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식 친위내각’ 인사는 ‘고유권한’ 아닌 ‘정실인사’
여론 무시하는 ‘돌쇠형’ 각료후보 탈락시키는 게 관건

[시민편집인의 눈]

아무리 ‘이미지 정치’가 횡행하는 시대라지만, 김태호 총리 후보자 지명 이후 그를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와 비교해 ‘차기 대권주자’ 운운하며 띄우는 것은 ‘코미디’다. 아니, 국민에게, 그리고 그 카드를 꺼낸 세력에게도 ‘비극’이 될 가능성이 높다.

첫째, ‘참신하고 젊은 리더’라고 하는데 그의 생각이 이명박 대통령의 판박이라는 점, 둘째, ‘친서민’이라는 이미지와 그의 사고방식이 정반대라는 점, 셋째, 이미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정책과 토목사업을 '돌쇠'처럼 밀어붙일 것이라는 점, 넷째, ‘소통하라’는 선거 민의가 친위세력 내 소통으로 국한된다는 점, 다섯째, 대통령이 후계자를 키운다는 발상 자체가 반민주적이고 실현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

김태호 후보는 나이 빼고는 캐머런은 물론이고 블레어와 오바마 등 세계의 젊은 지도자들과 닮은 데가 없는 인물이다. 그들이 영국과 미국의 정치지도자로 등장할 때 적어도 자신들의 말과 이미지, 그리고 정책에는 정합성이 있었다. 사고의 틀은 열려 있었고, 한 사람의 지명이 아니라 당원과 국민의 지지로 큰 정치인이 됐다. 블레어와 캐머런, 그리고 김태호 후보의 언행을 통해 정치인으로서 그들의 성장 과정을 비교해보자.

1996년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마흔세 살의 블레어는 “집권하면 추진할 역점정책 세 가지를 밝히겠다”며 당원들은 물론 방송을 듣던 국민의 귀를 쫑긋하게 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블레어가 외친 말은 “교육, 교육, 그리고 교육”(Education, Education and Education). 보수당 정권의 교육실정, 곧 교육기회의 불평등 심화를 집중 공략한 것이다.

내가 영국에 머물던 2006년, 마흔 살의 보수당수 캐머런은 전당대회에서 또다른 드라마를 연출했다. 방송을 보고 있는데, 캐머런이 “나는 세 단어가 아니라 세 글자로 역점정책을 설명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치는 게 아닌가. “N, H, S.” 그는 한때 무상의료기관인 국가건강서비스(NHS: National Health Service) 제도의 폐지를 주장한 보수당원이었으나, 희귀병을 앓는 아들을 안고 응급실을 드나들면서 제도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영국에서 정치는 유권자에게 즐거움과 함께 판단의 기준을 선사한다. 의회가 열리는 기간이 160일로 매우 긴데 장관과 예비내각 장관들의 정책공방이 치열하면서도 흥미롭다. 매주 수요일 낮 12시부터 30분간은 <비비시>(BBC)가 생중계하는 가운데 총리와 야당 당수들이 국정 전반에 걸쳐 위트를 섞어가며 열띤 공방전을 벌인다. 스스로 커야지 실력이 없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국민의 대표가 모여 있는 국회를 힘없는 총리에게 맡기고, 자신은 기자회견 때도 질문조차 받지 않는 나라, 일요일에 ‘깜짝쇼’ 하듯 총리를 지명하는 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시장으로, 어묵집으로 돌아다니며 상인들과 몇 마디 주고받으면 ‘친서민 행보’와 ‘소통’을 했다고 언론에 보도된다. <한겨레>가 그런 보도에 앞장서지는 않았지만, 그런 이미지 정치의 허상을 벗겨내는 데 아주 적극적이지도 못했다고 본다.

중용된 김태호 총리 후보와 이재오 특임장관 후보는 이미지 정치의 달인이라는 점에서 이 대통령을 빼닮았다. 김태호 후보는 메뉴만 달라졌을 뿐 ‘아침은 청진동 해장국, 점심·저녁은 김치찌개를 먹었다’며 자신이 ‘서민’임을 강조했다. 이재오 후보는 국민권익위원장 시절 몇 번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더니, 특임장관 지명 뒤에는 경로당에 가서 윷놀이를 하는 등 언론에 사진거리를 제공하는 데는 남다른 감각을 지닌 듯하다. 방송 카메라와 사진기자들의 조명이 터지는 가운데 윷을 던지는 모습을 보면, ‘타고난 배우’라는 느낌과 함께 ‘노인들에게 그 윷놀이가 재미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요한 관점은 이런 그들의 노력이 서민들에게 먹혀들어 선거판과 민주주의의 토대를 흔든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은 김태호 후보의 ‘성장 과정이 내 분신 같다’며 서민 출신임을 강조했다. 조세·복지정책 등이 ‘친서민’과는 거리가 먼데도, 서민들은 자신이 되고 싶어하는 성공신화의 주인공을 자기편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서민 출신이라고 다 서민이라 한다면, 카네기도 이병철도 서민이다.
 


