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 상륙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가 속속 전투대형으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다.’ 단어 두 개를 가리고 읽으면 전쟁 르포 같지만, ‘이케아’가 상륙하면서 국내 ‘가구업계’가 긴장하고 있다는 경향신문 기사의 첫 문장이다. 그런데 상륙전이 공중강습으로 바뀌었나? 기사 제목은 ‘스웨덴 이케아 공습에 전운 감도는 가구업계’(3월6일자)다.

이 기사에는 ‘작전’ ‘상륙 지점’ ‘대형 진지’ ‘보급로 선점’ 등 전쟁 용어뿐 아니라 ‘토털 인테리어 브랜드’ ‘퍼니테인먼트’ ‘제품 라인업’에 ‘매장을 오픈했다’ 등 조어법도 이상한 외래어까지 수없이 등장한다. 외래어 남발 문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서는 신문 언어의 공공성 문제를 집중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전쟁 용어는 기사를 전쟁처럼 치열하고 박진감 있게 쓰려는 의도인지는 몰라도 너무나 남발돼 폐해가 크다. ‘직격탄’ ‘살생부’ ‘대학살’ ‘진검 승부’ 등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살벌한 전쟁의 언어가 정치·경제·사회 기사는 물론이고 문화·스포츠 기사에도 넘쳐난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인데 이런 언어가 난무하는 사회에 평화와 공존, 상생의 정신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

외국신문들도 전쟁 용어를 더러 쓴다. 특히 황색지들이 제목을 선정적으로 달 때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권위지가 우리 신문들처럼 전쟁 용어를 남발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 아마도 기자사회의 주류였던 한국남성의 군대 경험과 전쟁터처럼 치열한 삶의 현장, 그리고 살벌한 정치가 요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볼 따름이다.

신문 언어의 공공성 측면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비민주, 반노동자, 반생태, 서울중심, 성차별, 신체비하 혐의가 짙은 단어들이다.

선거철을 맞아 대거 등장하는 ‘텃밭’ ‘표밭갈이’ 같은 표현은 국민을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여기는 비민주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말이다. 민주주의 시대에 왕정이나 국가주의 시대 유물인 ‘시해’ ‘진노’ ‘석고대죄’ ‘진언’ ‘하야’ ‘대권’ ‘통치’ 같은 단어들이 문맥에 맞지 않게 사용되는 사례도 허다하다. ‘시해’를 예로 들면, 경향신문 기사 ‘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2013년 10월5일자) 사진설명에는 “김재규가~ 현장검증에서 박정희 시해를 재현하고 있다”는 구절이 있다. ‘시해’는 ‘부모나 임금을 죽임’이라는 뜻인데, ‘박정희 시해’란 말이 온당한 표현일까.

대통령이 화내면 ‘진노했다’는 표현을 쓰는데 ‘진노’는 ‘존엄한 사람이 몹시 노했다’는 뜻이니 권위주의 냄새가 짙다. 경향신문 기사 ‘장성택 실각, 북·중관계에 어떤 영향?’(2013년 12월10일자)에도 “장성택의 실각에 중국이 진노하고 있다는 말들도 나오고 있다”고 썼다.

‘석고대죄’는 ‘거적을 깔고 엎드려서 임금의 처분을 기다리던 일’이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가 ‘박근혜씨’라고 호칭하자 새누리당 홍지만 원내대변인은 “이 대표는 석고대죄해도 부족하다”고 일갈했는데, 거의 ‘주군’을 떠받드는 태도다.

‘근로자’라는 단어에는 노동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들어있다. ‘근로자(勤勞者)’는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좀 쉬면서 일하면 안되는 사람인가? ‘근로기준법’도 이름 자체가 잘못 지어졌다. 진보의 한 상징인물이 된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마저 경기지사로 출마하며 ‘저임금근로자를 위한 생활임금 조례 추진’을 공약으로 내걸 정도이다. ‘부지런히 일해도 저임금을 받는다’는 심오한 뜻이 들어있는지는 몰라도 ‘저임금노동자’가 바른 이름이다.

