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원전 주변 골매마을 잔혹사

“아직도 생생해요. 11월 농번기 가을방학 하던 날, 별안간 우리 마을로 불도저가 들이닥쳤어요. 어른들은 불도저 앞에 드러눕고. 그런들 뭐합니까? 태산 같은 흙더미가 결국 우리 기와집을 덮쳤고 마을의 커다란 버드나무도 쓰러졌습니더. 그때 열두 살이었는데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떨면서 얼마나 울었던지. 그 날 기억은 평생 마음의 상처지예. 어째 잊겠는교."

박종염(여·55)씨의 본적은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고리마을 202번지다. 그러나 그가 나고 자란 ‘고리마을’은 사라진 지 오래다. 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마을 앞바다 조개를 잡던 곳에는 거대한 원자력발전소가 자리 잡았다. 어느 누구도 ‘고리’라는 지명에서 그가 살던 옛 마을을 떠올리지 않는다.

1971년 - 군용텐트에 자면서 일군 ‘제2 고향'

1971년 11월, 한국 최초 원전인 고리 1∙2호기가 건설되면서 가장 먼저 이뤄진 작업은 고리마을의 이주였다. 주민 동의나 합의 과정은 없었다. ‘나를 밟고 지나가라’며 드러누웠지만 불도저는 마을을 일거에 휩쓸어버렸다. 하루아침에 돌아갈 집이 사라진 주민들은 기장군 온정마을과 울산 울주군 신안마을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다른 마을로 가지 못한 이들은 ‘고리’가 보이는 산 위에 자리 잡았다. 산등성이를 파 집터를 만들고 집을 짓기까지 긴 겨울을 군용텐트에서 난민처럼 지냈다. 기름값과 생활비 부담은 주민들 몫이었다. 

“애들은 산 너머 신안마을에서 자기도 했지만 거의 막사에 살았죠. 공동화장실도 모자라 온 동네 사람들이 눈만 뜨면 화장실 먼저 가려고 냅다 뛰었지요. 그 해 겨울은 참 춥기도 엄청 추웠지..."

보상비 명목으로 쥐어준 50여 만원으로 박종염씨 아버지는 직접 집을 지었다. 고향을 떠나기도 싫었지만, 그 돈으로는 다른 도시로 이주할 수도 없었다. 강제이주에 대해 항의할 생각도 못 했던 시절이었다. 국책사업이라는 미명 아래 정부와 한국전력(현 한국수력원자력)은 주민은 안중에도 없이 원전 건설을 밀어붙였다. 

 

▲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해녀가 되어야 했던 박종순씨. ⓒ 박다영

당장 먹고 살게 없던 열다섯 남짓 여자 아이들은 물질을 배웠다. 당시 18살이던 박종염씨의 언니 박종순(61)씨도 해녀가 됐다. 그가 따오는 해삼과 전복 등으로 온 가족이 먹고 살았다. 그래도 새로 자리 잡은 곳을 ‘제2의 고향’이라 여기며 다시 마을을 일구었다. 골매라는 이름이 익숙해지면서 불도저의 기억도 사라지는 듯했다. 

어떤 시설이 들어서는지 주민들은 알지 못했다. 모두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공장이라는 말만 주민들 사이에서 돌았다. 여느 공장과 달리 코를 틀어쥐게 하는 매캐한 연기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나자 원전이 무엇인지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말똥성게, 참고동, 가리비 같은 어패류가 다닥다닥 붙어있던 바위는 하얗게 변색됐다. 24시간 가동되는 원전에서 발생하는 소음도 거슬렸다. 비가 오는 우중충한 날씨이거나, 마을 쪽으로 바람이 부는 날에는 미세하게 귀를 울리는 소리가 더 심해졌다. 그래도 그러려니 했다.

1985년 – 마을 둘로 가른 3∙4호기 건설

원전이 ‘제2의 고향’을 덮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부와 한국전력이 1985년 9월 신한국형 고리원전 3∙4호기 건설을 결정하면서 골매 마을 사람들에게 다시 이주 통보가 날아들었다. 