청문회가 해명 위주로 흘러가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21일치 1면 머리기사를 예로 들면, “쪽방투기 죄송”하다는 이재훈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의 해명과 “그 정도면 봐줄 만”하다는 한나라당 청문위원들의 반응을 큰 제목으로 뽑았다. 이 후보를 감싸려는 한나라당 위원들의 행위를 비판하려는 기사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작은 제목까지 “집사람이 노후 대비 구입, 장관 되면 친서민 최선”으로 달아 오해 소지가 있었다.

같은 날 3면에 ‘검증 벼른다던 의원들 어디 가셨나’라며 민주당을 비판했지만, <한겨레>도 의원들의 발표에 의존하면서 큰 특종이 없었던 것은 아쉽다. <경향>이 서갑원 의원과 합작으로 ‘신재민, 17차례 부동산 매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낸 게 돋보이는 정도였다. 20일 청문회가 시작된 뒤 24일치까지 <한겨레> 오피니언면에 실린 청문회 관련 칼럼이 단 한 건이었던 점은 종합면과 오피니언면이 '따로 논다'는 인상을 주었다. 청문회가 끝나더라도 미국 언론의 전통처럼 비위 사실보다 위증 여부를 캐는 데 힘쓸 필요가 있다.

야당과 진보언론이 후보자들의 범법행위와 도덕적 흠결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 중시해야 할 일은 그들의 이념과 예상되는 정책을 점검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친위세력이 정책집행 책임자인 장차관에 대거 등용되는 만큼 시장지상주의와 개발주의, 대북강경론과 미국 의존 외교 등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으로 예상된다.

김태호 후보는 “경남의 행정 목표는 강성노조와 기업규제가 없는 지역을 만드는 것”이고, “좌파정권 10년간 통일정책 끝에 돌아온 것은 핵폭탄”이라는 극우적 발언을 했다. 이명박 정권의 삼성·현대 등 ‘대재벌 프렌들리’ 정책이 기업 양극화를 낳고, 미국 일변도 외교가 ‘연루의 덫’에 걸려 막대한 경제적 손실로 연결되고 있는 판에 ‘정운찬’이라는 미약한 견제장치마저 사라진 것이다. 국무총리는 공무원의 최고위직인데 그는 지사 시절 공무원노조 활동으로 징계받은 사람이 대법원에서 ‘징계무효 판정’을 받자 또 징계를 추진하기도 했다. 4대강 사업에 대해서도 “대운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발언할 정도였으니 과감한 밀어붙이기를 치적으로 삼고자 할 것이다.

지난 6월 이 난을 통해, 대통령제 아래서 총리에게 책임을 묻는 등 인사쇄신을 주장하는 것이 어떤 위험부담이 있는지 썼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이 되고 말았다.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도 시위 군중을 ‘개 패듯 패는’ 미국 경찰을 부러워하고 쌍용차 농성 진압을 자랑으로 여긴다는데, 도덕적 결함보다 그가 경찰 총수가 됐을 때 휘두를 공권력 남용 문제가 더 심각해 보인다.

교체 여론이 비등했던 국방·외교·국토·환경부 장관을 유임시키고 흠 많은 친위세력들을 장차관으로 대거 발탁한 것은 이 대통령이 도덕성보다는 일과 성과를 중시하는 기업의 인사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인 듯하다. 기업에서는 인사를 할 때 대개 믿을 수 있는 측근을 중용하고, 외부 여론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다.

일부 보수언론까지 문제가 많은 개각으로 지적하는데도 이 대통령이 아직 버티는 것은 ‘인사는 고유권한’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기 때문인 듯하다. 특히 공직 인사의 경우 잘못 휘두른 인사권까지 ‘고유권한’이란 말로 합리화할 수는 없다. 이미지 정치의 허상을 벗겨내고 언어의 왜곡을 바로잡는 일은 언론의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한겨레> 시민편집인으로서 쓰는 이 칼럼은 <한겨레>와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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