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바람 밝은 달, 그곳에 산다] ② ‘해피 버스데이’의 시인 오탁번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간 박달도령과 그를 기다리다 상사병에 걸려 숨진 금봉낭자의 전설이 깃든 충북 제천시 박달재. 소나무 오종종히 서 있는 그 고갯길을 따라 백운면 애련리로 들어가다 보면 폐교된 백운초등학교 애련분교를 고쳐 지은 원서문학관이 나온다. 배우 설경구가 달려오는 열차를 향해 “나 돌아갈래”하고 절규하던 영화 <박하사탕>의 그 기찻길 장면을 찍은 진소마을 앞이다. 

▲ 충북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 원서문학관. 오탁번 시인은 폐교된 초등학교 운동장에 텃밭을 일구었다. ⓒ 유순상

‘폭설’, ‘해피 버스데이’의 시인 오탁번(72)은 기자가 찾아간 지난해 10월 20일 원서문학관 마당에서 맨손으로 마늘밭 거름을 섞고 있었다. 시어를 엮어 문장을 만드는 글짓기처럼 농사도 시작할 땐 제대로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난 2003년 이곳으로 귀향한 오 시인은 이웃 농부들로부터 흙을 일구고 비료 쓰는 법 등을 귀동냥해가며 텃밭을 가꾸었다. 농사가 주는 기쁨은 수확이 다가 아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말처럼 자연과 어울리며 깨닫는 신비로움이 크고, 그것은 곧 시가 되었다.

마늘밭 씨마늘처럼 왕겨 덮고
춥고 혹독한 겨울을 지나온 나는
소쩍새 울음처럼 마늘쫑도 싱그러운
잘 생긴 육쪽 마늘이 된 줄 알았다
참숯마냥 빛나던 머리칼
어느새 다 없어진 오늘,
아뿔싸!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퍼마켓에서 파는
표백제 바른 깐 마늘이 되었음을
나는 이제 알겠다 
(‘마늘’ 중에서)

천등산 아래서 지독한 가난 겪었던 수재

오 시인의 서재에서 소주병을 앞에 놓고 시작한 인터뷰는 사연 하나에 시 한편으로 이어졌다. 상처 같은 시를 읊다 슬픔에 젖을 때면 시인은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두어 시간 동안 둘이서 소주 두 병을 비웠다.

▲ 원서문학관 안에 있는 오 시인의 서재에서 소주를 나눠 마시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 유순상

오 시인은 1943년 제천시 백운면에서 마을 이장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자부심 강한 양반의 후손으로 일제강점기 때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텼던 아버지는 오 시인에 세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홀로 삯바느질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 가난에 전쟁까지 겹쳤던 어린 시절, 오 시인은 ‘먹을수록 배고픈’ 천등산 진달래꽃을 따먹으며 굶주림을 견뎌야 했다. 피난 갔다 왔더니 잿더미가 돼 버린 마을에서 움막을 짓고 산나물 죽을 끓여 먹기도 했다. 영양실조에 기생충, 야뇨증에도 시달렸다.

국민(초등)학교 6년 내내 1등을 차지해 도지사상을 받을 정도로 명석했지만 중학교 진학은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오 시인이 다니던 백운초등학교에 권영희 선생이 부임하면서 희망이 생겼다. 권 선생은 가난하지만 영특했던 오탁번을 끔찍이 아껴주고 중학교 입학금까지 대주었다. 또 강원도 원주에 살던 오빠에게 부탁해 숙식 일체를 책임져 주었다. 소년의 운명이 바뀌었다.

누나다 누나다 선생님이 이젠 누나다
영희 누나다 영희 누나다
개울물 반짝이는 평장골 뒷개울에서도
고드름 떨어지는 겨울 한나절에도
누나와 동생으로 꾸는 꿈은
솔개그늘처럼 아늑했다
영희 누나가 있으면 배고프지 않았다
울지도 않고 숙제도 잘했다
영희 누나한테 착한 어린이가 되지 못한 날은
꿈속에서 벌서며 오줌을 쌌다
(‘영희 누나’ 중에서)

▲ 1954년 오탁번 시인이 12살 때의 흑백사진을 바탕으로 스케치했다. 왼쪽 위부터 둘째형 탁승, 셋째형 탁운, 오른쪽이 권영희 선생. 아래가 누나 탁분이다. ⓒ 유순상

하지만 권 선생의 도움은 한 해를 넘기지 못했다. 중고생 오탁번은 입주 가정교사 등을 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가난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기름진 밥 먹고 용돈 든든히 받아가며 공부하는 친구들이 부럽고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러웠다.