당시 주민들은 원전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15년을 원전과 함께 살았고, 과거와 달리 ‘주민들이 원하는 만큼 해주겠다’던 한국전력의 약속을 굳게 믿었다. 하지만 원전 유치 주민동의서를 받은 99년 이후, 협상은 진척되지 않았다. 골매이주대책위 부위원장 박종만(59)씨는 “요구 조건인 이주정착금, 택지의 용적률과 건폐율 등이 전혀 수용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지붕에 ‘실속 없는 원전유치 지역주민 분노한다’는 현수막을 내건 이유이다.

마을 주민들 사이에도 갈등이 싹텄다. 원전보상구역 편입을 두고 골매마을에 인접한 신리마을이 간발의 차이로 보상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두 마을 주민들은 서로 경조사를 챙기지 않고, 말조차 나누지 않을 만큼 반목의 골이 깊어졌다.

보상 마을로 선정된 쪽에서도 모두가 이주한 것은 아니었다. 주민 김형래(53)씨는 “요구 조건도 서로 맞지 않고, 이주단지를 건설해야 하는 등 마을 전체 이주가 번거로웠던 한국전력이 법 테두리 안에서 꼼수를 부렸다”고 말했다. 2009년 원전 시운전을 위한 최소한의 거리, 곧 반경 560m 내에 주민이 거주하면 안 된다는 제한구역경계거리 조항을 이용해 2가구만 이주시킨 것이다. 지난해 10월, 몰래 도망가듯 이주한 두 집과 나머지 주민들 집 사이 거리는 50m도 채 되지 않는다. 김형래씨는 “이사 간 사람들이 가끔 동네를 찾아오지만 얼굴을 마주쳐도 인사하지 않는다”고 했다. 

 

▲ 제한구역경계거리(EAB)에 포함돼 지난 해 이주했던 집(위)과 수퍼(아래)는 50m 정도의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있다. ⓒ 박다영

“한수원은 보상금을 놓고 주민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도록 방치했어요. 그 두 집한테 보상금을 몰래 더 챙겨줬을 겁니다. 다 같이 힘을 모아야 하는데 몇 집이 저 살자고 이주해버리니 얼마나 힘 빠집니까?”

원전유치특별지원금이 주민들에게 고루 분배되지 않아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경주환경운동연합 연구위원장 김익중 동국대 교수는 “한수원이 직접 행사하는 원전 발전량에 따른 인센티브나 특별사업지원금은 원전 찬성 주민들과 한수원을 옹호하는 지역단체에 더 많이 돌아간다”고 말했다. 그는 “원전 유치지에서는 시민단체 명함만 하나 파면 한수원에서 큰 지원을 받는다”고 했다.

2012 - 5∙6호기 건설용지에 들어간 골매마을

“참말로 억울합니다. 도대체 고향을 떠나라는 게 몇 번쨉니까? 우리는 뭐 바다 건너 온 섬나라 사람들 입니까? 국민 아니라예? 왜 매번 우리한테만 희생을 강요하냐 이 말이에요.”

박종순씨 목소리가 높아졌다. 10여 년에 걸친 이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2012년 6월, 신고리 5∙6호기 건설이 확정되면서 3∙4호기 건설 당시 제한구역경계거리를 이용해 2가구만 이주시킨 한수원도 이번엔 꼼짝없이 골매마을 전체를 이주시켜야 한다. 신고리 3∙4호기를 신축한 2011년에도 이미 5∙6호기 건설을 위한 용지는 조성된 상태였다. 한수원 홍보팀 김태석 차장은 “당시 신고리 5∙6호 건설을 계획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지가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반면 주민들은 제대로 된 보상도, 협상도 거부하는 한수원의 태도에 분통을 터뜨린다. 2009년, 제대로 된 협상을 요구하며 항의했으나 한수원은 지자체 문제로 떠넘겼다고 주민들은 주장한다. 당시 한수원, 울주군청, 주민 간의 3자협상이 열렸으나 구체적 보상 범위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해 결렬됐다.

