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보다 광장 선호했던 민주당 선거운동의 귀결
가학적 민주당 책임론의 병폐…언론은 책임 없나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영화는 종종 역사를 왜곡하는데, 특히 로마 시대에 패배한 검투사를 죽이는 장면들은 극적 효과를 노린 허구가 많다. 영국 <비비시>(BBC)는 2007년 터키 에페수스에서 67명의 검투사 공동묘지를 발굴·조사한 결과 패배한 검투사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꽤 높고 값비싼 치료를 받은 경우도 있다고 보도했다.

유골에는 한꺼번에 여러 군데 상처를 입은 흔적이 없어 결투가 심판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이루어졌고 패자를 계속 공격하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정당당한 승부정신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거액을 들여 양성한 검투사를 함부로 죽일 이유가 없었을 터이다. 다만 비겁한 행동을 했을 때 장내 여론에 따라, 치명상을 입었을 때 안락사를 위해 최후의 일격을 가했던 것이다. 술수를 쓰지 않은 패배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패배한 검투사보다 더 가혹한 비난의 뭇매가 선거에 진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에게 가해지고 있다. ‘친노책임론’과 ‘민주당이 좌클릭해 중도표를 잃었다’는 게 대표적인 비난과 패인 분석이다. 그 결과 당을 수습하기 위해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 위원 다수와 ‘친노’였던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까지 ‘중도만이 살길’이라고 주장한다.

가장 바보스런 짓은 목표와 수단을 혼동해 목표, 곧 당의 진로를 수정하고 야당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정당의 목표는 정강정책, 곧 공약이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집권하려 한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내걸었던 공약인 경제민주화와 복지강화, 남북평화체제 구축 등 주요 공약 가운데 무엇이 잘못됐고 구체적으로 어떤 ‘좌클릭 공약’이 끼어들어 선거에 졌다는 말인가?

패인은 공약이 아니라 그것을 유권자들에게 전달하는 수단과 방법, 선거에 임하는 민주당의 태도에 있었다고 본다. 그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비대위원들이 “종편방송을 무시한 게 잘못이었다”느니 “경선 때 모바일 투표가 위헌적이었다”는 둥 엉뚱한 데서 패인을 찾았다는 점이다. 그나마 대중 속으로 들어가 선거운동을 벌인 게 모바일 투표였는데도….

민주당의 진짜 패인은 대통령 후보만 뛰고 당원들이 대중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 등 간절함에서 새누리당에 밀렸다는 것이다. 대선기간 내내 지역구에서 살았다는 한 새누리당 의원은 “노인들만 사는 시골 구석구석을 새마을운동 노래를 틀고 다녔다”며 “야당 사람들은 마주친 적도 없다”고 말했다. 민주당에서는 후보 경선을 했던 중진들은 물론 의원들도 문 후보의 광화문광장 집회 등에 얼굴이나 비치며 생색을 냈다. 선거운동에 소극적이었던 사람일수록 책임론을 떠들고 다니는 게 요즘 민주당 풍경이다.

골목길이나 시장보다 광장을 선호하는 게 민주당식 캠페인 방식이다. ‘발품’을 팔기보다 광장에서 군중집회를 열고 ‘한 방’을 노리는 수법은 2008년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야당의 운동방식으로 굳어졌다. 대선 패배 뒤에도 비대위원들은 광주 5·18민주묘지와 김해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부산 민주공원을 찾아가 사죄했을 뿐, 골목이나 시장통으로 직접 유권자들을 찾아가 사죄하지는 않았다.

 

사실 우리는 광장의 정치문화가 일천하다. 광장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하고 토론문화가 성숙했던 서양과 달리 우리는 길을 중심으로 취락이 형성됐다. 유신이 시작될 무렵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5·16광장(여의도광장)조차 도시계획법상 ‘광로’, 곧 ‘넓은 길’이었다. 서양에서는 파리 바스티유광장이든 모스크바 붉은광장이든 광장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역사가 소용돌이쳤지만, 우리는 3·1운동이든 4·19혁명이든 거리에서 사태가 확산됐다.

광장이 연단에 선 사람들이 주도하는 일방적 운동공간이라면 거리는 쌍방향적 운동공간이다. 거리에서는 전단지도 나눠주기 좋고 시민들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6월항쟁도 여의도광장 같은 데서 벌였다면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광장에 모이는 사람은 대개 지지자들이지만 거리와 시장통에서는 부동층을 포섭할 수 있다. 광장에 모인 군중은 흩어지지만 거리와 시장통이 일터인 사람들은 상주하면서 말을 만들고 퍼뜨린다. 공유지인 광장이 아니라 자신의 일터를 찾은 사람에게 느끼는 친밀감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민주당의 손발인 간부들과 당원들뿐 아니라 두뇌집단인 민주정책연구원도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소에 밀려 존재감이 없었다. 경제민주화를 선점당하고 마치 복지에서도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차이점을 부각시키지 못한 것은 진보언론의 책임도 크다.

<한겨레>는 대선이 한 달 가까이 지난 14일부터 ‘민주당의 길을 묻는다’는 시리즈를 시작해 민주당의 문제점들을 파헤쳤다. 그러나 <한겨레>도 일정 부분 그 문제들에 연루돼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계파담합 정치’ 문제를 지적했지만 <한겨레>도 그런 구조에 입각한 기사들을 양산하지 않았던가? ‘데이터에 근거한 과학 선거’를 제시하면서 ‘전략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감에 의존하는 낡은 습성과 결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지만, <한겨레>는 얼마나 데이터와 취재에 근거한 ‘과학 보도’를 했던가? 어떤 식으로든 단일화만 하면 이긴다는 야당의 착각은 <한겨레>의 착각이기도 했다.

책임론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진짜 긴요한 것은 민주당이 ‘자학’과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제1야당 구실을 다하는 것이다. 패배 원인은 불공정 게임에도 있었다. 이명박 정권은 작위와 부작위를 통해 대형 선거법 위반 사건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찰청은 ‘국정원녀 댓글 사건’을 혐의 없다고 조기 발표했고, 감사원은 ‘총체적 실패’로 드러난 4대강 감사 결과를 질질 끌다가 대선 후에야 발표했다.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논란’ 등 색깔론도 진보언론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먹혀들었다.

이 시점에서 진보언론이 역점을 둬야 할 부분은 야당에 대한 ‘가학’이 아니라 출범 전부터 권위주의 정권의 면모를 드러내는 여당의 오만을 제대로 견제하는 것이다. 민주당이 죄인을 자처하면서 움츠러들수록 집권자는 인사독단과 정책독점, 불합리한 정부조직 개편을 밀고 나가려 할 것이다.

선거 때는 부각되지 못했지만 민주당은 설득력 있다고 판단되는 정책들을 계속 들이밀어야 한다. 선거에는 졌지만 ‘놓친 열차’가 아름다웠음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지 못한다면 야당에 내일은 없다. ‘패배했을 때는 다시 도전하고 승리했을 때는 아량을 베풀라’는 처칠의 충고가 정반대로 실행되는 곳이 우리 정치판이다. 진보언론은 뭘 하는가?


* 이 기사는 <한겨레>와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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