“친구 집에서 입주 가정교사를 하며 숙식을 하고 있었는데 밥숟가락에 물이 떨어져. 눈물이야. 넉넉한 집에 사는 친구에게 계속 열등감을 느꼈던 거지. 숟가락 놓고 학교 가서 선생님에게 못 다니겠다고 말했지. 그날로 학교를 그만뒀어.”

더 이상 학교는 안 나갔지만 원주고등학교는 어찌어찌해서 오 시인에게 졸업장을 주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22살에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고대신문 편집장, 고대 ‘응원의 노래’ 작사가가 됐고 30년 동안 모교의 국문학과 교수생활을 했다. 오탁번은 잠시 말을 멈췄다. 눈시울이 붉어져있다. “돌아보니 우습다”고 한숨  쉬듯 내뱉는다.

그의 글 실력은 원주고등학교 시절부터 빛을 발했다. 청소년문예지 <학원>에 시와 산문이 여러 차례 실렸고 고3때 시 <걸어가는 사람>으로 학원문학상을 받았다. 고대신문사 기자를 하던 24살 때는 동화 <철이와 아버지>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이듬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는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으로 입상했다. 군 입대를 앞두고는 소설 <처형의 땅>으로 등단했다. 동화, 시, 소설 세 장르에 모두 ‘싹수’를 보였던 셈이다. 이후 <손님>, <우리 동네> 등 시집 8권, <현대시의 이해>, <헛똑똑이의 시 읽기> 등 평론집과 산문집을 다수 발표했다. 1997년에 시 ‘백두산천지’로 제9회 정지용 문학상을 받았고 2008년에는 38대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여러 시 작품 중에서도 ‘백두산천지’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이 시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나온 신생아와도 같아요. 건강이 시원찮은 나를 모태로 한 죄로 마음속에서 다시 잉태되고 발육되는 일이 반복되다가 이제 비로소 가장 단순한 모음으로 이 세상을 향하여 첫울음을 울고 있는 거죠.”

하늘과 땅 사이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천지가 그대로 하늘이 되고 구름결이 되어 백두산 산허리마다 까마득하게 푸른하늘 구름바다 거느린다 화산암 돌가루가 하늘 아래로 자꾸만 부스러져 내리는 백두산 천지의 낭떠리지 위에서 나도 자잘한 꽃잎이 되어 아스라한 하늘 속으로 흩어져 날아간다 아기집에서 갓 태어난 아기처럼 혼자 울지도 젖을 빨지도 못한다 온가람 즈믄 뫼 비롯하는 백두산 그 하늘에 올라 마침내 바로 서지도 못하고 젖배 곯아 젖니도 제때 나지 못할 내 운명이 새삼 두려워 백두산 흰 멧부리 우러르며 얼음빛 푸른 천지 앞에 숨결도 잊은 채 무릎 꿇는다  (‘백두산천지’ 중에서)

익살과 유머로 버무리는 즐거운 시 작업 
 
인터뷰 도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충북 청주의 한 신문사에서 문화행사의 시 낭송을 부탁하는 전화다. 사양할  듯하다가 결국 약속을 잡는다. 오탁번의 시에는 특유의 천진함과 자유, 유머가 넘쳐난다. 그래서 전국의 시낭송회에 자주 초대된다.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폭설)’ 등 눈치 보지 않는 표현들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박현수 경북대 국문과 교수는 “오탁번의 익살은 삶의 틈새를 진솔하고 자유롭게 오가는 시원시원한 행보에서 시작한다”고 평했다.

