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적 책임감 일깨운 ‘고지도로 본 동해전’과 이어령 특강

미국의 테리 매콜리프 버지니아 주지사가 주내 모든 공립학교 교과서에 ‘동해’와 ‘일본해’를 함께 표기하도록 하는 법안에 최종 서명한 사실이 알려진 지난 2일. ‘세계 고지도로 본 동해’ 특별전(3.22~4.6)이 열린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은 의외로 한산했다. 오전 11시 개장 이후 이어령 특강이 진행된 중간의 2시간을 제외하고 4시간가량 전시장을 살펴봤지만 고지도를 진지하게 둘러본 이는 40대 이상 중노년층 관람객 40여명에 불과했다. 20~30대 젊은층이라곤 전시설명을 담당하는 도슨트(안내인)와, 건축물 견학을 왔다 15분 정도 전시장을 둘러보고 떠난 모 대학 건축과 학생 30여명뿐이었다.

▲ 고지도에 몰입하는 중장년층과 달리 대학생들은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어보였다. ⓒ 신은정

일본 고지도 '조선해' 표기 선명

전시회는 경희대혜정박물관, 교육부, 예술의전당 공동주최로 열렸다. 혜정박물관은 2005년 5월 개관한 한국 최초, 최대 규모의 고지도 전문박물관이다. 이번 전시에는 혜정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지도 중 `동해(조선해)` 표기가 드러난 영토, 영해 관련 고지도를 포함한 75점이 전시됐다. 유럽·미주·동아시아 국가에서 제작된 지도 뿐 아니라 일본인이 만든 지도도 여러 점 걸려있었다.

▲ '세계 고지도로 본 동해' 특별전이 열린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경과 전시회 포스터. ⓒ 신은정

김혜정(68) 경희대 혜정박물관장에 따르면 일본인이 그린 지도에서 조선해 표기가 등장하는 것은 1700년대로, 특히 1740~50년대를 거쳐 1800년대로 들어가면서 많아졌다. 전시장에는 1810년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그린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 1844년 미쓰쿠리 쇼고가 제작한 신제여지전도(新製輿地全圖), 1853년 스이도우가 만든 지구만국방도(地球萬國方圖) 등이 ‘조선해’ 표기를 선명하게 담고 있었다. 예를 들어 미쓰쿠리 쇼고가 그린 신제여지전도는 동해를 조선해(朝鮮海)로, 일본 동쪽에 있는 바다를 대일본해(大日本海)로, 먼 바다 태평양은 대동양(大東洋)으로 표기했다. 일본 스스로 동해가 한국바다임을 인정한 귀중한 자료다.

▲ (상) 김혜정 혜정박물관장이 일본인이 그린 지도만 모아놓은 전시장에서 지구만국방도를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하) 지구만국방도 부분 확대. 조선해와 대일본해라 쓰여있다. ⓒ 신은정

“조선시대였던 당시에 각국에서 그려진 지도를 보면 98~99%가 조선해로 나와요. 통계상으로 1~2%는 아니라고 하지만 저는 그런 지도를 찾기가 아주 힘들었습니다. 지도는 개인이 제멋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정책에 기반을 둔 정보입니다. 특히 동양에서 지도는 왕명으로 만들어진 국가 기밀이었고요. 그런 의미에서 지도는 최고의 정보이자 최고의 역사입증입니다. 동해가 우리바다라는 것을 우리만 주장해 온 것이 아니라 세계 각 나라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죠.” 

김 관장은 일본이 ‘일본해'를 주장하기 시작한 시점은 제국주의 팽창정책을 본격화한 1800년대라고 설명했다. 이후 100년간 일본은 일본해 표기를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1919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국제수로기구(IHO) 회의에서 동해의 국제 명칭을 결정하는 논의가 있었는데,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던 한국은 대표를 보내지 못했다. 1929년 국제수로기구는 <해양과 바다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라는 공식출판물에 우리 동해의 명칭을 일본해로 확정해 담았다. 이 시점 이후 국제 해양지도에서 동해표기가 급격히 줄었다. 전시주최측에 따르면 2014년 현재 세계지도의 동해표기는 일본해가 70%, 동해‧일본해 병기가 22%, 동해 단독표기가 8%다.

▲ 일제강점기 한국은 영토뿐아니라 영해의 명칭도 빼앗겼다. 전시회 상영 동영상 기자 재편집. ⓒ 혜정박물관

현재 우리 정부는 ’몇 개 주권국가의 영향 아래에 있는 바다가 한 이름으로 통용되기 어려울 경우 새 이름이 정해지기 전까지 관련된 나라가 사용하는 명칭을 모두 표기해야 한다‘는 1974년 국제수로기구 결의안에 근거해 '동해/일본해(EAST SEA/JAPAN SEA) 병기’를 주장하고 있다. 이 문제는 오는 2017년 모나코에서 열리는 제19차 국제수로기구 총회에서 다시 논의될 예정이다.

