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국내 최초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염형국 변호사

“사법연수원에 강의를 가서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변호사가 돈 버는 것만 포기해 버리면 할 수 있는 좋은 일은 엄청나게 있다. 법률전문가를 친구로 두지 못한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하고 나오는데 어떤 꺼벙하게 생긴 사법연수원생 하나가 나를 따라 나왔습니다. 자신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좋은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막상 이런 사법연수생을 정확히 어디다 어떻게 배치할지 아무 계획이 없어 당황했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아름다운재단의 상임이사로 활동하던 2009년 5년 자신의 블로그인 ‘원순닷컴’에 올린 글이다. 박 시장은 2003년 당시 그 ‘꺼벙하게 생긴’ 사법연수생을 데리고 국내 최초의 공익법률회사 ‘공감’을 만들었다. 아름다운재단의 모금을 통해 최소한의 월급을 주고 가난한 사람들과 소수자를 위해 변론해주는 변호사 조직을 출범시킨 것이다. 공감의 1호 변호사가 된 그 연수원생은 염형국(39) 변호사.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전업주부인 아내와 함께 3명의 아이를 키우면서도 늘 즐겁고 행복한 얼굴로 출근했다’고, 박 시장이 회고한 그를 지난 5일과 지난해 6월 두 차례 <단비뉴스>가 인터뷰했다. 

▲ 공감 사무실에서 만난 염형국 변호사가 환하게 웃고 있다. ⓒ 유성애

 무모한 젊음이 뿌린 ‘희망 씨앗’

“사실 처음에는 시민단체가 뭐하는 곳인지도 잘 몰랐어요. 막연히 참여연대에서 시민운동 일을 하고 싶었는데 채용 계획이 없다고 하더군요. 박원순 변호사님을 만났더니 ‘공익변호사 기금’을 모을 테니 그걸로 같이 일해보자고 하셨어요. 아름다운재단도 실은 익명의 한 독지가가 공익변호사를 만들라며 기부한 5천만원에서 시작됐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렇게 시작한 공감은 ‘낮은 곳에 임하는 용기로 소외된 희망을 되살린다’를 표어로 삼았다. 2003년 12월 염 변호사가 일을 시작한 뒤 다음해 김영수(44), 소라미(38), 정정훈(42) 변호사가 합류했다. 올해로 아홉 해를 넘긴 공감에는 현재 변호사 일곱 명과 간사 두 명이 상근하며 활동 중이다. 변호사들 중에는 검사 자리도, 유명 법률회사(로펌)의 제의도 마다하고 온 이들도 있다. 

▲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에서 활동하는 구성원들이 2010년 함께 찍은 사진. ⓒ 공감

서로를 ‘구성원’이라 부르는 공감의 변호사들은 여성과 장애인의 인권, 이주와 난민 등 제각기 전문 분야를 맡아 법률업무를 처리한다. 염 변호사는 주로 장애인의 인권과 관련된 일을 한다. 변호사들은 또 중학교 등에 직접 찾아가 게임형식으로 노동인권을 교육하거나, 노인복지관에서 유산과 상속문제를 자문하는 등 일반인을 대상으로 공익법교육도 하고 있다.

공감은 비영리 공익조직이기 때문에 변호사 일을 맡아도 수임료를 받지 않는다. 차별이나 인권침해 등 공익성이 있는 사건이면서 변호사를 선임할 만한 경제력이 없는 사람이 의뢰할 때 나선다. 그러다보니 의뢰인들은 주로 청소노동자와 국제적 난민, 장애인과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다.

▲ 2011년 사회복지사업법 개정 촉구를 위해 집회현장에 나간 염형국 변호사. ⓒ 공감

공감의 주된 운영재원은 시민 등 독지가들의 기부금이기 때문에 인건비 등 경비는 최소화하려 노력한다. 사무실은 서울 종로구 원서동의 허름한 건물에 입주해있고, 한여름에도 에어컨 대신 오래된 선풍기로 더위를 식힌다. 인턴도 무급 자원활동가 형식으로 활용한다. 그럼에도 염 변호사는 공감에서 일하는 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로펌에서 일하는 제 친구들 중엔 연봉 1억이 넘는 친구도 있어요. 저요? 제가 올해로 10년차 변호사인데 3500만원이나 될까?(웃음) 그래도 변호사가 되는 거나 돈을 버는 것 자체가 인생의 목적은 아니잖아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제가 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일이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요.”

