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다큐멘터리 3일 : 다시 와락’의 정찬필 KBS 피디

한국방송(KBS)의 <다큐멘터리 3일>은 72시간, 만 사흘 동안 하나의 대상을 카메라로 밀착 취재한다. 그 대상은 때 놓친 학업에 악착같이 매달리는 방송통신대의 공부벌레들이 되기도 하고, 필리핀 가난한 마을에 희망을 주는 설탕공장이 되기도 하고, 울릉도 나리분지에 숨어있던 설국(雪國)이 되기도 한다. 약 45분 방송으로 압축된 72시간은 갓 지어 꾹꾹 눌러 담은 밥처럼 따뜻하고도 밀도 있는 감동을 시청자에게 선사한다. 

▲ <다큐 3일> 홈페이지 메인 화면. ⓒ KBS 홈페이지

'할 말 못하는 방송'에서 덜 비겁해지려는 선택

2007년 5월 첫 방송된 후 지난 6월 300회를 넘긴 <다큐 3일>에서 2011년 말부터 2013년 초까지 활약한 정찬필 피디(PD)는 ‘다시 와락! 벼랑 끝에서 희망 찾기’편으로 지난 1월 한국PD연합회가 주는 ’이달의 PD 상‘을 받았다. 쌍용차 정리해고 후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해고근로자와 그 가족들이 심리치유센터 ’와락‘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주는 이야기였다. 정 피디는 지난 24일과 5월 23일 두 차례에 걸친 <단비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집 팔아 독립운동 나서는 심정으로 찍었다”고 회고했다. 

2012년 대선을 전후해 KBS 보도의 공정성에 대한 논란이 뜨거웠고 정부·여당에 편향된 방송을 항의했던 기자는 중징계를 당한 후 KBS를 떠나기도 했던 시점이었다. 노동현장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는 여간해서 방송 전파를 타지 못했다.

▲ <다큐 3일> '다시 와락'의 정찬필 KBS 피디. ⓒ 박채린

“앞으로 남은 회사 생활에 이게 보탬이 될 일은 없겠지? 이런 걸 만용이라고 하는 거야. 시청률도 안 나올 텐데··· 그냥 어디 예쁜 마을이나 찾아갈까? 하루에도 몇 번씩 ‘해볼까? 할 수 있을까? 해도 될까?’ 혼자 되묻고 뒤집고 했죠.”

그러다가 마침내 ‘집 팔아 독립운동 나서는 모양’으로 ‘그래 해보는 거야!’라고 결심했다. '다시 와락’이라는 제목은 ‘당연히 해야 할 이야기에 입을 떼지 못하는 등신 같은 다큐멘터리 피디’인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들에게도 ‘힐링의 묘약’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붙였다고 한다. 

촬영이 한창이던 지난 1월 10일, 쌍용차 무급휴직자 복귀가 결정되자 KBS는 이 소식을 저녁 9시 뉴스의 24번째 순서 단신으로 내보냈다. 에스비에스(SBS)가 2번째, 문화방송(MBC)은 4번째 뉴스로 보도한 것과 비교해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런 분위기는 ‘다시 와락’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디어오늘> 보도에 따르면, 방송 전날인 1월 19일 KBS는 사내 심의위원 여럿을 불러 ‘다중심의’를 했고 KBS 새노조는 사실상 사전검열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우여곡절 끝에 전파를 탄 ‘다시 와락’은 뉴스보도를 통해 알 수 없었던 쌍용차 해고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을 절절히 보여주었고, 상을 받을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모래해안 살린 '환경스페셜' 가장 자랑스러워 

정 피디는 2011년 12월부터 ‘다시 와락’편을 포함해 총 10편의 <다큐 3일>을 연출했다. 5명의 피디가 돌아가며 방송을 만드는 시스템이어서 한 편 제작에 대략 5주 정도의 시간이 투입된다. 정 피디가 연출한 작품의 주제는 의외로 다양하다. 지난해 2월 큰 호응을 얻었던 ‘울릉도 나리분지’편은 자연다큐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울릉도엔 오징어나 호박엿만 있는 게 아니라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설원도 있음을 보여준 이 방송은 정 피디가 ‘눈을 아는’ 스키 마니아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다큐였다. 또 “(가난 때문에 공부를 포기했던) 그때 열넷, 열다섯 살 되던 나한테 내가 너무 미안합니다”라며 눈물을 흘리는 문종진(65)씨 등을 묵묵히 보여줬던 방송통신대 공부벌레들편은 콧등이 시큰해지는 인생이야기였다. 

일 년을 더 채우면 피디생활 20년이 된다는 정 피디는 방송인생에서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작품으로 지난 2001년 <환경스페셜>에서 제작한 해안사구(바닷가모래언덕)편을 꼽았다.

▲ 정찬필 PD는 <환경스페셜>을 하면서 자신이 괜찮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 KBS 홈페이지

“그 프로그램하면서 ‘내가 살면서 해야 할 착한 일은 이걸로 다했다’하고 생각했죠.”(웃음)

해안사구가 해안환경을 지키는 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이를 파괴할 경우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를 다룬 다큐였다. 예를 들어 부산 해운대는 사구가 있어야 할 자리에 건물을 지어 모래가 다 쓸려갔고 모래 유실을 막기 위해 올해에만 65억 1500만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환경스페셜>은 당시 해안사구를 없애고 그 위에 해안도로 조성 공사를 진행하던 충남 태안군 안면도의 한 마을을 집중 취재했다. 방송 후 큰 충격파가 일었고, 해안도로 공사는 취소됐다. 그리고 지금 안면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실상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모래 해안을 간직하게 됐다고 정 피디는 말했다.

방황 많았던 사춘기,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법’ 배워

“사춘기 때 방황을 좀 많이 했죠, 사고도 많이 치고 학교도 안가고.”

중·고등학교 시절, 그에게 학교와 선생님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상어가 사람이라면>에 나오는 ‘복종을 강요하는 상어’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농구선수로 뛰던 친구가 부상을 당한 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부를 하겠다’며 수학시간에 다른 책을 봤는데, 선생님은 자신을 모욕했다며 ‘개 패듯’ 팼다. 그때 ‘교사는 뭘 하는 사람이며, 공부는 왜 하는 것인가’ 등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법을 배웠고, 결국 삐딱한 세상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피디가 됐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 언론 상황은, 이미 어른이고 방송인인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고 정 피디는 고백한다. 

‘다시 와락’ 방송에는 중학교 1학년 세민이 얘기가 나온다. 세민이는 ‘꿈이 뭐냐’는 질문에 기자라고 말했다. 

▲ <다큐 3일> '다시 와락'편에서 기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세민이. ⓒ <다큐 3일> 화면 갈무리

“사람들에게 모든 일을 다 알리고 싶고, 사회의 약자인 소수의 사람들에게 존경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 사람들을 위해 일 할 거고, 그 사람들에게 힘이 되도록 기사도 쓰고 그럴 거예요.”

정 피디는 방송 후기에 세민이 이야기를 공들여 옮긴 후, '아팠다'고 썼다. 언론이 약자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해 주지 못하는 현실을 세민이가 꼬집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정 피디는 지난 6월부터 K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파노라마>로 자리를 옮겼다. 정 피디의 '아픔'과 '부끄러움'이 또 어떤 다큐를 '독립운동 하듯' 만들게 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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