당히 하세요. 기자님 이제 통닭 못 먹겠네.”

오미자차를 준비하던 부인 최영희(44)씨가 한 마디 던졌다. 엄씨가 시중에 판매되는 보통 닭의 사육 방식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부인의 ‘제지’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 (위)방사 시간이 되어 축사 창문을 열어두자 청계들이 줄지어 축사밖으로 이동하고 있다. (아래)청계들은 축사 안에 놓인 수십개의 항아리에 들어가 청란을 낳는다. ⓒ 이문예

보통 양계장에서는 20×40cm의 작은 철창에 닭을 가두어 키운다. A4용지 3/4 정도에 불과한 넓이다. 일찍 식용으로 판매하기 위해 일부러 살을 찌우고 성장촉진 주사를 놓는다. 시장에 나오기까지 맞는 주사만 해도 각종 항생제, 회충약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렇게 키운 닭은 불과 38일만에 우리 식탁 위에 올라온다. 엄씨는 자기 양계장에서 40일 된 닭들을 보여줬다. 한눈에 보기에도 우리가 늘 먹는 닭보다 훨씬 작았다.

“성장촉진제 같은 주사를 맞히지 않고 자연 그대로 키우면 38일 된 닭은 날개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요. 원래 암탉은 8개월, 수탉은 1년 2개월을 키워야 성계(알을 낳을 수 있게 다 자란 닭)가 되거든요.”

그는 보통 양계장에서 쓰는 일반적인 사료도 거부했다. 닭을 연구하며 여러 가지 식재료들을 모이로 써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닭이 먹는 것들이 그대로 달걀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알아냈다. 소금물을 먹으면 달걀에서 짠 맛이 났고 일반 사료를 먹으면 분변에서 냄새가 났다. 그걸 안 이상 검증되지 않고 건강하지 않은 사료를 닭 모이로 쓸 수 없었다. 이 양계장은 쌀겨에 통영에서 가져온 굴 껍질 가루, 홍삼 달인 물, 건조한 음식물 사료, 단미사료 등을 발효시켜 직접 사료를 만들어 먹인다.

“내 가족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닭을 키우고 있어요. 기자님은 유전자 변형 옥수수로 만든 음식을 가족에게 권하고 싶나요?”

▲ 사료는 발효과정을 거쳐서 직접 만든다. ⓒ 이문예

“닭에게도 사람들에게도 미안하잖아요”

오후 1시 반이 조금 넘자 부부는 양계장 문을 확 열어젖혔다. 닭들이 축사 입구나 옆으로 난 큰 창으로 질서 있게 빠져 나왔다. 축사 밖 비탈길을 뒤뚱거리며 내려가 풀숲으로 숨어버리는 놈, 흙 바닥에 누워 날개를 퍼덕이며 몸 구석구석을 비비는 놈, 나가라고 문을 열어줘도 꼼짝 않고 축사 안에 앉아 있는 놈......  제 성격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한껏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닭들이 나간 축사 안에 있는 항아리들을 들여다보니 푸른 색 청란들이 들어차 있었다.

보통 닭들은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알을 낳는다. 그 시간이 지나면 산란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알을 관리하기 위해 1시 반에 방사를 한다. 닭들을 다시 축사로 불러 모을 때에는 어떻게 할까?

“닭도 사람처럼 자기들만의 세계가 있어요. 6시쯤 되면 신기하게도 닭들이 줄지어 축사로 몰려와요. 마치 군대처럼 ‘점호’도 하죠. 수탉 한 마리당 암탉 7마리 정도가 짝이 되니 본처와 애첩도 있어요. 혹시라도 첩닭이 시간이 됐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면 수탉이 찾아가서 꾸짖는 듯한 행동을 하고 데리고 들어오죠. 참 웃겨요. 얘네들.”

▲ 부부가 축사에서 청란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 이문예

요즘 엄재성씨는 경북대 농민사관학교 곤충학과정을 밟고 있다. 동애등에라는 파리과 유충을 이용해 시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를 분해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구더기를 먹인 닭과 청란을 생산해 내고 싶어서다. 청란을 고급화해 3000원에 판매하는 게 목표다. 한의학에서 약효를 높이기 위해 정해놓은 방법, 곧 법제(法製)에 맞게 세 차례 제조 과정을 거친 뒤 건강에 유익한 ‘약닭’을 만들고 싶은 욕심도 있다.

대량 생산을 하면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왜 이렇게 힘들게 닭을 키우느냐는 질문에 그는 미소를 띠며 답했다.

“그렇게 닭을 키우면 닭에게도 사람들에게도 미안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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