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있는 서재]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얼마 전 단짝 친구가 연애를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 ‘쿨한’ 싱글 생활을 함께했던 터라 이 갑작스런 변화는 내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줬다. 그녀의 변화는 더 놀라웠다. 매사에 냉소적이고 차갑기만 하던 그녀가 24시간 싱글벙글하고 농담까지 헤프게 늘어놓는다. 사랑의 힘은 위대했다.

사랑, 그거 대단한 거 나도 잘 안다. 상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터질 듯 뛰고, 온 세상 모든 시련을 단숨에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 궁극의 환희. 그 구름 위 몇 분을 위해 누군 목숨을 내놓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최근 영화관을 점령한 <레미제라블>에도 그런 장면이 있다. 시장통에서 여주인공 코제트와 주고받은 고작 몇 초의 눈빛 교환 때문에 마리우스는 숙원사업이었던 혁명 운동을 고심한다. 이 절절한 사랑이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때 관객은 안도했다. 사랑은 역시 영원하다고 확신하며.

▲ <레미제라블>의 등장인물 코제트(좌)와 마리우스(우). ⓒ <레미제라블> 공식 웹사이트

하지만 현실은 만만찮다. 정작 소설 <레미제라블>의 저자 빅토르 위고가 사랑에 완전히 실패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위고는 소꿉친구 아델르와 결혼했다. 첫사랑이 결혼으로 맺어지는 것은 통속적인 로맨스의 단골 메뉴이지만 위고의 경우는 로맨스보다 막장 드라마에 가까웠다. 아델르가 위고의 단짝 친구와 바람이 난 것이다. 위고는 ‘맞바람’을 택했다. 여배우, 창녀, 유부녀 할 것 없이 관계를 맺었다. 엄청난 정력으로 하루 세 번 관계를 맺은 기록도 있다. <레미제라블> 속 아련한 사랑은 작가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던 것이다.

심리학자 로버트 스텐버그는 진정한 사랑엔 3가지 필수요소가 따른다고 했다. 열정(infatuation), 친밀함(intimacy), 그리고 책임감(commitment)이다. 사람들은 열렬한 열정으로 연애를 시작한다. 대개 관계는 둘도 없이 가까운 사이로 발전한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반대의 경우도 많다. 그러니까 세상의 수많은 마리우스와 코제트 커플은 열정과 친밀함을 어느 정도 성취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책임감의 영역이다. 콩깍지가 벗겨져 상대의 민낯을 보게 될 때, 남는 건 관계를 지키겠다는 의무감뿐이다. 이때 사랑은 피곤하고 괴롭다. 상대의 허물을 감당해야 하는 자기희생의 역할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중도포기한다. 아니면 결혼이란 제도 속에 구속된 채 영원히 상대를 원망하며 살거나.

사랑은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데 세상에서 울려 퍼지는 사랑예찬은 갈수록 싸구려가 되고 있는 듯하다. 타로점을 보러 다니고 서로 마사지팩을 해주는 일이 ‘우리 결혼했어요’의 전부처럼 비춰진다. 혈기왕성한 청년들이 ‘짝’을 찾아 다니는 굶주린 감성만 쏟아낼 뿐 묵직한 책임감의 영역은 사랑 논의에서 배제된다. 치열한 서사가 있어야 할 자리에 포샵 이미지만 무한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마침 아침 신문에 돌아온 싱글, 일명 ‘돌싱’ 남녀가 120만에 이른다는 기사가 났다. 2011년에만 하루 평균 313쌍이 이혼했다. 이혼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사라지면서 이혼율도 증가한 것이다. 심지어 돌싱 남성을 ‘리본(reborn)족’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혼 후 다시 태어난 젊고 매력적인 남자’를 뜻하는 신조어라고 한다. 이혼에 대한 낙인 찍기가 사라지고 새 출발을 장려하는 문화가 생긴 건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확실한 검증과정 없이 ‘화려한 귀환’ 논리만 강조되는 건 아닐까 조금 걱정스럽다. 사랑 판타지에 허덕이는 소아병적 환자들이 넘쳐나는 사회. 생각만해도 오싹하지 않은가?

위고는 행운아였다. 진정한 사랑을 결국 이뤘기 때문이다.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여인 줄리에트는 위고에게 사랑을 알려주었다. 위고는 그녀를 만난 뒤에도 숱하게 바람을 피웠다. 하지만 줄리에트는 끊임없이 용납하고 기다렸다. 루이 나폴레옹과 불화해 목숨이 위태로워진 위고를 손수 위조여권을 만들어 피신시키는 위험한 역할도 감내했다. 이 헌신적인 사랑에 위고는 무너졌고, 성경과 자신이 쓴 <레미제라블>에 손을 얹고 다시는 바람피우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다고 한다.

▲ 빅토르 위고(좌)와 줄리에트 드루에(우)의 젊은 시절 초상화.

줄리에트 같은 사람을 만나는 행운을 모두가 누릴 수는 없다. 결국 나부터 더 깊은 사랑의 바다에 빠지는 수밖에. 헌신과 인내로 관계를 책임질 줄 아는 그런 사랑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할 수 있을 듯하다. 당신의 구질구질함, 그거 한번 참아보겠다고. 아, 이제 사람만 찾으면 될 텐데...


글쓰기가 언론인의 영역이라면 글짓기는 소설가의 영토입니다. 있는 사실을 쓰는 것이 글쓰기라면 없는 것을 지어내는 게 글짓기입니다. 그러나 언론인도 소설가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갖춰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단비뉴스>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단비서재’ 개관을 기념해 이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소설을 읽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이봉수 교수 첨삭을 거쳐 이곳에 실립니다. 우선, 방학 동안 학생들이 소설을 읽고 써낸 에세이 중 몇 편을 골라 연재를 시작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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