지난 40여 년 간 고지도를 수집해 온 김 관장은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바다의 명칭을 뺏기면 역사도 뺏기는 것이므로 장래 한일관계와 세계평화를 위해 올바른 명칭을 찾아야 한다”며 “일본은 역사왜곡을 하지 말고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령 전 장관, "일본에 뺏긴 이름과 문화 찾아야"

같은 날 오후 1시부터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동해의 문명학적 이해:해상문명과 대륙문명의 접점으로서 한반도’ 강연에서 이어령(80) 전 문화부장관 역시 동해 표기를 한시 바삐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어령 전 장관은 요즘 몸이 불편해 강연을 거의 하지 않는데 한‧중‧일관계와 세계정세가 염려돼 이 자리에 서게 됐다고 했다. 그는 예정된 시간을 꽉 채우고도 전하려던 내용을 다 전하지 못했다며 무척 아쉬워했다. ⓒ 신은정

“고지도에는 다 조선해라 돼 있지만 국외에서는 동해를 일본해로 알고 있는 비율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표기하는 방식으로) 애국가를 번역하게 되면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영어로 번역했을 때 (동해는) ‘씨 오브 재팬’이 됩니다.”
 
이 전 장관은 일본이 동해병기를 방해하고 일본 정치인들이 (전범을 기리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것, 위안부 관련 망언을 쏟아내는 것에 대해 2011년 ‘3.11 쓰나미’ 이후 국가적으로 새로운 비전을 찾지 못한 탓이라고 분석했다. 그래서 일본이 살 길은 이성과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제국주의‧군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란 점을 전후에 훈련받은 일본 지식인들이 주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중‧일을 통틀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민을 오도하는 정치지도자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국민 전체가 세계정세와 문명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상대국의 논리에 객관적이고 타당한 근거를 들어 반박하는 능력도 갖춰야 하고요.”

'지정학적 황금기'에 맞는 인재 찾아야

그는 일본이 동해의 이름을 도둑질한 것과 함께 동아시아 각국의 ‘생명자본’도 많이 뺏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매화, 단정학, 옻칠, 초롱꽃 등은 모두 일본 것이 아닌데 세계에 일본 문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이 원산지인 매화는 국제적으로 ‘일본살구꽃(Japanese apricot flower)’으로 불리고, 우리가 장롱이나 병풍 그림에서 자주 보는 단정학의 학명도 ‘일본학(Grus japonensis)’으로 학계에 등록되어 있다. 고려인이 일본인에게 가르친 옻칠은 ‘재팬’이라 불린다. 우리나라 금강산에만 자라는 초롱꽃은 일본인이 1911년에 하나부사야(Hanabusaya)와 나가이(Nakai)라는 두 일본인 이름이 들어가는 학명으로 등록했다. 이 전 장관은 이런 것들이 모두 이름과 문화를 함께 뺏긴 사례라고 지적했다.

▲ 국어와 국토를 지키려는 의식이 없으면 우리문화를 지킬 수 없다. 이어령의 80초 생각나누기 '누구나 시인'편 기자 재편집. ⓒ 이어령

“우리가 근대를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우리 문화가 세계에 중국문화, 일본문화의 일부로 소개되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자연 속 가치인 생명자본을 발견해 일본문화로 통하게 만드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습니까. 나는 무국적자 소리를 들을 만큼 국수주의자도, 민족주의자도 아니지만 잃은 것은 후손을 위해 찾아야 합니다.”

이 전 장관은 이와 함께 한반도의 지정학을 이해하고 ‘유라시아 의식’을 갖도록, 자라나는 세대를 잘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영국‧미국‧일본으로 대표되는 해양세력이 점차 쇠락하고 중국‧러시아‧인도로 대표되는 대륙세력이 떠올라, 한반도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맞부딪치는 지정학적 황금위치에 있게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다. 한국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서울, 부산, 일본 후쿠오카를 잇는 미래 아시아 지중해의 중심지가 될 것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이 전 장관은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볼 때 한국이 각각 파란선을 따라 왼쪽으로는 북아메리카로 위쪽으로는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거점이 될 것이라 했다. ⓒ 신은정

이 전 장관의 강연을 듣고 전시장을 둘러본 정하완(67)씨는 “우리 세대는 일본식 교육을 받은 선생님들에게 배웠다”며 “시대가 다른 만큼 일본의 주장이 단순히 틀렸다고 얘기하는 수준이 아니라 일본인이 만든 근거를 활용해서 그들의 주장에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한다”고 공감했다.

학교에서도 동해 표기 중요성 제대로 안 가르쳐

한편 <단비뉴스>가 국가교육과정 정보센터 자료를 조사한 결과 2009년 이후 우리나라 고등학교 사회과 교육과정에서 ‘동해’ ‘동해 이름’ ‘동해 표기’ ‘동해 병기’ ‘일본해’ 등을 다룬 내용은 한 건도 검색되지 않았다. 김 관장과 이 전 장관이 지적한 것처럼 ‘빼앗긴 동해 이름’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원대 송호열(54) 교수도 지난 2일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토론회에서 ‘한국 영토교육의 현황과 과제’ 발표를 통해 독도에 비해 동해 표기와 관련한 교육이 소홀함을 지적했다. 송 교수는 지난 17일 <단비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동해 문제는 국내 학자들 사이에서도 ‘동해 단독 표기’와 ‘한국해 등 구체적 이름으로 표기’, ‘동해와 일본해 병기’등으로 해결방안이 엇갈리고 있다”며 이런 합의부재가 교과서에서 매우 소극적으로 다뤄지는 배경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앞으로 우리는 배타적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영토갈등을 부추기는 일본·중국과 달리 성숙한 세계시민을 키우는 것을 목적으로 (역사적 근거를 갖고) 이성적 주장을 펼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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