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로그인 회원가입
2017.11.24 금
> 뉴스 > 지역 > 인터뷰
     
소리계의 ‘펑크록커’ 산에서 부르짖다
[맑은 바람 밝은 달, 그 곳에 산다] ① 경서도 소리꾼 권재은
2013년 12월 18일 (수) 16:43:04 황상호 기자 uq2616@gmail.com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생태공동체를 꾸리거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맑은 바람 밝은 달,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 충청북도에는 유독 사연 많고 소신 있는 예술인과 공동체운동가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다. <단비뉴스>는 이렇게 충북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문화인과 활동가들을 찾아 나섰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인 CJB청주방송 황상호 기자가 글을 쓰고 서양화가 유순상 씨가 사진기와 붓을 들었다. (편집자)

충북 충주시 신니면 부용사 자락의 호젓한 산골. 주인 모를 납골당 아래 빨간색 벽돌집이 교교하게 서 있다. 주황색 불빛이 환한 창은 온통 깜깜한 산골에 둥실 뜬 달처럼 보인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30평 남짓한 실내에는 첩첩히 쌓인 책 더미와 찻그릇, 유화가 널린 공간 사이로 재즈음악이 흐르고 있다. 마른 뺨에 이마가 도드라진 얼굴, 뒤로 묶은 꽁지머리의 경서도 소리꾼 권재은(55)이 거기 앉아있었다. 

“소리가 별 것 있나요. 누구도 흉내 내지 않고 내 안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말하는 거죠.” 

   
▲ 충주시 신니면 소리마을에서 혼자 지내는 권재은. 소박한 옷차림과 뒤로 묶은 꽁지머리에서 자유로움과 함께 고집이 묻어나온다. ⓒ 유순상

판소리가 소설이라면 경서도 소리는 시

경서도 소리는 서울과 경기, 충청 일부 지역에서 부르는 경기민요와 평안도, 황해도 중심의 서도민요를 묶어 일컫는 말이다. 판소리 등 남도 소리는 뱃속에서 시작해 목과 가슴을 울리는 탁성이지만 경서도 소리는 비성(鼻聲)과 두성(頭聲)을 쓰는, 날 서고 강한 소리다. 판소리가 7~8시간 눅진하게 뽑는다면 경서도 소리는 5, 6분 동안 짧게 부른다. 그래서 경서도 소리꾼은 남도 소리를 하지 않고 남도 소리꾼은 경서도 소리를 하지 않는다. 최근 케이티(KT)광고로 ‘국악 아이돌'이라 불리고 있는 송소희 양이 경서도 소리 전공이다. 

“판소리가 소설이라면 경서도 소리는 시예요. 기교도 많죠. 사설(소리와 소리 사이 줄거리를 설명하는 부분)도 달라요. 판소리는 ‘춘향이가 오는디’하고 전라도 말을 쓰지만 경서도 소리는 서울말을 주로 쓰죠."

판소리가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세계의 주목을 받은 반면 경서도 소리는 상대적으로 빛을 못 봤고 입문서 하나 찾기 어렵다. 그래도 고집스레 경서도 소리를 하는 권재은에 대해 전통음악 전문가 양정환은 “거친 듯 섬세한 소리는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의 음악”이라며 “공력이 있다”고 평했다. 

   
▲ 으뜸가는 소리를 위해서는 소리꾼과 함께 분위기를 끌고 당기는 고수(鼓手) 역할이 중요하다. 하지만 권재은은 녹음할 때 직접 장구를 치며 소리를 뽑는다. ⓒ 유순상

권재은은 1958년 충주의 한 과수원집 아들로 태어났다. 들녘에 울려 퍼지는 농요(농사일 하면서 부르는 노래)를 음반처럼 들었다. 12살 때 경로당 할아버지가 읊는 시조를 배웠고 학교에선 풍금도 곧잘 쳤다. 그런데 갈수록 건반보다는 시조와 꽹과리에 더 빠져들었다. 등굣길 김매는 소리에 정신이 팔려 학교도 거르기 일쑤였다. 