공감은 그동안 다양한 사건을 통해 사회에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 냈다. 예를 들면 지난해 서울지방고용노동청 등을 상대로 제기한 ‘청소년 노동 감독 정보공개청구 거부처분 취소소송’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2011년 3월 청소년 ‘알바생’들의 부당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정보공개를 청구했지만 노동청들이 ‘개인정보 및 영업상 비밀’이라며 거부한 데 대해 소송을 제기해 이긴 것이다. 법원은 ‘사업장명, 대표자 성명 등을 제외하고 공개할 경우 사생활 비밀을 침해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공감의 손을 들어줬다. 이런 정보공개는 최저임금도 못 받고 장시간 일하는 청소년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데 토대가 된다. 

 

▲ 공감 변호사들이 이주민 강제추방에 관한 기자회견을 위해 헌법재판소 앞에 서 있다. ⓒ 공감

천천히, 느리지만 확실한 변화를 꿈꾸며

염 변호사는 지금까지 맡았던 소송 중 지난 2006년의 ‘장애인 청계천 이동권 및 접근권 차별 손해배상청구 소송’ 등 장애인 차별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 사건들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엔 제도에 비해 아직 의식이 따라주지 못하는 영역이 많아 약자들이 설움을 많이 받는데, 소송을 통해 이런 현실을 조금씩 바꾸면서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현재는 시청각 장애인들이 지난해 말 대통령선거 당시 선거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지 못했던 문제와 관련해 참정권소송을 진행 중이기도 하다.

“인권 의식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 거잖아요. 공감이 천천히,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를 바람직한 모습으로 만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 저희를 보고 공익변호사를 꿈꾸는 사람들이 더 나왔으면 좋겠고, 저희가 그 꿈을 지원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의 바람대로 같은 희망을 갖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매해 20명 정도를 선발하는 공감의 인턴은 무급임에도 법대 학생들을 비롯해 신청자가 넘치고, 인턴 출신들을 중심으로 전국의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 ‘공익인권법학회’도 생겼다. 법무법인 태평양과 세종 등 대형 로펌이 변호사들의 프로보노(pro bono) 활동, 즉 보수를 받지 않고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원활동을 지원하기 시작했는가 하면, 2011년 7월에는 또 다른 변호사들이 모여 만든 이주민 인권 비영리단체 ‘어필(APIL)’도 생겼다.  

▲ 공감에서 활동한 인턴들이 수료식때 찍은 사진. 현재는 17기 자원활동가를 모집 중이다. ⓒ 공감

염 변호사는 “앞서 활동을 시작한 단체로서 후발 단체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며 “앞으로도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 문제를 알리고 해결하는 단체들이 더 많이 생겨났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법률전문가 뿐 아니라 언론의 활동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언론은 사회의 공기(公器)잖아요. 그런데 특정 사주의 이념에 따라 왜곡되는 언론들이 적지 않은 것 같아요. 그저 기자라는 직업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안 돼요. 언론인으로서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기 위해 어떤 것들을 할 수 있는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죠.”

▲ 지난 1월 29일 창립행사 당시 함께 노래 중인 공감 관계자들. 왼쪽에 염형국 변호사가 보인다. ⓒ 공감

아름다운재단 소속으로 운영기금을 지원받던 공감은 지난달 29일 ‘공익인권법재단'으로 독립했다. 재정적으로 충분하진 않지만 자립 기반이 마련된 것으로 판단했다고 염 변호사는 말했다. 앞으로의 각오를 묻자 그는 ‘변호사법 1조 1항’을 소개했다.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합니다.”

‘돈 욕심’을 내려놓은 대신 ‘인권과 정의’에 집중하는 염 변호사와 공감의 동료들은 오늘도 가난한 의뢰인들을 위해 힘차게 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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