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생물학적 ‘다름’을 ‘차별’의 근거로 삼는 버릇
내가 이런 용어에 불편한 맘을 갖는 것은 ‘우월하다’는 말이 ‘유전자’라는 말과 결합되어 엉뚱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우선 ‘우월하다’는 말은 비교 대상이 있음을 전제한다. 곧 평범한 유전자, 열등한 유전자를 전제한 말이다.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있다. 과학용어들은 가치중립적 의미를 갖는다(꼭 그렇지도 않지만). ‘유전자’라는 과학용어에는 ‘우열’이라는 말을 함부로 붙일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이 우월하다는 건가?
연예 관련 기사에서 ‘우월한 유전자’라는 말의 의도는 대체로 이런 것이리라. ‘부모님이 물려준 빼어난 용모나 남들이 갖지 못한 재능(탤런트)을 갖추고 있어, 한마디로 타고난 연예인’이라는 얘기다.
왜 기자들은 ‘우월한 유전자’라는 말을 쓸까? 연예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사생활 영역을 들춰 보고 싶은 욕망에 이른다. 연예인들이 부모나 형제자매들과 함께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 이런 말을 자주 쓰는데, 그 미모가 부모로부터 왔다는 것을 은근히 강조한다. 성형의혹을 해소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다다를 수 없는 것을 동경하게 된다. ‘유전자’라는 말은 이미 그렇게 결정되어 있다는 이미지를 준다. 범접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끌기라고 할까? 외모가 자본으로 자리 잡은 이 시대에 언론은 그것을 마케팅 전술로 활용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용어가 생물학적 ‘다름’을 ‘차별’의 근거로 활용하는 것은 아닌지, 거부감이 생긴다. 차별의 수단으로 ‘유전자’라는 과학용어가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월하다’는 말은 어느 한 면이 그렇다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우월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상황이 변하면 우월했던 유전자는 더 이상 우월하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 우월한 유전자는 먼 옛날 우리 조상이 하루 대부분을 채집과 사냥으로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닐 때 전혀 우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외모가 인간에 대한 모든 평가영역을 덮어버리는 게 현실이긴 해도, ‘우월하다’는 형용사를 ‘유전자’라는 과학용어에 붙이는 용기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만용이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덤비는’ 꼴일 수도 있지만, 어찌하랴, 내게는 불편한 것을. 그러나 개인적인 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세 살배기 아들이 내가 옷 갈아입을 때 불룩 튀어나온 옆구리를 보며 “이게 뭐야”하고 물을 땐 귀엽지만, 남이 내 몸매를 ‘열등하다’고 말한다면 기분이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유전자가 한순간에 ‘우울한 유전자’가 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문득 묻고 싶다.
“유전자가 뭔지는 아세요?”
이평재/ 세명대 자연약재과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