 

 

▲ 말에 끼어든 잘못된 생각들
 ‘근로자’ ‘철밥통’ ‘민영화’…

▲ 비민주, 반노동자 말 난무
 신문 언어 공공성 회복 시급

▲ 정책 왜곡 초래하는 대통령 ‘암덩어리’ 발언
 진보언론은 왜 비판 않나

‘철밥통’이란 말도 보수세력이 이른바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진할 때 등장한 반노동자적 표현이다. 지난해 12월 철도파업은 주목적이 ‘사영화’ 저지에 있었는데도 보수언론은 예외 없이 ‘철밥통’ 담론을 들고 나왔다. 더 많은 연봉을 받는 젊은 기자들이 중년 철도노동자의 6000만원 연봉을 비난하는 근저에는 육체노동을 얕잡아보는 심리가 깔려있다. 실업자와 비정규직이 1000만명에 이르고 40~50대 퇴직자가 많은 노동환경을 고려할 때 ‘철밥통’은 고용안정을 위해 정부가 오히려 권장해야 할 일 아닌가.

‘민영화’란 용어도 잘못 쓰이는 말 중 하나인데 ‘사영화’라 불러야 마땅하다. ‘민영화의 목적이 경쟁촉진에 있다’고 말하지만 공기업이 대재벌 계열사가 되어 독과점을 부추긴 사례가 많다. 영어로도 ‘사영화’(privatization)라 부르는 것을 ‘민영화’로 번역한 데는 ‘사영화’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려는 정부와 언론의 의도가 반영된 듯하다.

철도파업 때 최연혜 코레일 사장은 “회초리를 든 어머니의 찢어지는 마음으로 직위해제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최 사장보다 한참 나이 많은 철도노동자들이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이 어땠을까? 나이 어린 계모에게 회초리로 얻어맞는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노사 간을 부모자식 간으로 본 것은 노동에 대한 인식 부족을 드러낸 것이다. 최 사장은 “마지막 최후 통첩을 내린다”며 파업 노동자들을 자극하기도 했다. ‘최후 통첩’이라는 전쟁 용어를 쓴 것은 노동조합을 적으로 보는 노사관을 드러낸 것이다. 

최 사장은 노조간부 130명을 파면·해임하는 등 404명을 징계한 데 이어 단순 가담으로 직위해제된 8393명도 징계위원회에 회부해 책임을 묻기로 했다는 보도가 지난 2월28일 일제히 나왔는데, 경향신문은 어찌된 영문인지 당일 보도를 하지 않았다. 수백개 가정이 파괴되는 상황인데, 진보언론들은 심층보도를 통해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노조가 사용하는 언어에도 비민주성이 드러나는 때가 많다. 김명환 철도노조위원장은 지난해 12월26일 전화를 통해 노조원들에게 “민영화 중단을 위한 총파업 투쟁 명령을 전달한다”고 말했다. “투쟁 명령을 전달한다”고 말하는 대신 “투쟁을 호소한다”고 말했더라면 더 호소력이 있지 않았을까.

대통령의 공식 발언은 정말 신중해야 한다. 그러지 않아도 ‘제왕적 권력’을 쥔 사람이 말을 절제하지 않으면 그 부작용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천박한 물신주의를 그대로 드러낼 뿐 아니라 북한에는 흡수통일을 떠올리게 해 남북관계 개선에도 도움이 안된다. 박 대통령은 규제를 ‘쳐부술 원수’와 ‘암덩어리’로 규정하고, ‘사생결단하고 붙지 않으면’ ‘천추의 한을 남긴다’고도 했다. 경제성장에 조바심을 내는 듯한 일련의 발언은 그 역효과가 매우 클 것으로 예상된다. 경향신문은 박 대통령의 말을 보수언론들보다 하루 늦은 13일자 신문에 조그맣게 묶어 보도하고 말 자체의 부작용을 지적하는 해설기사도 내보내지 않았다.

규제 중에는 풀어야 할 것도 있지만 상당수는 필요한 이유가 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확대 공약을 포기하고 규제 푸는 것 등을 뼈대로 하는 ‘줄푸세’로 전환하려면 선거 때 국민의 동의를 얻어야 했는데도, 대통령의 말 몇 마디에 ‘규제 폐기’ 광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대통령 발언이 저렇게 강하면 정부부처들은 자율성을 잃고 무리한 조처를 내놓기 마련이다. 그린벨트 규제 완화는 역효과가 나타나는 신호다. 그린벨트는 박정희 대통령이 잘한 일 중 하나지만 딸이 아버지 청산에 나선 꼴이다.

독재는 말로부터 시작된다.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썼듯이 말을 제한하면 생각을 제한할 수 있고, 나아가 행동까지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이 던지는 화두와 험악한 말 또한 말의 자유와 상상력을 옥죄는 경우가 많다. 경향신문이 잘못 사용되는 말의 부작용을 지적하고 말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섰으면 한다.


 * 이 기사는 <경향신문>과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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