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생물학적 ‘다름’을 ‘차별’의 근거로 삼는 버릇

▲ 이평재 세명대 교수
요즘 인터넷으로 기사들을 보면 과학 관련 분야, 특히 생물학 관련 용어들이 아무데나 사용되고 있어 불편함을 느낄 때가 있다. 포털사이트에 ‘우월한 유전자’라는 검색어를 넣으면 관련 뉴스가 검색되는데 대부분 연예 관련 기사들이다.

내가 이런 용어에 불편한 맘을 갖는 것은 ‘우월하다’는 말이 ‘유전자’라는 말과 결합되어 엉뚱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우선 ‘우월하다’는 말은 비교 대상이 있음을 전제한다. 곧 평범한 유전자, 열등한 유전자를 전제한 말이다.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있다. 과학용어들은 가치중립적 의미를 갖는다(꼭 그렇지도 않지만). ‘유전자’라는 과학용어에는 ‘우열’이라는 말을 함부로 붙일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이 우월하다는 건가?

연예 관련 기사에서 ‘우월한 유전자’라는 말의 의도는 대체로 이런 것이리라. ‘부모님이 물려준 빼어난 용모나 남들이 갖지 못한 재능(탤런트)을 갖추고 있어, 한마디로 타고난 연예인’이라는 얘기다.

왜 기자들은 ‘우월한 유전자’라는 말을 쓸까? 연예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사생활 영역을 들춰 보고 싶은 욕망에 이른다. 연예인들이 부모나 형제자매들과 함께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 이런 말을 자주 쓰는데, 그 미모가 부모로부터 왔다는 것을 은근히 강조한다. 성형의혹을 해소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다다를 수 없는 것을 동경하게 된다. ‘유전자’라는 말은 이미 그렇게 결정되어 있다는 이미지를 준다. 범접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끌기라고 할까? 외모가 자본으로 자리 잡은 이 시대에 언론은 그것을 마케팅 전술로 활용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용어가 생물학적 ‘다름’을 ‘차별’의 근거로 활용하는 것은 아닌지, 거부감이 생긴다. 차별의 수단으로 ‘유전자’라는 과학용어가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월하다’는 말은 어느 한 면이 그렇다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우월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상황이 변하면 우월했던 유전자는 더 이상 우월하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 우월한 유전자는 먼 옛날 우리 조상이 하루 대부분을 채집과 사냥으로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닐 때 전혀 우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외모가 인간에 대한 모든 평가영역을 덮어버리는 게 현실이긴 해도, ‘우월하다’는 형용사를 ‘유전자’라는 과학용어에 붙이는 용기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만용이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덤비는’ 꼴일 수도 있지만, 어찌하랴, 내게는 불편한 것을. 그러나 개인적인 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세 살배기 아들이 내가 옷 갈아입을 때 불룩 튀어나온 옆구리를 보며 “이게 뭐야”하고 물을 땐 귀엽지만, 남이 내 몸매를 ‘열등하다’고 말한다면 기분이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유전자가 한순간에 ‘우울한 유전자’가 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문득 묻고 싶다.
 
“유전자가 뭔지는 아세요?”

이평재/ 세명대 자연약재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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