“내가 원래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지. 어렵게 자랐지만 유년시절부터 장난기가 많았어. 시란 것이 이념이나 사상을 담기엔 한계가 있지. 서동요나 헌화가를 봐. 다 ‘놀이’면서 시잖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주 슬프게 탄식하는 소리는 웃음소리와 닮아 있어. ‘허허!’를 생각해봐."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버스데이!
(‘해피 버스데이’)

오 시인은 젊은이들이 문자메시지 등을 쓸 때 애용하는 이모티콘(그림문자)이나 특수문자도 자유롭게 활용한다. 체면과 규범에 갇히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국어사전을 베개처럼 안고 산다고 한다. ‘홰친홰친(낚싯대에 물고기가 걸린 것처럼 탄력 있는 물체가 흔들거리는 모양새)' ‘다람다람(물방울 따위의 자그마한 물건들이 잇따라 매달려 있는 모양)’ ‘눈흘레(눈요기로써 상대를 보며 성교하는 일을 상상하는 것) 등  잘 모르던 우리말을 찾은 날엔 위스키 한 잔 ’원샷‘하고 산삼 찾은 심마니 마냥 동네를 쏘다닌다고 말했다.

저항의 시대에도 서정시에 탐닉한 시인

오 시인은 ‘향수’의 시인 정지용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80년대 민중시가 유행할 때도 대학에서 서정주 시론을 강의했다. 제자에게는 ‘통영’ ‘고향’의 시인 백석을 연구시키기도 했다. 서정시를 가르치면 비겁자로 몰리기도 했던 시대였다. 학생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일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일부 진보성향 시인들이 대자보처럼 시를 쓰는 게 못마땅하다고 말했다.

“민중시의 치열성은 의의가 있다손 치더라도 대자보의 격문과 다를 게 없어. 나는 언제나 문학 작품으로 현실을 다룰 때는 그 현실조차도 문학의 일부가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문학의 위쪽이거나 혹은 아래쪽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거든.”

걸레처럼 살면서 / 깃발 같은 시를 쓰는 척하면 된다 / 걸레도 양잿물에 된통 빨아서 / 풀 먹여 다림질하면 깃발이 된다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 중에서)

오 시인은 수도여자사범대학을 거쳐 36살부터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일했다. 2008년 8월에 같은 대학 최장집 교수(정치학)와 함께 정년퇴임했다. 교수라는 안정된 자리에서 작품 활동으로 상도 타고 하니 문단의 시기와 질투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밤새 고민하며 써낸 시를 ‘가벼운 재주 자랑’으로 폄하하는 시선에 가슴앓이도 많이 했다. 하지만 세월은 그 모든 것을 지나가게 만들었다.

“70년대 고대 교수하니까 내가 술값을 내는데, 전업 작가들이 부러워 죽으려 그래. 그런데 10년 전인가 청계산 밑에서 최인호 씨를 만났어. 일주일에 두세 번 산을 타더라고. 짜식이 차를 마시면서 하는 말이 ‘오 형도 소설 쓸 걸 했어’라는 거야. 히트작가가 돼서 나보다 돈벌이가 더 좋다는 거지. 역전이 된 거야(웃음).”

교육 못 받았지만 큰 어른이었던 어머니

오탁번에게 ‘유일한 종교’는 어머니다. 나이 서른에 오탁번을 낳고 서른셋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안 나왔지만 한문을 스스로 깨우쳤고 인정이 많아 마을에서 큰 어른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늘 오 시인을 전폭적으로 믿었다. 고등학교를 그만뒀을 때도 “탁번이 냅둬라, 내가 안다”고 한마디 한 것이 다였다. 

“어머니는 나에게 큰 바위 얼굴, 북한식으로는 최고 존엄이었지.”