“그냥 좋았어요. 그 당시만 해도 농요, 상여소리(상여를 운반하며 부르는 노동요)가 남아있었거든요. 그런 생활 속의 음악이 좋아 따라다녔어요.” 

황금빛 색채 <키스>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버지가 금 세공사였던 것처럼 권재은의 음악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요즘 말로 전통음악 애호가셨어요. 아버지는 가설무대나 약장수 나오는 무대가 있으면 어머니하고 구경을 가셨죠. 그때 나는 걷고 동생들은 어머니가 들쳐 업고 말이죠.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평론을 하시는 거예요. 누구 소리는 어떻고 말이죠.” 

   
▲ 권재은이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은 오디오와 차 그리고 음반이다. 과거 오토바이에 빠진 적도 있다고 한다. ⓒ 유순상

하지만 아버지는 막상 권재은이 음악을 하겠다고 하자 격렬히 반대했다. 권재은은 열 예닐곱 살 무렵 집에서 기르던 소를 팔아 몰래 상경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일 년치 대학등록금쯤 되는 돈을 챙겨들고 나온 것이다. 그가 처음 찾아간 곳은 서울 종로에 있던 청구고전학원이었다. 그곳에서 무형문화재 벽파 이창배 선생으로부터 경서도 소리를 사사했다. 22살에 한국방송공사(KBS) 민요백일장에서 최연소 연말장원, 이듬해 전국 민요경창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잇따른 수상으로 ‘명창’이란 수식을 달고 다니게 됐다. 이후 ‘권재은 소리뎐 만화방창’ 등 크고 작은 발표회와 각종 행사에서의 공연, 2장의 음반 발표 등 음악인생을 이어왔다. 하지만 권재은은 계보가 중요한 소리계에서 스승에게 배우는 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선생님들에게 배운 시간이 전부 모아도 3년이 안 돼요. 한 선생님께 소리를 꾸준히 배우면 한 색깔인데, (여러 스승에게 배우면) 나중에 색동저고리처럼 부분적으로 표시가 나거든요. 난 누구 밑에 들어가서 배우는 대신 나만의 소리를 찾고 싶었어요. 그래서 떠돌아다니며 민요채록을 했어요." 

암울했던 시대, 광장을 누비다  

권재은은 민요대회에서 수상한 뒤 24살부터 집회현장을 다녔다. 1989년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지지 자선공연인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를 건국대 충주 캠퍼스를 시작으로 전국 28개 대학에서 순회공연 했다. 가수 정태춘과 ‘통일비나리'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기존 비나리(재앙과 액을 멀리 물리치고자 하는 굿소리) 선율에 창작한 사설을 얹었다. “이 구석에서 퇴폐살, 저 구녕엔 향락살, 이 마당에 사대살, 저 바닥에 종속살...” 시쳇말로 ’라임(운율)‘이 딱딱 맞는 공연이었다.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민예총) 기금마련을 위한 공연도 했다. 민예총 충주 초대지부장도 맡았다. 

“자연스러웠어요.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으니까. 음악 하는 사람들하고 문학 하는 사람들, 종교인들이 자주 만나잖아요. (유신에 저항했던) 지학순 주교와 ‘한살림’을 만들었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도 뵀으니까요. 나는 음악 하는 사람이니까 꽹과리를 들고 나서게 되고. 그 당시에는 춥고 배고픈 사람에게 귀라도 즐겁게 해주자는 생각을 했어요. 나중에는 전담 경찰관도 생기더라고요.”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농무’의 민중시인 신경림이다. 신경림은 자신의 책 <사람 사는 이야기>에 권재은 얘기를 썼다. “그가 꽹과리를 치고 나서면 망설이던 지역민들이 따라 나서서 절로 데모가 형성되고는 했다." 권재은이 94년 이후 충주에 정착하게 된 것도 이 지역 출신인 신경림 시인이 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권재은의 인생은 평탄하지 않았다. 소리를 시작하고 계속 힘들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은 아니었지만 집을 나온 뒤 중국집과 일식집 종업원, 구두닦이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징이나 꽹과리 깨진 것을 팔아서 차비로 쓰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계속 어렵다보니 결혼 생활도 금이 갔다. “이혼의 후유증이 십년을 가더라”고 권재은은 씁쓸하게 말했다. 전처와 사이에서 난 두 딸은 출가를 했고, 권씨에게 소리를 배우다 결혼한 현재의 아내는 충주시내에서 전통소리 강습장을 하며 열세 살짜리 아들을 키운다. 권씨는 소리 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산 속에서 ‘독거노인’처럼 산다고 말했다. 