울주군청 동해안권추진과 담당자는 “이후 울주군은 협상에서 빠졌고 한수원과 골매마을 주민들이 직접 대화 중”이라고 했다. 남은 18가구 중 대부분은 60대 이상 노인들이다. 길어진 싸움에 반대할 여력도 없다. 기껏해야 보상금을 측정하는 물권조사를 거부해 한수원과 협상할 여지를 두는 정도다.

주민들 요구는 단 하나, 보상을 제대로 해달라는 것이다. 박종만(59)씨는 “우리가 요구하는 건폐율과 용적률에서 한수원과 크게 차이 났고, 이주단지 배치에서도 이견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골매마을은 집집마다 앞에 차 한대 주차할 정도 공간이 있는데 협상 초반에 한수원은 그 이상의 공간을 보장해주겠다고 했으나 실상 주민들에게 제시한 단지 배치는 골목 없이 집이 다닥다닥 붙은 형태였다.

 

▲ "눈만 뜨면 보이는 게 저 원전입니다." 골매마을 어디에서나 보이는 원전을 설명 중인 김형래씨. ⓒ 박다영

하지만 지난해 12월 이후 대화는 진척되지 않았다. 한수원 김태석 차장은 “3∙4호기 건설 당시 골매마을 주민들과 협의 과정에서 법적 규정이 있기에 주민 입장을 모두 수용하기는 어려웠다”며 “물론 마을이 두 동강 난 것에 대해서는 도의적 책임을 느끼지만 법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밝혔다. 신고리 5∙6호기는 현재 산업통상자원부의 실시설계계획 승인이 나지 않아 골매마을 이주나 보상에 대한 구체적 논의나 정해진 사항이 없다.

문제는 이주 주민들을 보호할 법적 장치가 없다는 사실이다. 전원(電源)개발촉진법상, 산업통상자원부 승인만 있으면 주민의 실질적 동의 없이도 사업이 가능하고 도중에 발생하는 피해도 보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손해를 강요할 수 있다. 전원개발사업자는 마음만 먹으면 아무 규제 없이 무엇이든 시행할 수 있는 특권을 갖는다. 김형래씨는 “최종합의서만 작성하지 않았을 뿐 더 이상 협의 없이 이미 나온 기본합의서만으로 한수원에 유리한 방식을 밀어붙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주민에겐 선택권 없는 국책사업의 현실

원전 위험과 지역경제 활성화의 양면성은 원전 주변 주민들이 더 잘 안다. 그럼에도 원전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원전 반대’ 피켓을 들고 국책사업에 저항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지역사회에서 원전 찬성 쪽으로 여론을 조성하는 세력이 있는 것도 한 이유지만, 김익중 동국대 교수는 지역주민이 원전 유치 여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게 더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는 “만약 원전 유치 찬반을 주민투표에 부친다면 반대 목소리가 더 높을 것”이라며 “그런데도 주민에게 선택권은 없고 반대한다 해도 현실적으로 막아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주민들은 지쳐가고 있다. 버텨봤자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돈이 급한 주민들은 이미 떠났다. 가장 젊은 김형래씨를 필두로 남은 골매마을 주민들은 또 다시 길고 지루한 싸움을 이어가야 한다. 

“골매 사람 말고 우리 동네 이야기를 세상천지 누가 압니까? 작은 마을이 일어난들 누가 무서워하겠어요? 요구도 들어주는 척하다가 뭉개버리면 끝입니다. 왜 그렇게도 골매에 집착하냐고요? 여기가 제2의 고향입니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노인네들은 여기가 마지막 눈 감을 곳이고요. 제2의 고향마저 없어진다니 갑갑하네요.”

골매마을 주민들 이주예정지는 신고리 5∙6호기 부지 옆, 서생면 신암리 260번지 일대다. 정부는 제 5차전력수급기본계획으로 확정된 원전은 예정대로 건설하기로 했다. 신고리 7∙8호기가 추가 건설되면 골매 주민들은 또 어디로 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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