▲ 오탁번 시인은 원서문학관 앞에 어머니 조각상을 세워놓고 늘 아침저녁으로 문안한다. ⓒ 유순상

오 시인은 원서문학관 앞에 어머니의 조각상을 세워놓고 노란 국화꽃을 올려놓았다. 힘들 때면 초롱불을 들고 마당에 나와 돌아가신 어머니와 ‘교신'한다. ‘안심하여라. 너는 험한 꼴은 보지 않는다.' 비행기를 탈 때도 고속도로를 운전할 때도 늘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머니 어머니
하관의 밧줄이 흙에 닿는 순간에도
어머니의 모음을 부르는 나는
놋요강이다 밤중에 어머니가 대어주던
지린내나는 요강이다 툇마루 끝에 묻힌
오줌통이다 오줌통에 비치던
잿빛 처마 끝이다
이엉에서 떨어지던 눈도 못 뜬
벌레다
밭두럭에서 물똥을 누던
어머니가 뒤 닦아주던 콩잎이다 눈물이다
저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모를 뿌리들의 풀꽃으로 돌아오고
(‘하관’ 중에서)

60년 만에 돌아온 고향, 배고팠던 시인을 키운 곳

▲ 충북 제천시 백운면의 원서문학관 전경. ⓒ 유순상

오 시인은 지난 2003년 백운국민학교 애련분교의 부지와 건물을 샀다. 자신이 다니던 국민학교의 분교다. 교실 세 칸과 숙직실, 안채를 손보아 아담한 문학관을 만들었다. 제천과 원주 일대를 둘러보다 결국 ‘삶의 밑변'이었던 천등산 박달재 아래로 자리 잡았다. 문학관의 이름은 원서헌(遠西軒), 제천에서도 먼 서쪽이라는 뜻의 조선시대 지명이다. 해가 지는 곳이다.

“서방정토(불교에서 말하는 서쪽 끝의 극락세계)의 심상이 떠오르게 하지. 서쪽은 해가 기우는 땅으로 몰락을 의미해. 그런데 소멸은 곧 생성의 출발이기도 하거든. 그런 의미에서 ‘먼 서쪽'이라는 뜻의 ‘원서'라는 이름이 그윽하고 좋게 다가왔어."

원서문학관은 누구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곳이 아니라 누구나 와서 둘러보고 글을 쓸 수 있는 곳이다. 매년 여름방학에 지역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무료 어린이시인학교를 열었다. 각지에서 온 시인들이 자원봉사를 했다. 또 ‘원서문학관 시의 축제’를 열어 야생화와 농부, 모국어 등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오 시인은 이제 학생들 보다는 시 선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혼자 이 모든 일을 하려니 작은 몸뚱이가 힘겨워. 요즘 시 교육이 엉망이거든. 교육자들을 상대로 재교육을 하고 싶어. 그게 내 역할이기도 하고.”

전생(前生)의 꿈을 꾸듯 찾아온 고향에 손윗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오 시인은 젊은 시절 ‘라라(영화 <닥터지바고>의 여주인공)’라고 불렀던 부인 김은자(한림대 국문과) 교수와 함께 이곳에서 ‘느린 삶’을 즐길 생각이다. 텃밭에 심은 채소와 함께 고기를 구워먹으며 정겨운 손님들과 두리반(둘러앉는 밥상) 밥 냄새를 풍기며 살고자 한다.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풍겨오는
맛있는 밥냄새를 맡고
내가 어머니의 등에서 울며 보채면
장지문을 열고 진외당숙모가 말했다

언놈이 밥 먹이고 가요
그제야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밥소라에 퍼주는 따끈따끈한 밥을
내가 하동지동 먹는 걸 보고
진외당숙모가 나에게 말했다

밥때 되면 만날 온나

아, 나는 이날 이때까지
이렇게 고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젖을 못 먹고
밥조차 굶주리는 나의 유년은
진외가 집에서 풍겨오는 밥냄새를 맡으며
겨우 숨을 이어갔다 
(‘밥냄새’ 중에서)

*진외가: 아버지의 외가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생태공동체를 꾸리거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맑은 바람 밝은 달,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 충청북도에는 유독 사연 많고 소신 있는 예술인과 공동체운동가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다. <단비뉴스>는 이렇게 충북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문화인과 활동가들을 찾아 나섰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인 CJB청주방송 황상호 기자가 글을 쓰고 서양화가 유순상 씨가 사진기와 붓을 들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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