싸이 음악도 좋아하는 오디오광  

권재은의 방은 고서적과 음반으로 가득하다. 목민심서와 초한지, 각종 인문교양서 등 어지간한 도서관 못지않다. 수궁가(토끼의 간을 빼앗으려는 자라와 꾀로 모면하는 토끼 이야기) 중 약성가(도사가 용왕에게 약을 일러주는 대목)를 이해하기 위해 한의학 책을 파고들었다. 적벽가(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는 내용)의 전쟁 얘기를 표현하려니 무기 공부가 필요하더란다. 평소에 쌓아 둔 문학적 내공은 찰나의 감동을 단단히 붙잡아 두는 도구가 된다. 

   
▲ 권재은의 서재. 눈이 나빠 돋보기로 간신히 책장을 넘긴다. 이 책이 선생이 되고 소리가 된다. ⓒ 유순상

“선생 부재에 대한 갈증은 음반이 해결해줬어요. 전통음악만 가지고 전통음악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림, 문학, 다른 장르의 음악을 통해 소리를 배웠죠.” 

권재은은 또 오디오애호가이고 음반 수집가이기도 하다. 5000장이 넘는 콤팩트디스크(CD)와와 엘피(LP)음반을 소장하고 있다. 주로 판소리와 가야금병창 등 전통음악이지만 윤도현 밴드와 조용필, 주현미 등 대중가요도 많다. 요즘은 인도와 스리랑카 등 제 3세계 음악을 찾아 듣는다고 한다. 낯선 음악을 듣다보면 익숙한 것도 다시 보인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렇다면 한창 인기를 끌었던 아이돌그룹 크레용팝이나 가수 싸이도 알까? 

“싸이는 아들 핸드폰으로 들어봤고, 크레용 팝은 누군지 모르겠네. 나는 음악적으로 (가리는 것 없이) 다 좋아해요. 전통적인 것만 있어야 하느냐, 이건 아니에요. 다만 너무 감각적인 건 내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죠.” 

사시에 약시 ‘왕따’였던 소년 권재은 

소울 음악의 대부 레이 찰스와 이탈리아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는 시각장애인이다. 눈을 잃은 이들은 귀가 남들보다 예민하다는 분석이 있다. 권재은은 선천적으로 사시(斜視)에다 약시(弱視)다. 이 때문에 학창시절 ‘왕따’도 당했고 청년기에는 대인기피증도 겪었다고 한다. 

“한계를 갖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그 때문에 두문불출하고 소리에 미칠 수 있었죠. 또 청력보다 청각이 발달했죠. 감각이 예민해지죠. 라식수술을 할까도 했는데 괜히 소리가 안 될 것 같아서 그만뒀어요.” 

소리꾼들은 득음을 위해 온갖 방법을 쓴다. 영화 <서편제>에서는 유봉이 딸 송화에게 한을 가르쳐야 한다며 실명을 시키는 극단적 얘기도 등장했다. 권재은도 득음을 위해 고행을 자청했다. 

“충주 남산으로 가서 몸 하나 들어갈 만큼 움을 파요. 그 위에 서까래를 덮고 연습하죠. 힘든 공간을 만들어야 연습이 되니까요. 하루 14시간 연습했어요. 목이 붓고 목소리도 안 나오고 안압이 높아져 토할 것 같은 순간도 겪었죠.” 

그는 독학으로 기타를 익힌 뒤 아흔이 넘어서도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기타리스트 안드레스 세고비아(1894~1987)처럼 연습을 ‘저축’이라고 표현했다. 오늘 연습해서 오늘 당장 바뀌진 않지만 내일 달라지기 위한 저축이 된다는 것이다. “연습이 많아질수록 소리에 대해 자유로워지더라”고 말하는 그는 제자들에게도 “저축하듯 소리 연습을 하라” 강조한다. 

권재은의 제자들은 주로 전국에서 찾아오는 전통음악 강사들이다. 그는 소리에 ‘고저 장단 청탁 남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높고 낮음, 길고 짧음뿐만 아니라 맑으면서 탁하고 남성스러우면서도 여성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인터뷰 중 열변을 토하는 권재은. ⓒ 유순상

공동체에 갇힌 전통음악, 이제 개인에 주목할 때  

한 인디(독립음악)가수는 권재은을 ‘주류 전통음악에서 뛰쳐나온 소리계의 펑크록커'라고 표현했다. 권씨도 자신이 비주류임을 인정한다. 향토, 민족, 국가를 강조하는 전통음악에서 권재은은 유독 ’나 자신‘을 탐색한다. ’내가 즐거운 소리가 가장 즐거운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소리를 찾기 위해 ’고립‘을 자초한 권재은은 때로 외롭지만 얻는 게 많다고 말한다. 

“산 속에 있으니까 내면이 깊어지는 게 있어요. 뭔가 그리워하잖아요. 적당히 그리워야 상대방을 볼 수 있고.” 

권재은은 한 해 열 번 정도 공연을 한다. 두 달에 한 번은 집으로 사람을 모아 국악감상회를 연다. 10년 동안 70회가 넘었다. 가정주부와 교사, 서양음악가 등 각계각층이 찾아온다. 올해 암 수술을 하느라 모처럼 길게 쉬었던 권재은은 요즘 3집 앨범을 준비 중이다. 일반적으로 많이 불리지 않는 잡가(현실에 대한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이 많은 소리)를 중심으로 앨범을 구성할 계획이다. 10~15분 정도의 긴소리로 육칠월, 바위타령, 공명가 등을 부른다. 권재은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음반을 통해 전통음악을 가깝게 느껴주기를 기대했다. 전통음악을 들으면 삶이 윤택해지고 정신적으로 즐길 거리가 많아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권재은에겐 소리 외에 아무것도 없다. TV도 신용카드도 없고, 주민등록증도 어디 있는지 모른다. 운전도 못한다. 젓가락질 하는 것도 참 아슬아슬해 보인다. 전세 2천5백만원짜리 셋방에 앉아 그가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은 소리뿐이다.  

“소리가 저절로 나를 이끄는 무아지경을 일생 동안 두 번 만났어요. 소리와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죠. 그런 순간이 또 오길 기다리며 계속 연습합니다.”

   
▲ 권재은의 집은 깊숙한 산 속 납골당 아래에 있다. 거실에 불을 켜면 마을에 달이 뜬 것처럼 보인다. ⓒ 유순상

* 경서도 소리꾼 권재은 씨의 음악을 들으시려면 아래 노래 제목을 눌러주세요. 

1집 앨범 '뱃노래'

2집 앨범 '산염불'

이 기사가 유익했다면 아래 손가락을 눌러주세요. (로그인 불필요)

     관련기사
· 명배우 그리던 붓으로 마을 풍경 담네
· “천재라는 착각, 좌절의 나락 다 거쳤죠”
· 나는야 떠도는 장돌뱅이 화가
· "KBS, 취재보도의 기본도 안 지켜"
· 자세히,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너
황상호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단비뉴스(http://www.danbi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의견나누기(0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Follow danbi_news on Twitter

단비뉴스소개기사제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27136)충청북도 제천시 세명로 65(신월동 579)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대학원 413호|Tel 043)649-1557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문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환
Copyright 2009 단비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nbi@danbi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